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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살구색 노트
게시물ID : lovestory_8560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닥터블랑
추천 : 1
조회수 : 264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8/06/07 09: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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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대학원 신입생의 연령대는 다양했다. 학부를 졸업한 동시에 입학한 어린 친구들도 있었고, 내일모레면 환갑을 맞이하는 늦깎이 대학원생도 있었다. 동기들 중에서도 가장 나이가 많은 분을 우리는 큰형님이라고 불렀다. 큰형님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자리에서 돌아가면서 자기소개를 할 때 다짜고짜 캠퍼스 커플을 경험해보기 위해 입학했다고 우리에게 엄포를 놓았다. 약간은 더듬거리는 말투였다. 누가 보아도 그건 조크였지만 아무도 웃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 사람이랑은 절대로 가까이 지내지 말자고. 그러나 미래는 알 수 없는 것. 졸업 작품 팀 프로젝트를 함께 하면서 큰형님과 나는 스물다섯 살이 넘는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결국 친해지고 말았다.

졸업한 뒤에도 큰형님은 작은형님과 나를 함께 가끔씩 집 근처로 불러 저녁을 먹었는데, 최근에는 큰형님이 이사를 했다. 더 이상 그 집에 살 필요가 없어서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긴 것이다. 큰형님은 집들이 대신 작은형님과 나를 서울의 한 갈비집으로 데려갔다. 집들이를 집에서 하는 게 귀찮아서였다. 갈비집에서 집들이를 하는 게 머쓱했는지 그는 그곳이 얼마 전에 수요미식회에 나온 맛집이라고 몇 번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리 미안해할 일은 아니었다. 큰형님은 한결 편하게 집들이를 치를 수 있어서 좋았고 작은형님과 나는 큰형님이 손수 해준 요리를 맛보게 되는 사태는 면했기에 서로가 참 다행이었다.

갈비를 뜯으며 큰형님은 얼마 전에 받았던 건강검진 결과를 털어놓았다. 의사를 만나기 전 그는 스스로가 체감하는 몸 상태를 감안했을 때 자신이 곧 죽게 될 것으로 거의 확신했다고 했다. 암 같은 중증 질병에 걸렸을 거라고 말이다. 그래서 평생의 소원이었던 크루즈 여행을 다녀와야겠다며 후배에게 예약을 부탁했다.

 

"비만에다가 당뇨가 조금 있네요."

 

의사의 말은 그게 다였고, 크루즈 여행은 물 건너갔다. 큰형님은 지독할 정도로 끈질기게 줄담배를 피워대는데 의사는 폐만큼은 유난스럽게 깨끗하다는 소견을 보였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작은형님은 자꾸만 가방에 손을 집어넣었다 빼기를 반복하더니 결국 담배 한 갑을 꺼냈다. 여행을 다녀온 한 지인한테 받은 태국산 담배였다. 작은형님은 포장도 뜯지 않은 새 담배를 큰형님한테 내밀었다. 즉흥적이긴 했으나 나름대로 축하선물을 건넨 거였다. 만만치 않은 끽연가였던 작은형님으로서는 매우 큰 선심을 쓴 셈이었다. 큰형님은 작은형님이 입맛을 다시는 표정을 못 본 건 아니었지만 끝내 사양은 하지 않고 담배를 슬그머니 주머니에 넣었다.

 

신축 아파트는 아늑했다. 큰형님이 수십 년 째 모아온 폴라로이드 카메라 수십 종이 한쪽 벽면에 가득 진열되어 있었고, 반대편 벽에는 오래된 록 그룹 LP판과 테이프, CD가 가득했다.

큰형님은 아파트 지하에 사우나가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이곳으로 입주를 결정했다고 했다. 그러나 사우나가 완공되려면 4개월이나 더 기다려야 했다. 집 화장실에 물기가 남는 걸 유독 싫어하는 큰형님은 목욕을 한 번 하려면 옆 동네까지 차를 몰고 나가야 한다고 투덜거렸다.

 

"뭐 도와드릴 건 없어요?"

