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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환] '아름다운 사제지간' 타이슨과 다마토
게시물ID : humordata_177365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rhaeo
추천 : 12
조회수 : 1526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18/09/28 16:10:21

[김대환] '아름다운 사제지간' 타이슨과 다마토




최근 ‘핵주먹’ 마이크 타이슨의 복귀설이 보도되며 격투계가 들썩거리고 있다. 

타이슨의 나이 및 몸 상태를 고려해 봤을 때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날 가능성이 다분하지만, 아직까지도 그의 복귀 소식에 모인 많은 관심을 보면 과연 ‘타이슨은 타이슨이다.’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타이슨은 종목을 막론하고 수많은 격투가들에게 가장 좋아하는 선수로 꼽히지만, 정작 일반 팬들에게는 귀를 깨무는 기행, 강간 및 폭행 사건 등 트러블 메이커로서의 이미지만 굉장히 강하게 부각되어 있다. 

하지만 그의 골수팬들은 입버릇처럼 얘기한다. “커스 다마토가 조금만 오래 살아있었더라면.......” 

커스 다마토는 과연 누구인가? 왜 타이슨의 팬들은 늘 그의 존재에 대해 그리움을 표할까? 너무 짧아서 안타까웠던, 하지만 너무나 강렬하고 아름다웠던 이 둘의 사제 관계에 대해 소개해 볼까 한다.

거리의 불량배 타이슨, 복싱을 접하다

타이슨은 뉴욕 브루클린 최악의 슬럼가에서 자라났다. 

아버지는 타이슨이 네 살 때 일찌감치 집을 나갔고, 어머니도 어린 그를 돌볼 여유가 없었다.
 
자연히 밖으로만 돌던 타이슨은 열 살 때 이미 허리에 총을 차고 다니며 가게를 털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두들겨 패고 돈을 뺏는 범죄자로 성장해 있었다.



어린 시절 타이슨의 모습

원래 타이슨은 부모님의 사랑을 갈구하던 나머지 자폐증적인 기질까지 갖고 있던 내성적인 아이였고, 독특한 발음과 뿔테 안경 때문에 친구들에게 놀림도 많이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어느 날 그가 좋아하던 비둘기를 재미로 죽이는 ‘동네 노는 형’들의 모습을 보고 타이슨은 눈이 뒤집히게 되고, 곧 자신의 두 주먹에 폭탄이 숨겨져 있었다는 걸 발견하게 된다. 

곧 타이슨은 길거리싸움에서 자신보다 대여섯 살 많은 형들을 모조리 때려눕히고, 아홉 살 때부터 열두 살 때까지 총 51회나 체포되는 ‘경력’을 자랑하는 악명 높은 소년범으로 성장한다.

타이슨이 복싱을 처음 접한 곳도 바로 뉴욕 주 최악의 소년범들이 모이는 소년원에서였다. 

재활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그곳에서 복싱을 가르치던 밥 스튜어트는 타이슨의 재능을 곧바로 알아봤고, 곧바로 그를 어디론가 데려갔다. 바로 복싱 명 코치 커스 다마토의 체육관이었다.

전설적 트레이너, 커스 다마토

“세상의 섭리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오묘하다. 

인생을 살아가며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 및 좋아하는 사람들을 찾아나간다. 

그다음 세상은 그걸 하나씩 빼앗아간다. 

이는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는 얘기와 같다. 내 친구들은 다 죽었다. 

난 눈도 잘 안 보이고 귀도 잘 들리지 않는다. 

세상의 기쁨을 모두 잃은 후 비로소 죽음을 받아들이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타이슨이 나타났다. 

타이슨은 내 모든 것이다. 타이슨은 내가 계속 살 수 있는 이유다.” -커스 다마토-



타이슨과 다마토의 다정한 모습

본인 얘기대로, 타이슨을 처음 만났을 때 다마토는 이미 일흔 두 살의 노인이었다. 

플로이드 페터슨과 호세 토레스라는 세계 챔피언들을 길러냈고, 무하마드 알리가 직접 찾아와 같이 일해 보자고 간청했을 정도로 복싱계에서 전설로 인정받던 이 위대한 노인은 아이러니하게도 단 한 번도 제대로 복싱을 해 본적이 없었다. 

열두 살 때 길거리에서 싸우다가 한쪽 눈의 시력을 잃었기에 애초 제대로 선수 생활을 하기엔 쉽지 않은 몸이었다. 

더구나 네 살 때 어머니를 잃고, 일곱 명의 형제 중 세 명이 죽는 험난한 유년기를 보낸 탓에 종교에 귀의할 생각까지 했던 걸 보면 전형적인 복싱 코치의 코스를 밟아 온 사람은 분명 아니다.

하지만 다마토에겐 스물두 살 때부터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수백 명의 복서들을 가르쳐온 코치로서의 노하우와 그 어떤 복싱 관계자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맑은 정신이 있었다. 

특유의 피커부 스타일(타이슨 스타일이라 보면 된다.)로 플로이드 페터슨을 세계 챔피언으로 만든 후 유명세를 탔지만, 

다음 작품이었던 호세 토레스에게서 단 한 푼의 돈도 받지 않았다. 토레스가 푸에르토리코에서 넘어온 가난뱅이 아마추어 복서였기 때문이었다. 

다마토는 토레스를 세계 챔피언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은퇴 후 주 체육 위원회 커미셔너 및 작가로서의 활동까지 할 수 있도록 도왔지만 토레스에게 아무것도 받지 않았다. 

둘 사이엔 계약서조차 없었다. 오히려 한 때 토레스가 파산해서 결혼도 못할 처지가 되자 다마토가 결혼식 비용을 대신 내주기까지 했다.



(사진 nate4-jose 호세 토레스. 올림픽 은메달리스트이자 프로 라이트헤비급 세계 챔피언을 지냈던 다마토의 수제자. 타이슨의 선배이자 오랜 친구이기도 했다.)

그래서 타이슨의 소년원 복싱 코치 스튜어트는 이토록 위대한 인물인 다마토가 불량소년에 불과한 타이슨에게 별 관심을 보이지 않을 것 같아 조바심을 내고 있었다. 

