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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이루다
게시물ID : humordata_177905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흙향기
추천 : 1
조회수 : 1388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8/10/31 10:4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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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마곡사에서 나온 영랑은 몇 시진을 걸어 금강에 가까운 정안천변에 있는 우시장에서 말을 샀다. 그는 원래 사비성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고구려 낙산사 주변의 해안가에 가려고 하였다. 영랑이 이곳을 택한 이유는 산수가 빼어나 영감을 얻기 쉬운 곳이기도 하지만 앞으로 자신이 신라의 장수가 되면 병사들을 지휘하여 차지하려는 포부가 세워져 있는 땅이라 미리 살펴보려는 목적도 있었다.
그는 국경지대 군사들의 의심을 받지 않으려고 감쪽같이 여장을 하였다. 머리를 땋아 채머리를 한 다음 수염을 깨끗이 밀었다. 화사한 노란저고리와 함께 분홍치마를 입고 몇몇 옷가지와 함께 그림도구를 보따리에 챙겨 터벅터벅 길을 떠났다.
 

까옥, 까옥! 겨울이 점차 다가오자 유난히도 까마귀들이 시끄럽게 울어대면서 텅 빈 겨울의 쓸쓸한 들판을 가로질러 날았다. 날아가는 까마귀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한 여인이 있었다. ‘분명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미지의 땅으로 모험을 떠나야 일월오봉도가 그려질 것만 같다. 새로운 감격을 안고 그 솟구치는 영감으로 성스런 그림을 그려내고 싶어.’ 영랑이 한참을 걸어가니 시내가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다리가 보였다. 새로 세운 다리에서는 짙은 송진 냄새가 가물가물 스미어 나온다.
 

이 다리 넘어서부터 내가 바라던 고구려 땅에 접어드는구나. 영랑이 착잡한 마음으로 다리를 바라보고 있는데 어디선가 몽실몽실 연기가 가득 피어나고 있었다. 다리 가까이에 가보니 그 아래에 분홍빛 패랭이꽃들이 점점이 핀 시냇가 근처에 너덜너덜한 누더기를 간신히 두른 거지들이 추운 이른 아침에 밤새 얼은 몸을 녹이느라고 나뭇가지들을 주워서 모아놓고 군불을 때고 있는 것이다. ‘그래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이곳이야말로 새로운 세상.’ 비로소 새로운 곳을 찾았다는 기쁨에도 영랑은 너무나 추워 다리 아래로 내려가 불을 피운 곳으로 슬며시 다가갔다.
 

거지들은 오들오들 몸을 떨고 손을 마주 비비면서 불가에 쭈그리고 앉아 감지덕지한 마음으로 불을 쬐고 있다. 그들은 웬 낯모르는 어여쁜 여인이 갑자기 자기들 곁에 나타나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끔벅거리며 올려다보기만 하였다. 넉살 좋은 한 거지가 벌떡 일어나 여인에게 달려들어 손을 잡으며 말했다. “이게 웬 떡인가, 탐스런 호박이 저절로 굴러왔네 그려.”
그 말이 기분이 상한 영랑이 손을 뿌리치며 차갑게 쏘아붙였다. “호박이 뭐예요, 호박이?”
그러자 거지가 다시 영랑의 옷깃을 잡으며 추근거렸다. “그게 아니고. 누가 호박처럼 못 생겼다고 했나? 우리같이 계집이란 전혀 구경도 못하는 처지에 요렇게 예쁜 여인이 거저 생겼다는 거지.”
 

그 말에 영랑이 어이가 없어 픽 웃으며 말했다. “! 어떤 정신 나간 년이 제 발로 거지소굴로 기어 들어올 것 같아?”
뭐라고 이년아!” 화가 난 거지가 눈을 부라리며 주먹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곁불 가장 가까이에 으스대고 편안히 앉아있던 생각보다 훨씬 젊은 왕초가 손을 저으며 말렸다. “그만!” 그러면서 영랑에게 다정한 목소리로 묻는다. “당신은 어디서 온 뉘시오?”
영랑은 아무 말도 없이 서 있기만 했다. 왕초가 똘마니에게 제법 근엄한 어조로 명령한다. “이 여인이 상당히 춥고 배고픈 모양이니 우선 얼은 몸을 녹일 수 있게 한 다음 뜨거운 음식을 들게 해줘라.”
 