 

큰형님의 새집 거실에서 간단하게 2차를 치른 후 내일을 위해 일찍 자리를 털고 일어날 때 작은형님이 물었다. 현관에서 신발을 신는데 한쪽에 쌓여 있는 이사 박스가 눈에 들어온 것이다. 큰형님은 가는 길에 분리수거장에 박스를 좀 버려달라고 했다. 슬쩍 열어보니 안에는 짐 정리를 하면서 걸러낸 오래된 물건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대충 훑어봐도 멀쩡한 것들이 많았다. 그중에는 페레가모나 버버리 같은 명품 브랜드의 상자도 보였다. 작은형님과 나는 짧은 사이 눈빛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의사를 확인했다. 그 물건들은 우리가 도맡아 처리하는 게 당연했다. 멀쩡한데 싫증이 나서 큰형님이 명품 지갑이나 키링, 혹시 그보다 더 값나가는 물건을 버렸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재활용할 의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작은형님과 나는 두말도 않고 박스를 들고 나와서 분리수거장 보도블록 위에 좌판을 벌이듯 쏟아 보았다.

우리의 기대와 달리 명품 상자는 죄다 빈 껍데기였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물건들을 조금 더 헤집어 보았다. 그중에서도 뭐 쓸만한 물건이 혹시 없을까 해서였다.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전통 제본 방식으로 만든 한지 노트였다. 겉표지에는 이종국 작가의 <꽃소리>가 인쇄되어 있었다. 노트는 첫페이지도 깨끗한 새것이었다. 종잇장은 오래 되어서 살구색으로 변했지만 살구색 한지는 오히려 더 그럴듯하게 보였다. 나는 그것을 가방에 넣었다.

작은형님은 광폭밴드에 PUMA 철자가 적힌 팬티를 집어 들었다.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전에 큰형님으로부터 전해 들은 적이 있었다.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큰형님이 아는 남동생한테 속옷을 선물했는데 큰형님이 피우던 담배 냄새가 이미 팬티에 다 스며든 다음이라서 새것 그대로 도로 반납 받았다는 그 팬티였다. 작은형님은 도약하는 푸마 로고를 보고 잠시 고민하다가 팬티의 냄새를 맡아보고는 미간을 모았다. 듣던 대로 담배 냄새가 나긴 나는 모양이었다. 고민 끝에 팬티를 곱게 접어 가방에 넣는 작은형님의 손놀림을 보며 내가 말했다.

 

"괜찮으시겠어요?"

"한 번도 안 입었댔잖아. 너도 그렇게 들었지?"

"그렇긴 해요."

"그럼 상관없지 뭐. 메이컨데."

 

작은 형님과 나는 그런 대화를 주고받으며 각자 챙긴 물건을 들고 아파트 단지를 나섰다. 그 날 이후 계절이 바뀌고도 한참이 지났으니 지금쯤은 아마 큰형님이 사는 아파트 지하에 사우나가 들어섰을 거다. 그래서 더 이상 큰형님이 씻기 위해 차를 몰고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작은형님은 그렇게 가져간 푸마 팬티를 입었을까. 내가 챙겼던 살구색으로 바랜 한지 노트는 아직도 내 방 책장 구석에 꽂혀 있다. 가져왔을 때와 똑같이 새것 그대로 말이다.

 

꼭 필요하지 않더라도 곁에 두게 되는 물건이 있다. 딱히 비싼 것도 아닌데다가, 가지고 있어봤자 쓸 데도 마땅치 않고 자리만 차지하지만 버리기는 영 싫어서 곁에 두어야만 비로소 안심이 되는 것들 말이다. 그런 것들이 내 방에는 한가득 쌓여 있다. 내 마음이 방의 도상을 하고 있다면 그 또한 비슷한 형편일 거다. 그곳은 틀림없이 큰형님이나 작은형님을 닮은 폴라로이드 카메라, LP, 푸마 팬티, 살구색 노트, 꼬인 낚싯줄 같은 별 잡동사니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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