계속 얼굴 도장을 찍을 장기 계획까지 구상하고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다마토를 처음 만난 날 펼쳐진 스튜어트와의 3라운드 스파링에서 타이슨은 자신이 큼지막한 다이아몬드 원석임을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스튜어트는 전직 복서 출신이었지만 열네 살에 불과한 타이슨의 공격을 죽을힘을 다해 막아내야 했다. 

2라운드 중반 스튜어트의 펀치에 코가 부러졌지만, 타이슨은 상관하지 않고 3라운드 종료 공이 울릴 때까지 계속 주먹을 휘둘러댔다. 

스파링이 끝난 후 커스 다마토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 녀석은 역사상 최연소 세계 헤비급 챔피언에 오르게 될 것이다.”

(2편에서 계속




[김대환] 사후에도 타이슨을 걱정한 스승 다마토

김대환기사전송 2010-03-11 12:40

 
※ 1편에서 계속 ※ 

☞ '아름다운 사제지간' 타이슨과 다마토 다시 보기 

커스 다마토는 타이슨이 소년원에서 나오자마자 자신의 집으로 데려갔다. 

위대한 복서가 되기 위해서는 기술이나 힘보다 맑은 정신과 뜨거운 가슴이 더 중요하다고 믿었던 다마토는 그냥 복싱 코치가 아닌 타이슨의 인생 전반을 이끌어줄 아버지 역할을 하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잘 될 리 없었다. 

고삐 풀린 망아지 같던 타이슨은 학교에 가자마자 동급생들을 잔뜩 두들겨 팼고 공부에도 전혀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다마토는 타이슨을 꾸짖지 않고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는 사람 내면의 본질적 문제를 파악하는 눈을 갖고 있었다. 

플로이드 페터슨을 가르칠 당시, 다마토는 불량배 출신의 페터슨이 실은 뿌리 깊은 열등감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꿰뚫어봤다. 

다마토는 너무 소심해서 사람들과 대화조차 하기 힘들어했던 페터슨에게 단 한 번도 뭔가를 강요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사람들에게 페터슨을 계속 칭찬한 후 페터슨이 그들로부터 계속 칭찬을 들으며 자신감을 갖도록 만들었다. 

자신이 직접 기를 살려주려 하면 소심한 페터슨에게는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이다. 

대신 다마토는 자비를 털어 페터슨에게 최고급의 정장, 코트, 모자 등을 선물해 입혔다. 

페터슨 자신이 그렇게 대접받을 만큼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사람이란 걸 일깨워 주기 위해서였다. 

 

플로이드 페터슨. 타이슨처럼 불량 소년에 불과했지만 다마토의 가르침을 받은 후 열일곱 살 때 올림픽 금메달을 땄고, 스물두 살이 되기 직전 세계 챔피언 벨트를 허리에 둘렀다. 

다마토는 타이슨의 문제도 곧 파악했다.
 
사람들은 타이슨을 그저 폭력적인 소년으로 치부했지만, 다마토는 누구보다도 내성적인 타이슨이 글을 읽을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 창피해서 자꾸 학교 밖으로 돈다는 걸 알아차렸다. 

다마토는 조용히 “마이크, 세상에 멍청한 사람은 없어. 다만 배우려 하지 않는 사람들만 있을 뿐이야.”라 얘기한 후 학교를 그만두게 했다. 

그리고는 가정교사를 불러 타이슨에게 차근차근 글을 가르치게 하고, 전설적인 복서 조 루이스나 젝 뎀프시 등의 일대기 혹은 알렉산더 대왕이나 나폴레옹 위인전 등 타이슨이 좋아할 만한 책들을 골라 읽게 했다. 

또 주위 사람들에겐 사랑어린 격려와 칭찬으로 타이슨을 보듬게 했다. 

 

"불행한 환경에서 자라난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아주 무섭거나 치욕적인 일들을 겪는다. 

그 상처들은 그들의 재능과 인성 위에 막을 한 겹씩 한 겹씩 형성해 위대한 인간으로 성장하는 걸 막는다. 선생으로서 해야 할 일은 그 막들을 걷어내 주는 것이다.”-커스 다마토 

난생 처음으로 자신을 사랑으로 보살피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타이슨은 본래의 모습을 찾아갔다. 

어느새 타이슨은 어렸을 때 그토록 좋아했던 비둘기들을 다시 키우기 시작했다. 

훈련이 끝나면 100마리가 넘는 비둘기들에게 모이를 주거나, 오 갈 데 없는 도둑고양이들을 돌봐주는 게 타이슨의 휴식이었다. 

또다른 취미도 있었다. 바로 ‘복싱 연구’였다. 

다마토의 절친한 친구로서 타이슨의 매니지먼트 관련 일을 처리해 주던 짐 제이콥스는 26000편 이상의 복싱 영상을 갖고 있는 컬렉터였다.
 
타이슨은 매일 밤 커스 다마토와 함께 올드 챔피언들의 영상을 보며 토론하고 끊임없이 배웠다.
 
그래서 어느 날 과거 챔피언들에 대한 타이슨의 견해를 묻기 위해 찾아온 기자들은 입을 딱 벌릴 수 밖 에 없었다.
 
‘주먹만 센 멍청이’에 불과한 타이슨이 분명 소니 리스튼이나 조지 포먼 같은 ‘하드 펀쳐 동족’들만 좋아할 거라 지레짐작했다가 너무도 지적이며 날카로운 타이슨의 답변에 할 말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 

“리스튼이나 포먼은 너무 느린데다 머리회전도 빠르지 않아. 

내가 존경하는 사람은 록키 마르시아노야. 록키는 비록 작지만 상대의 기를 꺾는 심리전을 할 줄 알아. 

계속 파고들어 진을 빼놓는 거야. 

하지만 항상 자세를 낮게 유지하지. 그래서 상대 카운터는 다 록키의 어깨에 걸리는 거야.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록키는 잘 맞지 않는 복싱을 하는 선수야. 

더 긴 리치를 가진 선수들과 싸워야 한다는 점에선 나와 같기도 하고.” 

 

사진 nate4-tyson 전성기 시절의 타이슨 또한 잘 맞지 않는 복싱을 했다. 

다마토의 품 안에서 타이슨은 쑥쑥 커 나갔다. 

50여 전의 아마추어 경험을 쌓은 후 프로에 뛰어든 타이슨은 대부분의 경기들을 1~2라운드에 끝내 버리며 질주했다. 

