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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선언문
게시물ID : readers_3194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shinejade
추천 : 0
조회수 : 399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8/07/06 23:19:54




  표백 세대와 자살 선언

  1978년 이후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유지, 보수자의 운명을 띠고 세상에 났다.
이 사회에서 새로 뭔가를 설계하거나 건설할 일 없이 이미 만들어진 사회를 잘 굴러
가게 만드는 게 이들의 임무라는 뜻이다. 이들은 부품으로 태어나 노예로 죽을 팔자
다.
  나는 여기서 나를 포함해 이런 사명을 부여받은 우리 세대의 젊은이들이 어떻게 해
서 만성적인 좌절감에 빠지는지 밝히고, 그런 좌절감이 누구의 탓이라기보다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 원인에서 기인한 근본적인 문제임을 증명해보겠다. 또 타고난 능력과 
근면, 성실함으로 개인적인 성취를 이루는 것은 우리가 겪고 있는 굴육에 대한 답이 
니며, 그런 성공은 본질적으로 시시한 것임을 논해보겠다.
  먼저 사회의 완성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완성된 사회라는 것은 구성원 또는 계층간의 갈등이 완전히 사라진 사회를 의미하지 
않는다. 완성된 사회는 그런 갈등과 모순이 어느 범위 이내에서 더 커지지 않는 상태로
 계속 지속될 수 있는 사회를 의미한다.
  서구 국가들과 아시아의 일본, 한국은 이런 단계에 도달했다. 한국은 경제성장과 민주
화에 성공하면서 '완성된 사회'의 초입에 접어들었다.
  완성된 사회에도 근본적인 불의와 부조리는 있으나, 완성된 사회는 한 가지 답을 고집
하지 않음으로써 그 부조리를 피해간다.
  이 시스템에서는 어떤 모순도 근본적으로 해결되지는 않지만, 또 어떤 모순도 혁명이 
일어날 정도로는 쌓이지 못한다. 고작해야 '선거 혁명'이다. 즉 오늘날 진보와 보수, 좌파
와 우파 사이의 논쟁은 적당한 온도의 온수를 놓고 뜨거운 물이 나오는 수도관과 차가운 
물이 나오는 관 사이에 레버를 어느 위치에 놓느냐를 두고 벌이는 싸움에 불과하다.
  체제를 위협할 만한 심각한 모순이 없는 가운데, 완성된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이데올
리기인 자유민주주의와 수정자본주의를 대체할 만한 사상은 아직 보이지 않고 있다.
  일부 진보 세력이 대안이라고 내놓는 이데올로기는 기실 자유민주주의와 수정자본주의 
틀 안에서의 미세 수정에 불과하다. 또 자유민주주의와 수정자본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격한 이데올로기 대부분은 그 현실성을 따지기도 전에 논리의 정합성과 일관성에서 
절망적으로 유치한 수준에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를 포함한 우리 이후의 세대들은 혁신적인 사상을 내거나 
시도할 수 없고, 그런 까닭에 진정으로 세상을 바꿀 힘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 변화가 완만하게 이뤄졌던 다른 서구 국가들과 달리 한국에서는 현 세대와 이전 
세대가 처한 환경의 격차가 매우 뚜렷하다. 자신들의 힘으로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룰 수 
있었던, 그것도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드라마틱하게 그 시대적 사명을 이뤄낸 
세대가 우리 세대를 우습게 보고 '열심히 노력하지 않는다'거나 '분노할 줄 모른다'고 
비아냥거리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잘못이 아니다.
  새로운 담론을 제기할 수조차 없는 환경은 우리 세대의 가치관에도 예상치 못한 영향을 
미친다. 이른바 '표백 세대'의 등장이다.
  이 세대에게는 실질적으로 어떤 사상도 완전히 새롭지 않으며, 사회가 부모나 교사를 
통해 전달하는 지배 사상에 의문을 갖거나 다른 생각에 빠지는 것은 낭비일 뿐이다. 그런 
시도는 기껏 잘돼봤자 기존 지배 사상이 얼마나 심오하고 빈틈없는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는 효과만 낳는다.
  이들에게 지배 사상은 큰 틀에서 항상 옳으며, 그 사상을 받아들이는 데 개인마다 과정과 
깊이가 다를 수는 있으나 결론은 언제나 같다. 이들은 지배 사상을 받아들이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다.
  따라서 실제 삶에서 온갖 종류의 불편함과 부당함을 겪어야 하는데도, 이에 대한 문제 
제기는 개인이나 작은 이익집단 단위를 넘어서지 못하게 되며, 세계는 사상적으로 완전무결한 
상태가 된다.
