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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단편연재] 나를 팝니다
게시물ID : readers_3242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밤의작가들
추천 : 1
조회수 : 221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8/10/06 21:23:36
커서는 계속 깜빡거리고, 나는 30분째 문장을 썼다가, 지우기를 반복하고 있다. 자기소개서의 문항은 너무 어려웠다.
‘지원직무를 위해 노력했던 경험과 해당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 본인이 가진 역량을 기술해 주십시오.’
사실은 유통업계에 별로 가고 싶지 않은데, 경험삼아 써보는 겁니다. 이렇게 쓰면 안 되겠지? 내가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 사이, 옆자리에 있던 정이가 노트에 글을 써서 보여준다.
-진실아, 추석 전에 뭐해?
-자소서나 써야지 뭐.
나는 답장을 하고 노트를 넘겨준다. 정이는 오늘 트렌치코트를 입었다. 정이는 1학년 때부터 세련된 친구였고, 가을이 오면 꼭 트렌치코트를 입었다. 트렌치코트를 입은 정이를 보고 노트북을 보니, 왠지 노트북 화면에 비치는 내 후드티가 평소보다 후줄근해보였다.
-그럼 우리 같이 알바할래?
정이는 알바 공고 사이트를 보여준다.
일급 7만원, 인센티브 유. 친구와 함께 지원 가능. 초보자 가능.
 
-와, 조건 괜찮네. 너 해봤어?
-아니. 혼자 하려니까 겁나서. 어차피 연휴 전엔 자소서 안 써질 텐데 같이 하자! 5일만 해도 35만원이네, 대박.
나는 고민하다가 정이의 트렌치코트를 본다. 35만원이면 트렌치코트 하나를 사고도 한 달 생활비를 쓸 수 있는데.
-좋아.
 
 
정이와 나는 각각 다른 업체의 홍삼을 판매하는 일을 맡았다.
“잘 팔면 별도로 인센티브가 지급될 겁니다. 친구라도 서로 봐주지 말고 열심히 해요.”
“네!”
“진실 씨는 좋겠네. 그 홍삼, 유명 브랜드여서 잘 나갈 텐데.”
명절 마트 알바 경험이 몇 번 있다던 참치캔 알바생이 말했다.
 
아르바이트 첫날, 평일의 마트는 한산했다. 마트 입구에 배치된 알바생들은 손님이 한 명씩 올 때마다 목청껏 외쳤다.
“사장님, 선물세트 보고 가세요.”
“사모님! 올해 참치캔은 필요 없으세요?”
홍삼은 잘 팔릴 것이라는 생각과는 달리 인기가 별로 없었다. 참치캔 알바생의 말처럼, 내 홍삼은 누구나 알만한 브랜드여서 간간이 팔렸지만 정이의 홍삼은 인지도가 낮아서인지 사람들의 관심이 적었다.
“몸…몸에 좋은 홍삼 사세요.”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정이가 수줍음을 무릅쓰고 크게 외쳐보곤 했다.
“할인 쿠폰도 있어요. 선물용으로 좋은 홍삼 세트 보고 가세요!”
온종일 서 있다가 처음 모였던 회의실로 갔다. 마트 직원은 매출표 같은 서류를 보며 말한다. 면접관 앞처럼 긴장된다.
“오늘은 아무도 많이 못 파셨네요. 남은 기간은 더 열심히 하세요.”
자소서를 쓰려고 책상에 앉았지만, 온종일 서서 말하느라 기운이 쏙 빠져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침대에 누워 휴대폰을 보며 나를 위로했다.
‘그래도 오늘 7만 원 벌었으니까….’
둘째 날, 출근도 전에 벌써 몸이 쑤신다. 나는 화장을 하며 내가 쓰다만 항목을 생각한다. 그러고 보니 이번 경험을 자소서에 넣을 수 있지 않을까? 더 열심히 해봐야겠다. 올해 안에 취업해야지.
어제와 같은 회의실에 모여 출석 체크를 한다. 하루만 하고 나오지 않은 알바생도 있고, 새로운 알바생도 있다. 정이와 나는 오늘도 홍삼을 팔아야한다.
“홍삼 세트 보고 가세요!”
정이가 마음을 먹은 건지 어제보다 열심히 외쳤다.
“사장님, 할인 쿠폰도 있는데 홍삼 어떠세요!”
어제보다 손님이 많았고, 홍삼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많았다. 유명 브랜드인 내 홍삼을 몇 개 씩 들고 갔다. 정이는 더욱 적극적으로 영업을 했다. 멀리서 망설이는 손님들을 매대 앞으로 데리고 와서 상품 설명도 열심히 했다. 그러던 중이었다.
“거래처에 선물 돌릴 건데, 뭐가 좋을까….”
“어휴, 사장님~ 거래처 선물은 역시 홍삼이죠! 홍삼 어떠세요? 보고 가세요.”
“학생이 열심히 하는 게 참 내 딸 같네. 한번 100세트만 줘봐요.”
“와, 사장님 감사합니다! 복 많이 받으실 거예요! 여기 할인 쿠폰이랑 상품명 들고 가시면 안내해드릴 거예요!”
어마어마한 숫자였다.
일이 마친 뒤, 마트 직원은 매출표를 보고 환히 웃었다.
“정이 씨, 잘하시네요. 오늘 엄청나게 팔았어요. 오늘처럼만 하면 일급만큼 인센티브 받겠어요.”
“감사합니다.”
정이가 웃었다.
 
왜 내 홍삼은 할인 쿠폰이 없는 걸까.
왜 내 홍삼은 정이의 홍삼만큼 저렴하지 않은 걸까.
왜 내 홍삼은 쓸데없이 연예인 광고를 한 걸까.
 