아버지 같은 다마토를 무조건 신뢰하고 따른 결과였다. 

하지만 다마토는 한 차원 더 높은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는 선수가 결국엔 코치에게서 완전히 독립할 수 있어야 한다고 여겼다. 

그래서 다마토는 타이슨의 시합 때 절대 코너맨으로 나가지 않았다.
 
타이슨이 자신의 말에 기대는 것에 익숙해지지 않고 스스로를 믿고 싸울 수 있도록 만들려 했던 것이다. 

이미 고령인데다 폐렴으로 고생하던 그는 자신이 타이슨을 돌봐 줄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자신이 죽은 후 세계 타이틀전 같은 큰 무대에서 우뚝 서서 싸울 수 있는 강한 정신을 타이슨에게 마지막으로 주고 싶어 했다. 

1985년 11월 어느 날, 타이슨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다마토가 밤을 넘기기 힘드니 급히 장례식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머릿속이 하얘진 타이슨은 정신없이 밖으로 뛰쳐나갔다. 

아무에게도 우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밤새도록 정신없이 거리를 헤매며 기적이 일어나길 빌었지만 소용없었다. 

다음날 아침 다마토의 사망소식을 라디오에서 들은 한 친구가 거리에서 마주친 타이슨에게 얘기를 해 주자 타이슨은 멍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알아. 이미 알고 있다고.” 

누구보다도 청렴하고 양심적인 지도자로 존경받았던 커스 다마토는 일흔 일곱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챔피언을 여럿 키워냈지만 남긴 재산은커녕 은행 계좌조차 없었다.
 
하지만 장례식장은 그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커스 다마토의 묘 

열아홉 살의 타이슨은 다마토의 두 번째 수제자이자 선배인 호세 토레스를 붙잡고 펑펑 울었다. 

“정말 누가 내 생명을 빼앗아 간 것 같아. 

내가 진짜 용감했다면 지금 당장 스스로 목숨을 끊고 커스의 뒤를 따랐을 거야. 

근데 난 그럴 용기도 없는 겁쟁이야.” 

“마이크, 마음 속 깊은 곳에선 이미 넌 뭘 해야 할지 알고 있어. 

커스의 가르침을 잃어버리지 않고 계속 전진하는 한 커스는 영원히 네 곁에 있을 거야. 

커스의 말대로 넌 틀림없이 위대한 세계 챔피언의 자리에 오를 거라고.” 

(3편에서 계속


[김대환] 다마토는 타이슨을 어떻게 조련했을까?

김대환기사전송 2010-03-17 09:32

 
※ 2편에서 계속 ※ 

☞ 사후에도 타이슨을 걱정한 스승 다마토 (2) 다시 보기 

☞ '아름다운 사제지간' 타이슨과 다마토 (1) 다시 보기 

그렇다면 커스 다마토는 생전에 구체적으로 타이슨을 어떻게 조련했고, 타이슨은 이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여기서 우선 알고 넘어가야 할 것은 어린 타이슨이 갖고 있던 복싱에 대한 열정이 생각 외로 컸다는 사실이다. 

소년원에서 타이슨에게 처음 복싱을 가르쳤던 스튜어트는 첫 스파링에서 사정없이 타이슨을 두들겼다. 소년원 내에서도 소위 ‘짱’이었던 타이슨의 기를 확 꺾어 놓으려 했던 것이다.
 
난생 처음 바디샷을 제대로 맞고 숨도 못 쉬며 링 바닥에서 뒹굴던 타이슨은 다음 날부터 스튜어트를 졸졸 쫓아다니며 복싱을 가르쳐 달라고 졸랐다. 

타이슨을 그저 힘자랑하기 좋아하는 불량소년으로만 여겼던 스튜어트는 그 열정에 깜짝 놀랐고, 복싱을 매개로 둘은 급격히 가까워지게 되었다. 

물론 이 열정은 타이슨 특유의 신체적 능력과 조화를 이루었기에 더 큰 빛이 났다. 

다마토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타이슨을 처음 봤을 때 그가 열 서너 살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미 84kg에 육박하는 체중에 군살하나 없는 근육질의 몸매를 타고난 터라 열아홉 스물은 되어 보였던 것이다. 

보조 코치였던 케빈 루니는 타이슨이 감옥에 가지 않기 위해 나이를 속인 거라 의심했다. 

이후의 얘기긴 하나, 타이슨의 코치들은 시합 때마다 상대 선수 및 코치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타이슨의 출생증명서를 갖고 다녀야 했을 정도였다. 

 

타이슨의 목둘레는 19인치로, 거인 챔피언이었던 프리모 카르네라 이후 복싱 헤비급 역사상 가장 굵은 목으로 기록되어 있다. 

덩치만 컸던 게 아니라 힘과 펀치력도 남달리 강했다. 

이미 전편에서 소개한 대로 길거리에서 자신보다 너 댓 살 많은 형들을 때려눕히는 건 예사였고, 소년원에서조차 타이슨이 이성을 잃고 날뛰기 시작하면 어른 몇 명이 달려들어야 겨우 말려서 수갑을 채울 수 있었다. 복싱 링에서도 상황은 같았다. 

타이슨에게 KO된 상대들은 하나 같이 해머 혹은 곤봉으로 맞은 것 같다고 혀를 내둘렀다. 

그러다 보니 스파링 상대를 구하기도 어려워 열다섯 살 때부터 주급 1000달러를 주고 스파링 파트너를 고용해야만 했다. 

파트너들은 타이슨의 펀치를 맞은 후 회복할 시간이 필요했기에 6명이 돌아가면서 링에 올랐고, 14온스 글러브를 끼었던 파트너들과 달리 타이슨은 20온스 글러브를 끼어야 했다. 

 

타이슨을 지도하는 커스 다마토 

하지만 다마토는 타이슨이 펀치력에만 의존하는 슬러거가 되길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타이슨에게 피커부 스타일(가드를 광대뼈쪽에 바싹 붙이고 머리를 부지런히 움직이며 상대 공격을 흘린 후 파고들어가는 스타일)을 전수해 주며 방어동작을 엄청나게 강조했다. 

타이슨은 웰터급 정도의 작고 빠른 선수들과 매일 스파링을 해야만 했다. 