한참 불을 쬐고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꿀꿀이죽을 얻어먹으며 영랑은 왕초에게 말을 건넸다. “식구들이 꽤 많군요.”
한 삼십 명쯤 됩니다. 다른 곳에서 왔다 갔다 하는 자들을 합치면 사십이 넘어요.”
조정에서는 법에 의거하여 민심의 안정을 위해 다른 지역의 거지들이 해당 지역의 비렁뱅이들과 합쳐져 그 세력을 키우는 것을 금지하오.”
그 말에 왕초가 영랑의 얼굴을 바라보며 호탕하게 웃는다. “하하하! 우리들은 별다른 욕심이 없소. 세력을 키운다고 생각하는 것은 윗사람들의 생각일 뿐이오.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것을 알아내서 괴롭히고 쫓아내는 것입니다.”
거지들은 아무런 의욕도 없이 게으르기만 하고 사람들의 동정심을 악용하여 조금 동냥을 받아 돈이 생기면 투전판에 끼어들어 놀음을 하거나 싸움을 일삼기도 하며 심지어는 양귀비와 같은 각성제를 섭취하지 않소?”
 

당신은 결국 우리가 부지런한 백성들의 틈에 끼어 그들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사는 기생충과 같은 문제투성이들이란 말이군요. 그건 나쁜 면만 보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우리는 거지는 비록 품위가 없고 자존심을 버려야 하지만 어느 누구에게나 그 무엇에도 전혀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자유로운 생활? 당장 의식주가 제약을 받고 있는데 그 무엇에도 전혀 얽매이지 않는다? 이거 커다란 모순 아니오?”
거지들은 일반백성들처럼 군역을 가기를 하나 조세를 내기를 하나 아무 부담이 없고 홀가분합니다.”
나라에서 그런 부담을 주지 않으니 임금도 솔직히 거지들이 싫을 것입니다.”
우린 반대로 임금을 정말 좋아합니다. 저는 그동안 나라에 하나도 보탬이 된 것이 없는데도 이곳저곳에서 잘 얻어먹고 아무데서나 마음 편하게 잠을 이룰 수 있으니 이게 다 임금님의 커다란 은덕이 아니겠습니까?”
 

어느새 사발이 바닥을 드러내고 허기를 면하자 으슬으슬하던 몸은 한결 풀리고 가벼워지면서 기분 좋게 졸음이 쏟아졌다. 영랑이 입가를 손등으로 씻으며 왕초에게 물었다.
헌데 거지들은 왜 그렇게 많이 도시에서 죽치며 사람들을 귀찮게 하고 있는 거예요?”
보통 자연재해로 농사를 망쳐 다른 지역으로 떠돌게 되면 거지가 되기 십상이지요. 그래도 도시에서 동냥을 하고 다니면 생선이나 고기를 몇 조각 발견할 수 있으나, 시골 촌구석에서는 겨우 보리쌀 한줌이나 멀건 옥수수 죽을 간신히 얻어먹을 수 있을 뿐이오.”하고 왕초가 잠시 말을 끊더니 자세를 바로하고 다시 말을 이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살기 위해 서로 의지하게 됩니다. 사람이 굶주리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자존심을 버리게 됩니다. 하여 힘이 약한 자나 유순한 자들은 거지가 되고 힘이 강하거나 심성이 거친 자들은 도둑이 되기도 하지요. 헌데 한 푼의 동냥을 주지 않아서 도둑으로 돌변하여 당신들의 소중한 재산과 목숨을 노리게 되면 이게 누구 책임이겠습니까?”
 

영랑도 왕초의 그 말이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묵묵히 듣고만 있자 왕초가 조금 간절한 눈빛으로 말을 잇는다. “우리들은 단지 의식주만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들의 따뜻한 눈빛이 담긴 사랑을 구걸하고 있습니다. 당신도 정성스런 마음이 담긴 적선을 하여 내세에 공덕을 쌓으시오.”
이제 그는 왕초의 열정적인 설득에 완전히 빠져들고 있었다. 자신이 거지였더라도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왕초는 살며시 영랑의 손을 부여잡으며 은근한 눈빛을 보내면서 말을 이었다. “난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의 사랑을 간절히 원하고 있어요.” “제발 그러지 마세요.” 영랑이 바로 손을 빼고 고개를 돌리고 저만치 떨어져 앉았다. 그러자 왕초가 풀이 죽은 얼굴로 애처롭게 영랑을 바라보며 힘없이 말했다. “난 이렇게 누구에게나 영원히 버림받아야 합니까? 사랑도 희망도 없이 항상 외롭게 살아가야 하는 겁니까? 흑흑!” 왕초가 영랑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자 영랑은 안타깝고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숫제 기대를 하지 않게 사실을 말할까. 하지만 내가 남자란 것을 밝히면 이 사람이 얼마나 실망하고 화를 낼까. 도무지 자신이 없었다.
 