셋째 날, 넷째 날이 이어질수록 정이의 독주는 이어졌다. 정이 자신도 몰랐지만, 정이는 꽤 영업을 잘하는 친구였다. 내가 듣고 있어도 정이의 홍삼을 사고 싶었다. 매일 저녁 직원이 정이에게 칭찬을 했고, 그 칭찬은 나를 타박하는 것처럼 들렸다.
왜 더 유명한 브랜드인데 잘 팔지 못하는 거죠?
이렇게.
 
마지막 날, 나는 잠을 설쳤다. 정이는 환히 웃는 얼굴로 오늘도 열심히 영업했다.
“진실아,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응. 다녀와.”
정이의 발걸음은 날아갈 듯이 가벼워 보였다. 정이는 나보다 더 잘사는데, 왜 돈도 더 잘 벌까? 정이는 나보다 학점도 더 좋은데, 왜 영업도 더 잘할까? 나는 정이의 홍삼 세트에 특별한 무언가가 있나 해서 가까이 다가간다. 홍삼 세트는 홍삼 세트일 뿐이다.
정이는 돌아온 뒤 목청껏 외친다.
“홍삼 세트 보고 가세요. 유명 브랜드보다 저렴하고 품질 좋은 홍삼 세트입니다. 추가 할인 쿠폰도 있어요.”
모든 멘트가 밉다.
“이봐요, 할인 쿠폰이 어디 있다는 거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정이 옆에 있었던 할인 쿠폰이 없었다.
“죄송합니다. 금방까지 있었는데…. 곧 찾아 드릴게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아니 됐어. 바빠 죽겠는데. 그냥 이걸로 사지. 아가씨, 이것 좀 줘요.”
“네, 사장님!”
나는 속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내 홍삼을 건네준다. 손님이 간 뒤, 정이가 내게 묻는다.
“진실아, 혹시 내 쿠폰 못 봤어? 큰일이네.”
“아니, 못 봤는데. 어떡해? 좀 있다가 같이 찾아줄게. 나 급해서.”
“응, 고마워.”
정이는 이리저리 쿠폰을 찾으려 매대 근처를 돌아다닌다.
나는 화장실로 빠르게 뛰어간다. 가슴이 쿵쿵 뛴다.
 
화장실 밖으로 나오자 정이가 있었다.
“어, 정아.”
“너 먼저 가면 내 홍삼도 좀 봐줘.”
“응, 알겠어.”
들어가면 안 되는데. 나는 화장실 칸으로 들어가려는 정이를 잡아끈다.
“너 다른 칸 가면 안 돼?”
“왜? 나 빨리 가야지. 괜찮아.”
정이가 칸으로 들어가고, 나는 도망치듯 화장실을 빠져나온다.
 
회의실에 모이자, 참치캔 알바생이 정이를 보며 말한다.
“정이 씨, 화장실에 정이 씨 홍삼 쿠폰 버려져 있던데?”
“네? 아, 정말요?”
나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돌렸다. 우리는 대학교 1학년 때부터 4학년 때까지 붙어 다녔고, 졸업한 지금도 도서관에 함께 다녔다. 서로의 표정이라면 모를 리가 없다.
“누가 실수로 버렸나 봐요. 기간이 지난 줄 알고.”
“에이, 바보가 아닌 이상 누가 그래. 정이 씨가 인센티브 받아서 부러웠나 보다. 그렇지?”
“…설마요.”
정이와 나는 어색하게 헤어진다.
집으로 돌아와, 나는 쓰다만 자소서 파일을 연다. 며칠째 막혔던 문항이 눈에 들어온다.
‘지원직무를 위해 노력했던 경험과 해당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 본인이 가진 역량을 기술해 주십시오.’
-저는 이번 추석에 A마트에서 선물세트를 판매하며 유통업계의 생태를 경험하였습니다. 선물세트를 판매하며 재고 관리 및 할인 행사 등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동료와 경쟁을 통해….
나는 잠시 타자를 멈춘다. 이건 마이너스가 될 말인 것 같은데. 나는 백스페이스를 치고 다시 써 내려간다. 문득 정이의 얼굴이 떠오른다.
나는 정이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주위를 둘러본다. 아무도 이쪽을 바라보고 있지 않다. 나는 쿠폰을 주머니 가득 넣는다. 가슴이 쿵쿵 뛴다. 정이가 돌아왔을 때 쿠폰을 넣은 주머니는 땅으로 꺼질 듯 무겁다. 쿠폰을 처리하기 위해 화장실로 간다. 화장실 칸에는 휴지통이 없고, 대신 위생함만이 보인다. 쿠폰 몇 장을 변기에 넣어보지만, 잘 내려가지 않고 변기통 옆면에 들러붙는다. 물에 적셔지고 찢긴 쿠폰이 모두 나 같다. 나는 주머니를 털어내어 모든 쿠폰을 위생함에 넣고 화장실 칸을 나온다. 화장실 칸 앞에는, 정이가 있다. 정이는 언제처럼 환히 웃는다.
그때 내 머릿속에 든 생각은, 이제 내가 홍삼을 더 팔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동료와 협업하여 일한다면 더욱 큰 시너지를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저의 역량은 이러합니다. 첫 번째, 협업 정신, 두 번째, 진실성….
나는 오늘도 자소서가 아닌 자소설을 썼다. 내가 팔릴 수 있다면 이따위쯤이야. 나는 막혔던 문항들을 채워간다.
 
 
 
 
 
written by 홀연 / 밤의 작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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