단 타이슨은 받아칠 수 없고 방어만 할 수 있는 조건이었다. 눈과 몸이 안 빨라질 수가 없었다. 

 

타이슨의 선배인 플로이드 페터슨이 레프트훅을 작렬시키는 모습. 

페터슨과 타이슨 모두 KO 아티스트로 유명하지만 이들의 방어능력 또한 대단했다. 

몇몇 복싱 전문가들은 인파이팅을 주문하면서도 ‘맞지 않는 복싱’을 강조했던 커스 다마토의 제자들 중엔 펀치 드렁크로 고생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며 높은 평가를 보낸다. 

타이슨만을 위한 ‘슬립 백’도 있었다. 이는 주먹 크기의 작은 주머니에 모래를 가득 채운 것인데, 다마토는 여기에 줄을 매단 후 타이슨을 세워놓고 쉴 새 없이 날려 피하도록 했다. 머리를 계속 움직이는 습관을 갖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타이슨이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할 때 가장 먼저 잃어버렸던 게 바로 이 ‘계속 머리를 흔들어 상대방의 타겟이 되지 않는’ 기술이었다. 

 

소년 타이슨의 섀도우 복싱 

콤비네이션은 ‘윌리’란 이름의 샌드백으로 연습했다. 

이것은 타이슨의 선배인 호세 토레스가 세계 라이트헤비급 챔피언 윌리 파스트라노에게 도전했을 때 다마토가 만든 것으로, 매트리스 다섯 장을 둘둘 만 후 겉에 사람 모양을 그려놓은 후 각 급소 부분에 번호를 써놓은 것이었다. 

다마토는 번호를 외치는 자기 목소리를 녹음해 틀어놓고 콤비네이션을 연습하게 했다. 

예를 들어 “1! 3! 5!”란 목소리가 들리면 ‘레프트 훅-라이트 훅-레프트 바디’를 날리는 식이었다. 

우리가 열광하는 타이슨의 그림 같은 콤비네이션 펀치는 ‘윌리’를 수천수만 번 두드린 후 얻어낸 피땀 어린 결과물이었던 것이다. 

(4편에서 계속



[김대환] '타이슨의 전설'은 링이 아닌 술집에서 시작됐다

김대환기사전송 2010-03-19 10:27

※ 3편에서 계속 ※ 

☞ 다마토는 타이슨을 어떻게 조련했을까? (3) 다시 보기 

☞ 사후에도 타이슨을 걱정한 스승 다마토 (2) 다시 보기 

☞ '아름다운 사제지간' 타이슨과 다마토 (1) 다시 보기 

커스 다마토는 이처럼 타이슨에게 완벽한 기술을 심어주었지만, 실전에서는 그와 별개로 ‘강한 정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무리 빠르게 움직이고 강한 펀치를 날릴 수도 있어도, 연습해 온 것들을 링 위에서 그대로 재현하려면 누구에게도 위축되지 않는 강한 심장이 있어야 하는 법 아닌가.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이 이렇게 반문하실 지도 모르겠다.
 
“아니 타이슨은 원래 그냥 다 두들겨 패버리는 스타일 아닌가요? 타이슨이 타이슨인데 뭘 위축될 게 있죠?” 

물론 타이슨이 유명해진 후 누구나 그를 두려워한 건 맞지만, 타이슨 본인의 내면은 또 다른 이야기였다. 

이미 전편에서 얘기한 대로 타이슨은 내성적인 성격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너무나 강해보이는 겉모습과 어울리지 않게, 타이슨 또한 ‘사각 링의 공포’를 떨쳐내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데뷔전을 앞둔 어느 날, 타이슨은 다마토에게 무서워 죽겠다고 고백했다.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타이슨의 이미지로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다마토는 이렇게 대답했다. 

“두려움은 친구이자 적이다. 마치 불과 같다.
 
컨트롤만 할 수 있으면 널 따뜻하게 해 주지만, 그렇지 못하면 너와 네 모든 걸 태워 버릴 수 있다. 

초원을 달리는 사슴을 상상해 봐라. 

반대쪽 덤불 속에 퓨마가 숨어 있다는 걸 알아채는 순간 느껴지는 두려움은 곧바로 생존을 위한 자연의 섭리로 작용한다. 

평소에는 5~10피트만 뛸 수 있었던 사슴이 두려움 때문에 15~20피트를 뛰게 되지 않느냐. 두려움을 인정하고 받아들여라. 

두려움이 없으면 죽는다. 두려움은 우리를 싸우도록 일으키는 자연의 힘이다. 

영웅과 소인배가 느끼는 두려움은 똑같다. 

다만 영웅만이 그 두려움에 정면으로 맞설 뿐이다.” 

물론 다마토가 이렇게 따뜻한 충고만 했던 건 아니다. 

불량소년으로서의 과거도 있는 데다 복싱에 대한 스트레스까지 겹친 타이슨은 다마토의 집에서 종종 말썽을 일으키곤 했는데, 하루는 다마토의 처제에게 타이슨이 상당히 불손한 말을 던졌다. 

일흔 살이 넘은 노인이었지만 여전히 혈기를 숨기고 있던 다마토는 이미 근육질의 핵주먹 소년이던 타이슨의 눈을 똑바로 보며 사자처럼 으르렁거렸다. 

“이 자식아. 너 네가 터프하다고 생각하냐? 나가서 붙어 보자. 

그 빌어먹을 대가리를 날려주마. 따라 나와!” 서슬 퍼런 다마토에게 바짝 쫀 타이슨은 두말없이 잘못을 빌었다. 

 

다마토가 죽은 후 타이슨의 가장 큰 마음의 안식처가 되어 줬던 다마토의 처제 카미유 

이렇게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써가며 타이슨을 조련하던 다마토는 일부러 데뷔전 무대를 공식 아마추어 시합이 아닌 ‘언더그라운드 막싸움’ 경기로 잡았다. 

연기 자욱한 술집에서 사람들이 이곳저곳에 돈을 걸고 욕설을 퍼부어 대는 최악의 분위기였다. 

상대들은 다들 타이슨보다 나이도 많고 힘도 셌다. 

스타일도 아마추어 복서들의 화려한 기술들과는 거리가 먼 붕붕 휘둘러대는 막싸움 스타일들이었다. 