  이것이 바로 표백 과정이다. 아무도 더 나은 시스템을 떠올리지 못한다. 거대한 흰색 세계는 
모든 빛을 흡수하며 무결점 상태를 유지한다.
  위대한 일을 할 기회를 박탈당한 세대는 어떻게 되는가? 그들은 출세나 개인적인 성공과 
같은 보다 작은 성취에 매달리게 된다. 그런데 완성된 사회는 개인적인 성공에 대해 사실상 
단 하나의 평가기준만 지니고 있다.
  이는 자유민주주의와 수정자본주의의 결합에서 필연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결과다. 
자유민주주의는 교리에 따라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근본적으로 우월할 수 없고 모든 
사람이 가치 면에서 평등하다고 주장한다. 수정자본주의는 시장 가치를 바탕으로 하는 
평가 척도 한 가지만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두 이데올로기가 결합한 가치 체계에서 한 인간의 가치를 재는 방법은 '그 사람이 
자유민주주의가 허용하는 범위 한에 있는다(독재자나 범죄자가 아닌가)'와 '그 사람이 얼마나 
높은 시장 가치를 갖고 있는가'가 된다.
  따라서 완성된 사회에서 표백 세대의 젊은이는 부에 대한 욕심이 크지 않더라도 자신의 
능력과 야망을 증명하려면 돈을 버는 경쟁에 뛰어들어야 한다. 그 외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의 존재 가치를 주장할 다른 방법이 없다.
  군대를 일으켜 무공을 세우는 일은 자유민주주의의 이념에 어긋나며, 단식과 묵상으로 
깨달음을 얻는 행위는 시장에서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
  그러나 돈을 얼마나 많이 버느냐를 놓고 벌이는 시합에서도 표백 세대는 좌절할 수밖에 
없다. 완성된 사회는 가능성이 그만큼 고갈된 사회기 때문에, 부를 창출하는 능력에서도 
성숙한 단계에 있다. 닷컴 열풍, 부동산 시장 활황과 같은 국지적인 성장은 때때로 가능하지만 
산업화 초-중반에 볼 수 있었던 '경제 전반에 걸친 활기'는 찾아보기 어렵다. 완성된 사회의 
경제성장률은 이론적으로 0퍼센트에 가까워야 한다.
  즉 표백 세대들은 아주 적은 양의 부를 차지하기 위해 이전 세대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경쟁을 치러야 하며, 그들에게 열린 가능성은 사회가 완성되기 전 패기 있는 구성원들이 
기대할 수 있었던 것에 비하면 아주 하찮은 것에 불과하다. 가장 똑똑하다는 젊은이들조차 
엘리트 조직의 끄트머리가 되기 위해 몇 년을 골방에 처박혀야 하고, 그런 노력이 결실을 
얻은 뒤에도 조직의 말단에서 다시 경쟁을 시작해야 한다.
  표백 세대는 같은 세대뿐 아니라 이미 사회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기성세대들과도 
경쟁해야 하는데, 사회 각 분야가 고도로 발전해 있고 표백 세대들이 가진 자원이 거의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매우 불리한 게임이다. 분배 방식이라는 게임의 규칙조차 기성세대가 
정한 것을 따라야 한다.
  이런 한계 속에서 표백 세대의 내면은 추하게 일그러진다. 그들은 자신의 역사적인 
위치나 사명에 대해 깊이 고민할 것이 없으므로 역사 의식이 희박해지며, 민족주의처럼 
그들의 자존감을 손쉽게 높여줄 수 있는 불합리하고 값싼 이데올로기에 의존하는 
경향이 생긴다.
  박탈감과 좌절감은 뿌리 깊이 박혀 있지만 이런 좌절감은 집단적인 분노로 발전하지 못한다. 
투쟁은 손해 보는 일이라는 것을 모두 다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 게시판에서는 
선배와 상사, 기성세대를 찢어죽일 것처럼 성토하다가도 면접 시험장에서는 한없이 
고분고분해지고 공손해진다.
  패배를 자연스러운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이들 중 몇몇은 정면승부를 벌이고 작은 이득을 
위해 아득바득 싸우는 태도를 촌스럽다고 여기에 된다. 기왕에 지는 것, 한발 물러난 자세로 
"나는 크게 개의치 않는다"와 같은 태도를 보이거나 아예 싸움을 피하는 것이 그나마 자존심을 
지키는 길이다. 그것이 '쿨한 모습'으로 받아들여진다.
  진정으로 새로운 주장이나 사상이 없는 상태에서 조롱과 비아냥거림, 의미없는 장난이 
이 세대의 트레이드마크가 된다.
  사유와 생산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는 표백 세대는 소비를 삶의 표현 양식으로 삼는데, 
이는 여가와 사교 생활에서 문화예술 및 창작 활동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면에 걸쳐 
이들의 사고와 행태에 깊숙이 영향을 미친다.
