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종일 20kg 배낭을 짊어지고 고개길을 세개를 넘어 왔더니 몸은 뻗히고, 비까지 쳐 맞아 꿉꿉하고, 배는 고픈데 산중에 인기척도 없고 지나는 차량들만 가득 한 터, 길 한쪽에 만두전골집이 하나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과거 조상님들이 밤중에 들짐승에 쫓기다가 주막집의 불빛을 발견한 기쁨이랄까.
들어가서 만두전골을 시켜 먹는데, TV에 전국에서 벌어지는 천여 개의 축재를 조명하는 방송을 한다. 진도의 명랑대첩 축제가 조명되는데, 놀라운 사실은 그곳에 일본 사람들도 찾아온단다. 단순히 관광객이 아니라,당시 명량 해전에서 이순신의 13척 함선에 맞서 130척의 함대를 지휘했던 ‘구루시마 미치후사’의 후손이란다.
명량해전 당시 구루시마는 이순신 장군을 철천지원수로 여겼다. 왜냐하면 명량해전이 있기 5년 전에 일본 수군의 장수이자 그의 친형인 ‘구루시마 미치유키’가 이순신 장군에 의해 당항포 앞바다에 수장되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구루시마는 이순신 장군의 목을 베는 것을 필생의 과업으로 여기고 있었다.
[영화 명량에서 구루시마 역을 ‘유승룡’이 맡아 분했었다.]
하지만 구루시마의 복수심은 허무하게 끝을 맺게 되었다. 그가 어떻게 최후의 순간을 맞았는지는 우리 측 사료에는 정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일본의 사료에도 ‘이순신이 입으로 번개를 내 뿜었다. 구루시마는 번개에 맞아 죽었다.’로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다만 구루시마가 죽은 직후의 비참한 후사에 대한 기록은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항복해온 왜놈 준사란 놈은 안골포의 적진에서 투항해온 자이다.
내 배위에서 내려다보며, "저 무늬 있는 붉은 비단옷을 입은 놈이 적장 `마다시(구르시마)'다"고 하였다. 나는 김돌손으로 하여금 갈구리를 던져 이물로 끌어 올리게 했다.
그러니 준사는 펄쩍 뛰며, "이게 마다시(구루시마)다"고 하였다. 그래서, 곧 명령하여 토막으로 자르게 하니,적의 기운이 크게 꺾여 버렸다>
물론 이 난중일기 기록대로 단순히 구루시마의 시신을 토막으로 잘랐다고 왜군들의 기가 꺾인 것은 아니었다. 사실은 구루시마의 목을 대장기에 효수했다고 한다. 그러자 왜군들은 자신들의 수군대장의 처참한 최후를 보고 질겁해서 달아나기 시작했고 이 때부터 승기를 잡아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고 한다.
하여간 그렇게 구루시마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곳이 이곳 명량 앞바다 인데... 그 후손들이 매년 명랑대첩 축제기간에 이곳을 찾아, 자기 선조가 최후를 맞이하는 해전을 재현하는 모습을 보며 선조들의 넋을 기린다니. 일본사람들 정말 무서운 사람들임을 거듭 느낀다. 우리도 저들과 같이 지나간 선조의 역사를 잊지 않는 장인적 기억력이 있어야 하는데, 반대로 일제강점기의 향수를 느끼는 친일파들이 아직까지 득세하는 현실이라니...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다시 여정길에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