데뷔전 직전, 타이슨은 술집 밖에서 멀리 지하철이 떠나는 걸 바라보며 ‘내가 지금 여기서 뭐하는 거지? 상대가 날 죽일지도 몰라.’라 생각하며 겁에 질려 떨고 있었다. 

하지만 경기가 시작되자 타이슨의 천재성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스페인계 소년이었던 첫 상대는 3라운드를 버티지 못하고 KO되었다. 

타이슨의 펀치가 너무 강했던 나머지, 튀어나간 상대 마우스피스가 대여섯 줄 되던 관중석을 넘어 날아가 벽에 부딪힐 정도였다. 

사람들은 방금 공개된 신종 핵무기라도 보는 양 경악해서 타이슨을 바라보았다.
 
‘타이슨 전설’의 시작이었다. 

 

상대를 KO시킨 직후 타이슨의 모습 

한번은 굉장히 덩치가 큰 소년과 맞붙은 적이 있었다. 

타이슨은 1라운드에 세 번씩이나 다운을 빼앗았지만 상대는 여전히 강한 눈빛을 보내며 일어났다. 

타이슨 입장에서는 영화 ‘록키’에서 강조하는 ‘호랑이의 눈’을 실제로 본 느낌이었을 것이다.
 
1라운드가 끝나고 코너로 돌아온 타이슨은 손이 부러졌다고 얘기했다. 

코치 테디 아틀라스는 본능적으로 거짓말이란 걸 알아채고 소리쳤다.
 
“지금 부러진 건 네 손이 아니라 네 정신이야. 지금 네 자신을 극복하지 못하면 영원히 성공할 수 없어. 

두려움에 지배당하지 말고 나가서 남자답게 싸워!” 

하지만 상대의 근성에 질린 타이슨은 금방 지쳐버렸다.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술 취한 사람처럼 흐느적대던 타이슨은 쉬는 시간마다 너무 지쳤다며 그만하면 안 되겠냐고 물었다. 

심지어 경기 중 어깨에 강한 펀치를 한 번 맞았는데, 코치를 바라보며 그냥 다운되면 안 되겠냐고 눈짓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타이슨은 끝까지 버텨 판정승을 거두었고, 코치 테디 아틀라스는 타이슨이 그날 복서로서 엄청난 성장을 이뤘다고 회상한다. 

이처럼 타이슨은 깔끔한 정식 경기장이 아닌 어수선한 술집에서 경험을 쌓으며, 욕설을 퍼붓는 관중들로 둘러싸인 살벌한 분위기와 마구 주먹을 휘둘러대는 상대들을 다루는 법을 배워갔다. 타이슨이 링에 익숙해질수록 그 천재성은 더욱 빛이 났다. 

비록 아마추어 무대에서는 판정의 불이익 때문에 올림픽 진출에 실패했지만, 프로 무대에서 타이슨은 물 만난 고기처럼 본격적으로 진가를 발휘했다. 

어느덧 타이슨은 챔피언에 도전하기도 전에 세계 헤비급 복싱의 중심인물이 되어 있었다.
 
당시 복싱의 메카 메디슨 스퀘어가든 복싱 부서를 이끌던 존 콘돈이 보낸 찬사를 들어 보자. 

 

“30여 년간 복싱계에서 일해 왔지만 타이슨처럼 펀치를 날리는 선수는 본 적이 없다. 

록키 마르시아노도, 소니 리스튼도 저렇게 강하진 않았다. 

앞으로 타이슨의 유일한 문제는 누구도 그와 싸우려하지 않는다는 게 될 것이다.” 

(5편에서 계속)

[김대환] 헤비급 인기에 불을 지핀 타이슨의 등장

김대환기사전송 2010-03-25 11:13

 

※ 4편에서 계속 ※

☞ '타이슨의 전설'은 링이 아닌 술집에서 시작됐다 (4) 다시 보기

☞ 다마토는 타이슨을 어떻게 조련했을까? (3) 다시 보기

당시 복싱계에선 진정한 헤비급 최강을 가리자는 모토의 통합 챔피언 시리즈가 진행되고 있었다. 

WBA, WBC, IBF 세 개 기구에서 각기 존재하는 헤비급 챔피언들 및 강력한 도전자들을 섞어 여러 경기를 치른 후 통합 챔피언을 뽑자는 게 이 시리즈의 핵심이었다.

그런데 여기엔 큰 문제가 있었다. 복싱팬들이 이 시리즈를 철저히 무시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무하마드 알리, 조지 포먼, 조 프레이저, 켄 노튼 등이 물고 물리던 헤비급 황금기가 지난 후, 복싱팬들의 관심은 슈거레이 레너드, 마빈 해글러, 토마스 헌즈 등이 활약하던 중량급으로 옮겨 간 지 오래였다. 

알리의 해적 복사판 같은 느낌의 래리 홈즈나 카리스마 없는 챔피언으로 잘 알려져 있던 마이클 스핑크스 등이 모인 헤비급 통합 시리즈는 그 인기를 되찾아오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선배 알리를 꼭 빼닮은 스타일로 헤비급을 지배했던 홈즈. 하지만 사람들은 알리를 뛰어넘는 카리스마를 가진 챔피언을 원하고 있었다.

오히려 팬들은 ‘선배들 무서운 줄 모르고’ 사정없이 치고 올라오는 신예 마이크 타이슨에게 주목하고 있었다. 

아마추어 시절부터 뉴욕 지역에서 이름을 날리던 타이슨은 미국 공중파 채널인 ABC와 계약 체결 후 전국구 스타로 발돋움했다. 

ABC 방송 데뷔전이었던 제시 퍼거슨 전 당시 경기장 12000석은 발 디딜 틈 없이 꽉 들어찼고, 경기 후 타이슨은 전 세계 복싱팬들의 열광적인 사랑을 받기 시작했다.

이처럼 타이슨이 챔피언도 되기 전 스타로 떠오른 데엔 매니저들의 역할이 컸다. 

타이슨의 매니저였던 제이콥스와 케이튼(둘 다 커스 다마토의 절친한 친구)은 자비로 방송팀을 고용한 후 타이슨의 프로 데뷔전부터 모든 경기들을 촬영했다.
 
경기가 끝난 후 타이슨은 집으로 돌아갔지만, 매니저들은 방송팀을 독려해 그날 밤 편집을 모두 마친 후,(이는 타이슨이 대부분 상대를 1R에 끝냈기 때문에 가능했다.) 여러 방송사들을 비롯한 모든 언론에 영상을 보냈다.
 
