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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교익, 친일 논란에 "韓 음식·외식문화 , 일제 강점기 때 많이 시작"
게시물ID : sisa_111452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자애와관용
추천 : 38
조회수 : 2129회
댓글수 : 14개
등록시간 : 2018/10/05 11:0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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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자료 내용에 보면

 

정조대 후반에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활동한 이면승(李勉昇,1766~1835)은 

술 제조의 금지에 관한 논란을 논한「금양의(禁釀議)」에서 한양 술집 현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말단의 이익을 추구하는 방법으로는 양조업이 가장 많고, 양조하는 곳은 경성(京城)이 가장 많습니다. 

지금은 골목이고 거리고 술집 깃발이 서로 이어져 거의 집집마다 주모요 가가호호 술집입니다. 

그러니 쌀과 밀가루의 비용이 날마다 만 냥 단위로 헤아리고, 푸줏간과 어시장의 고깃덩어리와 진귀한 물고기, 

기름과 장, 김치와 채소 등 입에 맞고 배를 채울 먹을거리의 절반이 아침저녁의 술안주로 운반해 보냅니다. 

온갖 물건값이 이로 말미암아 뛰어오르고, 도회민이 그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 나머지 소송이 빈발하고 풍속이 퇴폐해지는 현상은 일률적으로 논할 수 없습니다.

이면승, 『감은편』, 「금양의」, 규장각 소장 사본.

李勉昇, 『感恩編』, 「禁釀議」


[네이버 지식백과] 서울의 술집 - 술꾼으로 흥청망청한 18세기 서울의 술집 풍경 (18세기, 세계 도시를 걷다)

 

 

사실 이런거만 봐도

조선이 일제시대 전까진 맛도 모르고 멋도 모르고 거지와 같았다는 식의 이미지화는 전혀 구라같다

한양에 술집만 수천호에 종사자만 수만이라고 하는 기록이 수두룩하고 그래서 술집이 너무 많다는

기록들도 저 링크에 많은거 보면, 조선이 식문화에 뒤떨어진 나라는 절대 아니었을 거같어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434407&cid=58463&categoryId=58463



이정도면 맛서인이라는 별명이 굉장히 유의미 한건데

언제부터 민주당 지지자들 사이에서 이런 일뽕 종자를 빨아댄거지 모르겟네요 

도대체

출처 http://bbs.ruliweb.com/community/board/300148/read/32561752

http://bbs.ruliweb.com/community/board/300148/read/32560075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434407&cid=58463&categoryId=584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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