  물론 이들이라고 해서 바보는 아니며, '뭔가가 잘못됐다'는 느낌정도는 갖고 있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모순이 없는 사회에 대해 그런 의심을 품는 행위는 자칫 그 자신을 
바보라고 인정하는 셈이 될수도 있기에, 이륻ㄹ은 그런 생각을 겉으로 잘 드러내지 않는다. 
고로, 음흉함은 그들의 제2의 천성이 된다.
  마르크스는 노예는 자신의 노예적 존재를 지속할 수 있는 일정한 조건을 보장받는 데 
비해 노동자는 그 계급적 지위가 점점 가라 앉는 처지에 있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 
노동자는 노예보다 더 비참하다고 주장했다.
  표백 세대는 정신적인 면에서 산업화 시대의 노동자들보다도 더 한심한 처지에 있다.
  산업화 시대의 노동자들은 사회주의 사회라는 '다음 단계'를 꿈꾸며, 프롤레타리라 
운동의 주체로서 뚜렷한 이념과 이상은 갖고 정치권력을 장악하려는 시도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표백 세대는 지배 이념에 맞서 그들을 묶어주거나 그들의 이익을 대변할 
이념이 없으며, 그렇기에 원자화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낙원'에서 태어난 이들에게 
이상향을 있을 수 없기에, 표백 세대는 혁명과 변역에 관한 한 아무런 희망을 품을 수 없다.
  이들은 사회를 비난할 권리조차 박탈당한다. 완성된 사회에서 표백 세대의 실패는 
그들 개개인의 무능력 탓으로 귀결된다.
  표백 세대가 완성된 사회를 살아가는 방법은 순응, 타협, 소극적 저항, 적극적 저항의 
네 가지로 분류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
  순응은 완성된 사회의 시스템과 경쟁 체제를 받아들이고 그에 맞는 삶을 사는 것이다. 
열심히 공해 판검사나 의사가 되거나 좋은 기업에 취직해 ';치열하게'살다가 그에 상응하는 
대가로 부와 명예를 얻는 것이 목표다. 존경받는 기업인이나 법조인, 정치인들은 거의 다 
이 분류에 해당한다. 그런가 하면 '고시 폐인', 범죄자와 사기꾼, 실패한 사업가나 장사꾼, 
'악바리' 혹은 '또순이'라는 칭찬을 듣는 저소득층도 이 유형에 속한다.
  타협은 완성된 사회의 가치관에 대해 약간의 의심을 품으면서도 대체로 그에 따라가는 
삶의 형태다. 이런 삶의 유형을 선택하는 사람들은 이타적인 행위를 통해 자기만족을 
얻으며 그런 의심을 억누른다. 여가 시간에 봉사 활동을 하거나 권력에 대한 의지 없이 
선의로 정당 활동에 참여하거나 기부금을 내는 행동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그러나 그런 
활동이 근본적으로 삶의 우선 순위에서 가장 앞에 오는 것이 아니며, 그런 활동들에 대한 
욕구도 따지고 보면 이기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런 삶의 형태는 완성된 사회에 대단한 
위협이 되지 못하며, 오히려 권장되기까지 한다.
  소극적 저항은 완성된 사회의 가치관을 전복시키고자 하는 의도는 없으나 적어도 
그 가치관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닌 삶의 형태가. 예술가, 종교인, 전업 NGO 등이 
여기에 해당하며, '돈 되는 일은 아니지만 좋아하는 일을 하는' 직업인, "패배자라고 
불려도 좋으니 아등바등 살지 않고 속 편하게 생활하고 싶다"라며 교직원이나 하급 
공무원, 카페 사장 따위를 꿈꾸는 부류도 이에 속한다. 이들은 완성된 사회의 가치관을 
따르는 일을 경멸하지만, 자신들이 완성된 사회로부터 제대로 된 존경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에 괴로워하기도 한다.
  실제로 이들 중 일부는 경쟁 시스템에서 도피하기 위해 이런 삶의 방식을 선택한 것으로, 
세속적인 성공을 거머쥐게 되면 언제든지 '순응형'이나 '타협형'으로 태도를 바꿀 준비가 돼 있다.
  소극적 저항자들은 대체로 연대를 하지 않으며 사회 시스템을 전복하려는 의도가 
없기 때문에, 수가 너무 많아지지 않은 한 완성된 사회의 관점에서 대체로 무해하다.