타이슨의 따끈따끈한 KO영상은 경기가 있을 때마다 자연히 다음 날 아침 스포츠뉴스에서 방송되었고,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 무시무시한 ‘핵주먹 소년’의 다음 경기를 기다리게 되었다.

커스 다마토가 죽은 후에도 타이슨은 계속 경기를 가졌다. 이유는 간단했다.
 
‘의사든 변호사든 복서든 상관없다. 뭘 하든지 가능한 한 많은 경험을 자주자주 쌓아야 한다.’는 다마토의 지론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경기를 1~2라운드에 끝냈기에 몸에 무리가 전혀 없었던 타이슨은 거의 한 달에 한 번씩 경기를 치르며 전적을 쌓아 나갔다.



이 당시 타이슨을 고전시켰던 대표적 인물이었던 미치 그린. 길거리 싸움에서 늘 상대 갱스터들을 피범벅으로 만든다 해서 ‘BLOOD(피)’란 별명이 붙어있던 그린은 실제 갱스터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타이슨보다 훨씬 큰 체격에 항상 이쑤시개를 질겅질겅 씹고 다니던 그는 타이슨 경기 전 기자회견에서 프로모터 돈 킹 부자가 자신에게 사기를 쳤다며 죽여 버리겠다고 난동을 피우기도 했다. 

타이슨은 그린과의 경기 당시 완전히 겁에 질려 있었지만 결국 심판 전원일치 판정승을 거두었다.

헤비급 통합 챔피언 시리즈를 진행하던 HBO(미국의 최대 유료 방송 채널. 

우리나라에서 인기가 높은 섹스 앤 더 시티, 밴드 오브 브라더스 등의 미드들을 제작한 채널이기도 하다.)와 프로모터 돈 킹은 몸이 달 수 밖에 없었다. 

내로라하는 챔피언들을 다 모아도 스무 살도 채 안 된 타이슨의 인기에 미치지 못한다는 건 심각한 문제였다.
 
HBO 측은 직접 타이슨의 매니저들을 찾아가 협상을 시작했다.

한 쪽은 모든 복서들의 꿈이라 불릴 정도로 복싱계 최대의 영향력을 자랑하는 유료채널 HBO, 다른 한 쪽은 스무 살도 안 된 애송이 복서, 소위 ‘스펙’만 놓고 보면 상대가 안 되는 협상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달랐다.
 
이미 ABC, ESPN 등 인기 채널들과 계약을 맺고 KO퍼레이드를 벌이던 타이슨의 몸값은 하루가 다르게 치솟고 있었다. 

최고의 스포츠 잡지인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웬만한 미국인들이 다 본다는 아침 와이드 쇼인 투데이쇼 등 각종 매체는 온통 타이슨으로 뒤덮여 있었다. 

급할 게 없던 타이슨의 매니저들은 배짱 좋게 ‘한 경기 당 45만 달러’란 파격적인 제안을 했고, HBO는 더 오르기 전에 이를 받아들일 수 밖 에 없었다.




스포츠 일러스트레이드 지에 등장한 타이슨의 모습. 

고등학교 다닐 나이에 한 경기 당 몸값이 무려 5억 원, 그것도 25년 전 얘기다. 

지금 돈으로 따지면 대체 얼마일까?

거의 코마 상태에 빠져 있던 헤비급 통합 챔피언 시리즈는 타이슨이 들어오자마자 완전 소생했다. 

티켓 판매 및 방송 시청률이 급상승했고, 언론의 관심도 엄청나게 모여들었다. 

돈 냄새를 맡은 돈 킹은 곧바로 타이슨의 타이틀 도전 경기를 추진했다. 

상대는 WBC 헤비급 챔피언 트레버 버빅이었다.



드디어 세계 타이틀에 도전하게 된 마이크 타이슨

(6편에서 계속)



[김대환] 정말 강한 타이슨, 버빅을 초토화 하다

김대환기사전송 2010-04-03 11:30

 

※ 5편에서 계속 ※ 

☞ 헤비급 인기에 불을 지핀 타이슨의 등장 (5) 다시 보기 

☞ '타이슨의 전설'은 링이 아닌 술집에서 시작됐다 (4) 다시 보기 

 

타이슨과 버빅의 WBC 헤비급 타이틀매치를 알리는 포스터. 


타이슨의 도전을 받아들이게 된 WBC 헤비급 챔피언 트레버 버빅은 한 마디로 ‘괴짜’였다. 

자메이카 출신으로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버빅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고, 누구에게든 하느님의 말씀을 전파하려고 애썼다. 

이는 모든 선수들이 두려워하던 프로모터 돈 킹에게도 예외가 없었다. 

타이슨 전 협상을 진행할 당시 버빅은 매일 아침 6시 반 돈 킹의 스위트룸을 찾아 성경을 읽고 찬송가를 불렀다. 

버빅과의 협상 외에도 여러 소송이 물려 있어 잔뜩 신경이 곤두서 있던 돈 킹이었지만, 반쯤 잠에 취한 상태로 버빅의 노래를 들으며 빨리 그가 사라져 주길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버빅은 이처럼 독실한 신자의 가면 뒤에 또 다른 얼굴을 숨기고 있었다. 

다름 아닌 아주 교활한 협상가의 면모였다. 

어느 날 그가 매니저에게 했던 말을 보면 곧바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어제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더라고. 내게 10만 달러를 내리실 건데 당신을 통해 주실 거래.” 

물론 매니저는 “미안해. 5분 전에 하느님이 다시 전화하셔서 주지 말라던데?”라 받아쳤지만 여하튼 버빅은 늘 이런 식으로 주위 사람들에게 ‘가능한 한 많은’ 돈을 뜯어냈다. 

자연히 매니저, 변호사, 에이전트 등 버빅 주위엔 제대로 수수료를 받지 못하고 이를 갈며 떠나간 사람들이 가득했다. 

베테랑 프로모터이자 협상의 명수인 돈 킹조차 버빅을 ‘세 얼굴의 사나이’로 부르며 혀를 내둘렀던 덴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챔피언 벨트와 함께 십자가 목걸이를 착용하고 있는 트레버 버빅 


이런 버빅이 타이슨 전에서 솔솔 풍기는 돈 냄새를 맡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처음 책정된 양 선수의 대전료는 타이슨 155만 달러, 버빅 75만 달러였다. 

챔피언임에도 불구하고 도전자의 반 밖에 되지 않는 대전료가 마음에 들지 않던 버빅은 돈을 올려 달라 요구하는 동시에, 뒤로는 백인 헤비급 파이터로 명성이 높던 게리 쿠니 측와 대전 협상을 진행했다. 

소위 이중 협상에 들어간 것이다. 

쿠니 측은 버빅에게 3백만 달러의 대전료를 제안했고, 버빅은 이 카드로 돈 킹을 압박했다.
 
질질 끄는 협상에 지친 돈 킹은 한때 호텔 로비에서 버빅의 매니저를 때려죽이겠다며 난리를 피우기도 했지만, 결국 두 배로 오른 160만 달러의 대전료로 버빅과 싸인할 수 밖 에 없었다. 

온갖 술수로 몸값을 최대로 올린 버빅의 ‘두뇌싸움’의 다음 타겟은 다름 아닌 타이슨이었다. 

버빅은 경기가 확정되자마자 주체육위원회에 재빨리 검은 트렁크를 입겠다고 신청했다. 

보통 버빅은 하얀 트렁크를 주로 입었지만, 당시 ‘검은 트렁크, 검은 복싱화’가 이미 타이슨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어 있던 지라 일부러 타이슨의 심기를 건드리기 위해 선수를 친 것이었다. 

선수를 빼앗긴 타이슨 측은 규정대로라면 검은 색이 아닌 다른 색 트렁크를 입어야 했지만, 매니저 짐 제이콥스는 경기 후 벌금을 낼 것을 각오하며 검은 트렁크를 타이슨에게 입혔다. 

버빅의 치사한 장외 플레이에 치를 떨었음은 물론이다. 

 

경기 전 기자회견장에서 만난 버빅과 타이슨. 가운데에 선 사람은 돈 킹. 


하지만 타이슨은 이런 술수에 흔들리기엔 너무나 거대한 파이터로 성장해 있었다. 

타고난 육체에 스승 커스 다마토의 가르침, 다마토가 죽은 후에도 변함없이 그를 지지해 주는 매니지먼트 팀, 그리고 풍부한 경험이 어우러진 타이슨은 뿔뿔이 흩어져 있던 세계 챔피언 벨트들을 모조리 긁어모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경기 당일 대기실을 찾은 매니저 짐 제이콥스가 긴장 때문에 손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고 고백하자, 스무 살의 타이슨은 싱긋 웃으며 얘기했다. “세계 타이틀 전 때는 다 그런 거예요.”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타이슨은 버빅을 무섭게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버빅도 챔피언답게 꿋꿋이 정면으로 맞섰다. 

사실 버빅은 타이슨 같은 하드펀쳐도 알리 같은 테크니션도 아니었지만 끈질기게 달라붙어 상대를 질리게 만드는 뚝심을 가진 선수였다. 

또 큰 무대에 유난히 강했다. 

무명 선수들에게 KO패했던 ‘굴욕’도 여러 차례 갖고 있었지만, 무하마드 알리 전이나 핑클론 토마스와의 타이틀전 등 중요한 순간엔 꼭 이겼다. 

‘세 얼굴의 사나이’란 별명의 마지막 세 번째 얼굴은 링에서 그가 보여주는 불가사의한 뚝심과 행운을 얘기하는 것이었다. 

 

타이슨은 1라운드 부터 챔피언 버빅을 몰아붙였다. 

하지만 타이슨은 이제까지 버빅이 상대했던 그 누구와도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강했다.
 
1라운드 후반 타이슨의 콤비네이션이 드디어 폭발했고, 버빅은 다리가 풀려 휘청거렸다. 

그때 마침 울린 공이 버빅을 구했지만, 모든 사람들은 분위기가 타이슨 쪽으로 벌써 기울었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타이슨의 선배 호세 토레스는 이미 이긴 게임이라며 타이슨의 매니저들에게 축하 인사를 보내고 있었다. 

7편에서 계속



[김대환] 절제 잃은 타이슨, 언론의 먹잇감이 되다

김대환기사전송 2010-04-08

 
※ 6편에서 계속 ※ 

☞ 정말 강한 타이슨, 버빅을 초토화 하다 (6) 다시 보기 

☞ 헤비급 인기에 불을 지핀 타이슨의 등장 (5) 다시 보기 

 

“입장하기 5분 전, 손엔 글러브가 채워진다. 

주먹을 있는 힘껏 글러브 안으로 밀어 넣으면 코치들이 끈을 꽁꽁 묶어준다. 싸울 시간이다. 

물론 겁난다. 사실 죽을 만큼 무섭다. 질까봐 무섭고 된통 당할 것 같아 몸서리가 쳐진다. 

상대는 무지 강한 녀석이다. 그놈이 날 이기는 꿈까지 꾸었다.
 
하지만 링이 가까워질수록 자신감이 두려움을 덮고 올라온다. 

그리고 링에 들어가는 순간, 난 신이 된다. 그 누구도 날 이길 수 없다.” -마이크 타이슨 

2라운드가 시작되자마자 타이슨은 아예 경기를 끝내려는 듯 무시무시한 기세로 치고 들어갔다. 

허둥지둥 뒤로 밀리던 버빅은 강력한 훅을 맞고는 벌러덩 나자빠졌다.
 
곧바로 기세 좋게 일어나긴 했지만 그의 얼굴은 이미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위태위태하게 타이슨의 펀치를 받아내던 버빅은 결국 2라운드를 버티지 못했다.
 
타이슨 특유의 바디-어퍼컷 컴비네이션이 빗나가는가 싶더니, 이어지는 레프트 훅이 버빅의 관자놀이에 적중한 것이었다. 

 

사실 그다지 강해 보이지 않는 툭 건드린 듯한 펀치였지만 버빅이 받은 충격은 상상을 초월했다.
 
이미 다리가 풀린 챔피언은 일어나려고 애를 썼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카운트를 세던 주심 밀스 레인은 술 취한 사람처럼 몸을 가누지 못하는 버빅을 끌어안고 경기 종료를 선언했다. 