  적극적 저항은 사회에 대한 폭력적인 타도를 시도하는 것이다. 정의에 따라, 완성된 
사회에서 적극적 저항은 이념적 근거를 가질 수 없다. 적극적 저항자들은 처참할 정도로 
논리가 없거나 아니면 일반인들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극단적인 원리주의를 자신들의 
이념으로 채택한다. 프랑스나 그리스 등에서 간혹 보는 방향성 없는 학생 폭동이 전자의 
예이며, 이슬람 근본주의자나 대단히 공격적이고 반체제적인 환경주의, 공산주의, 
민족주의 그룹 등이 후자의 예다.
  완성된 사회는 이들을 사회의 적으로 규정하는 데 말성임이 없으며 이념적으로든 
물리적으로든 적극적 저항자들의 성공 가능성을 따져보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들은 
기껏해야 기억에 남는 테러를 몇 건 저지를 수 있을 따름이다.
  자살 선언은 무엇이며, 자살 선언자는 누구인가.
  자살 선언은 자의식적이고 자주적인 운동이며, 다수의 이익을 위한 것이기는 
하나 다수의 운동은 아니다.
  자살 선언은 위에 언급한 네 가지 삶의 방식 어느 것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살 선언은 완성된 사회를 '살아가는' 방법이 아니라 그것을 거부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자살 선언은 완성된 사회에서 표백 세대가 할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저항 운동이다. 
그것은 극단적이면서 저항이 불가능한 사회에서 유일하게 논리적으로 기능하는 저항 
운동이기도 하다. 물을 인정할 수 없는 물고기가 할 수 있는 일은 한 가지뿐이다.
  자살 선언자들은 완성된 사회에서 그들이 얻을 수 있는 미약한 대가를 사양하며, 
완성된 사회를 긍정해 그 구조 안에서 성공을 거두는 것을 거부한다. 그들은 죽음의 
고통과 사후에 당할 모욕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사후 세계에 대한 어떤 기대나 
선망도 갖고 있지 않다.
  나는 자살 선언자에 대해 오나성된 사회가 쏟아질 비난이 어떤 것인지 이미 알고 있다. 
그들은 자살 선언자의 자살이 비겁한 도피와 현실 부정이며, "그럴(자살할) 용기와 의지가 
있다면 그 힘으로 살아라"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패전을 각오한 군인과 
순교자들처럼 명백하게 죽음을 선택한 이들에 대해서는 같은 주장을 하지 않는다.
  기실 완성된 사회는 어떤 사상이나 자존심을 위해 개인이 모든 것을 포기하는 
행위에 대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완성된 사회는 인간을 하찮은 욕망에 의해 
움직이는 존재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완성된 사회가 왜 그토록 자살 선언자를 두려워하는지도 설명이 된다. 
자살 선언자는 그 존재만으로 완성된 사회의 기본 가정을 부수며, 완성된 사회가 
완전하지 않음을 고발한다. 자살 선언자는 희고 완벽한 완성된 사회에서 지워지지 
않는 한 점 얼룩이다. 완성된 사회는 자살 선언자가 필요로 하는 것을 줄 능력이 
없으며, 자살 선언자의 행위를 이해조차 할 수 없다.
  자살 선언자들은 봉건사회를 무너뜨린 부르주아지나 공산 혁명을 시도한 
프롤레타리아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자살 선언자들의 목표는 완성된 사회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완성된 사회의 
천박함과 불완전성을 고발하고 자신들이 품고 있는 위대한 가능성을 증명하는 데 
있으며, 그 방법은 오로지 죽음이라는 완전한 거부뿐이다. 왜냐하면 봉건 시대의 
부르주아지와 산업 시대의 프롤레타리아에게는 대안과 미래가 있었으나 표백 세대와 
자살 선언자들에게는 그런 것이 없기 때문이다.
  완성된 사회는 사람들이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살아 있기를 선택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완성된 사회는 구성원들의 최대 복리를 위해 시스템을 움직이지만 
구성원들의 자존심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런 생각이 잘못됐음을 증명하기 위해 모든 
표백 세대가 자살해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 수천 명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할 것이다. 이 글을 쓰는 나 자신도 이미 5년 전에 자살했다.
  우리는 영웅으로 태어났으나 우리가 태어난 이 세상은 영웅의 삶을 허락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허락된 것은 영웅다운 죽음뿐이다.
  부모 세대가 만들어놓은 무대 위에서 하찮은 욕망을 채우는데 일 시간과 열정을 
허비하며 의미 없는 삶을 보내고 우리 세대가 별 볼일 없음을 시인할 것인가. 아니면 담대한 결단으로 
그대 안에 있는 위대한 가능성을 증명하고 우리를 비웃어오던 세상에 충격과 공포를 줄 것인가.
  선택은 그대에게 달렸다.





출처 표백 (장강명, 장편소설, 한겨레출판,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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