타이슨이 최연소 세계 헤비급 챔피언에 오르며 복싱 역사를 새로 쓴 순간이었다.
 
커스 다마토가 죽은 지 딱 1년, 코치들이 활짝 웃으며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링에 들어오자 타이슨이 물었다. “커스가 살아 있었다면 너무 기뻐했겠죠?” 

이후 타이슨의 행보는 잘 알려진 대로다.
 
세계 타이틀을 모두 통합한 후 무적의 챔피언으로 군림했지만 점차 문란한 생활에 젖어들었고, 강간 사건에 의한 3년간의 감옥 생활 후엔 전성기 시절의 기량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물론 출소 후 다시 세계 챔피언에 오르긴 했지만 숙적 이밴더 홀리필드에게 덜미를 잡히며 또다시 추락했고, 유명한 ‘핵이빨’ 사건 이후엔 스포츠지보다 연예가쉽지에서 더 많이 볼 수 있는 세계 최고의 트러블메이커가 되어 버렸다. 

 

홀리필드의 귀를 물어뜯는 타이슨 

필자가 이 타이슨&다마토 시리즈를 연재하기로 마음먹은 계기는 바로 그런 인식에 대한 안타까움이었다. 

물론 그가 했던 기행들을 모두 변호하고픈 마음은 없다. 잘못은 잘못이니까. 

다만 ‘핵이빨’ 사건 후 언론이 만들어낸 타이슨의 이미지는 너무나 찌그러져 있다. 

거의 사람으로도 다루지 않는다. 

그저 공격본능에 사로잡힌 야수로 치부한다고나 할까. 

멀리서 모욕적인 욕설을 퍼붓는 팬들에게 조용히 하라고만 해도 언론엔 ‘타이슨 또다시 분노 대폭발’ 이렇게 기사가 나가는 식이다. 

그런 차가운 시선에 발끈해 돌발행동을 할 때마다 타이슨은 깊이 후회하며 커스 다마토에게 배웠던 자기절제를 잃어버린 자신을 증오했다고 고백한다.
 
이는 곧 마약 및 음주, 문란한 여자관계 등으로 이어졌고 이 악순환은 계속 반복되었다.
 
언론이 색안경을 쓰고 타이슨의 사생활 하나하나를 관찰하면 할수록, 타이슨은 어쩔 줄 모르며 계속 그들에게 좋은 먹잇감이 되어 주었다. 

 

“어떤 카메라가 당신을 20년 동안 따라다닌다고 생각해 보라. 

당신은 어떻게 될까? 열세 살 때부터 카메라가 당신의 모든 걸 찍고 있다고 상상해 보라. 

아마 머리가 돌아서 호모가 되어버릴 지도 모른다.” -마이크 타이슨 

거칠 것 없이 사람을 갈기갈기 찢어놓을 수 있는 맹수라는 일반적 인식과 달리, 타이슨은 원래 굉장히 내성적이며 불안정한 성격에 누군가에게 사랑과 인정을 받고 싶어 하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다.
 
다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연히 받는 걸로 여기는 부모님의 사랑과 관심으로 가득 찬 정상적인 유년기를 보내지 못했고, 본격적인 인생 계획을 세우기도 전에 성공을 맛보았으며, 그로 인해 뒤바뀐 자신의 인생을 다루는 법을 배우지 못해 허둥댔다는 게 달랐다고 할까. 

필자는 다섯 살 아들을 키우는 아빠이다 보니 육아 책을 많이 읽는데, 어느 날 이런 얘기를 읽고 깊이 공감한 적이 있다. “사회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을 보면 다 똑같이 정상으로 보인다.
 
어렸을 때 학대당하며 자란 사람이든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사람이든 결국 똑같이 잘 자라난 어른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들이 쓰고 있는 ‘사회에서 어울리기 위한’ 가면을 벗기면 유년 시절에 받은 상처들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 상처들은 평생 지워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타이슨의 마음속엔 매일 다른 아이들에게 놀림 받고 얻어터졌지만 기댈 가정이 없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기 싫다는 근본적 두려움이 내재되어 있다. 

그런 타이슨에게 새로운 인생을 선물해 준 사람이 커스 다마토였지만, 아쉽게도 둘의 인연은 너무 짧았다. 

 

다마토가 죽은 후 그의 관을 나르는 타이슨의 모습. 

2008년 발표된 자전적 다큐멘터리 ‘타이슨’에서 타이슨은 커스 다마토와의 추억을 회상하며 울음이 가득 차 말을 잇지 못한다. 

생전 칭찬이라곤 들어본 적 없던 타이슨이 어떤 일을 해도 잘했다고 칭찬해주며 기를 살려주던 모습, 세계챔피언은 고사하고 동네 양아치로 죽어갈 거라 인생을 비관하던 타이슨에게 노력만 하면 세계 챔피언은 네 것이라 격려하던 모습, 매일 밤 방에서 인생의 본질 및 링의 미학에 대해 얘기해 주던 모습 등을 회상하며 타이슨은 눈물을 흘린다. 

다마토가 10년만 더 살아있었더라면........오늘도 마이크 타이슨과 그의 팬들은 똑같은 말을 되뇌며 너무 빨리 떠나 버린 위대한 스승을 그리워한다. 

 
다마토와의 추억을 회상하는 타이슨의 다큐멘터리 속 모습 

“커스의 존재는 내게 있어 성경과도 같았다.
 
그는 매일 밤 위대한 세계 챔피언들의 경기 모습을 보여주며 그들의 강점을 모두 전해 주었다. 

잭 뎀프시의 야성. 록키 마르시아노의 심장, 무하마드 알리의 개성과 캐릭터. 

당시 난 너무 어렸기에 알리가 그 강한 캐릭터 덕분에 더욱 위대한 챔피언이라는 커스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이가 든 지금은 이해한다.” -마이크 타이슨 

“한 소년이 불씨와도 같은 재능을 갖고 내게로 왔다.
 
내가 그 불씨에 불을 지피자 불길이 일기 시작했다.
 
키울수록 불은 계속 타올랐고, 결국 찬란히 빛나며 활활 타오르는 아름다운 불꽃이 되었다. 

이것이 바로 작은 불씨만으로도 누군가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줄 수 있는 우리의 위대한 힘이 아니겠는가.” 

-커스 다마토의 묘비에 쓰여 있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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