왕초가 딱하다는 동정심이 생겨난 영랑이 주먹을 쥔 채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왕초에게 말했다. “당신이 지금 비록 거지라도 앞으로 높이 될 거요. 옛날 그 유명한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오자서가 시장에서 피리 부는 거지이었고 한나라를 세운 최고 공신인 한신이 비렁뱅이가 않았소. 그러니 절망하지 말고 열심히 구걸하여 생명을 보존하고 때를 기다리시오.”
당신의 말을 소홀히 듣지 않겠습니다. 당신은 자신이 약속한 일에 반드시 책임을 지기로 유명하시겠죠? 꼭 다시 만날 수 있겠죠? 하하하!” 그는 눈물을 글썽이며 웃었다.
농담이 될 수도 있지만 내가 만약 당신들이 필요하다면 언제 어디든지 달려올 수 있겠소?”
물론입니다. 어디에서든 거리낌이 없이 가장 움직이기 쉬운 우리들입니다. 우리들이 뜯어갈 까봐 무서워하는 벼슬아치나 백성들이 거지들을 눈여겨보겠습니까? 설마 우리들을 보고 더러운 벌레들이라고 여기는 병부의 군졸들이 우리를 감시하느라 따라 다니겠습니까?”
. 정말 그럴 것도 같소.”
 

도도가 애타서 마른 입술에 침을 발라가며 말을 계속했다. “이렇게 자유로우니 우리들 틈에 섞여 있으면 절대 표시가 나지 않습니다. 게다가 길거리의 뜬소문을 누구보다도 빨리 알아 널리널리 퍼뜨릴 수 있는 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언제든지 불러주십시오. 헤어지자니 너무 섭섭합니다.”
우리가 만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렇게 서운해 하나요? 나도 아직 거지신세라 언제 그날이 올지 모르겠소.”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바람 따라 구름 따라 가는 인생 정해진 곳이 있나요.”
잠시라도 들르실 곳은?”
서라벌에 가 볼 일이 있어요. 그럼 이만.” 왕초에게 인사를 마친 영랑은 기약도 없는 일월오봉도의 영감을 찾아 터벅터벅 길을 걸어갔다. 그러자 왕초가 큰 소리로 영랑에게 말했다. “지금 나의 거지 모습으로 당신을 볼 수 없으니 당신을 위하여 개과천선하리다. 세상 끝까지 당신을 찾아갈 테니 꼭 나를 기다려주세요.” ‘내가 사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과연 저렇게 나올까?’ 영랑이 가슴 속에서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고 수십 리를 걸어가니 저 멀리 동쪽 끝으로 어둠에 잠긴 넓은 바다가 시원하게 눈에 들어왔다. 영랑은 부근의 멋있는 정자에 올라 바다를 한참 바라보다 자리에 누워 잠이 들었다.
낙산사 앞 동해의 검푸른 바다를 헤치며 동녘하늘에서 여명이 조금씩 밝아올 무렵이다. 저 멀리 바다 위에서 점점 가까워오는 갈매기 울음소리에 영랑은 잠을 깼다. 정자에 누워 잠을 자고 일어나니 으스스한 한기를 느낀다. 하지만 바다 위에서 물안개가 자욱하게 피어오르며 산들바람에 실려와 자신을 감싸니 신선이 따로 없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림을 그릴 영감을 찾아 벌써 여러 날을 해안가에서 거닐던 영랑. 오늘은 반드시 해내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이 그의 가슴을 가득 채웠다. 그는 정자 난간에 기대어 화폭을 펼치고 멀리 하늘과 물이 맞닿은 태고의 신비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화공은 눈에 보이는 것만 그리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 느끼는 것을 그려야 한다. 가슴으로 느끼는 것을 그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표면을 탁본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영랑은 화폭에 펼친 흰 종이를 보는 순간 세상살이의 모든 근심과 슬픔, 기쁨과 즐거움이 깨끗이 사라졌다. 그가 느끼는 세계는 이제 저 장엄한 대자연과 그것을 구현할 좁은 화폭의 하얀 테두리 안으로 압축되었다. 그에게는 오로지 자연과 동화된 이 순간의 성스럽고 신비한 감정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일만 남은 것이다.
 

대자연의 아름다움에 취해 사랑의 포근한 향기로 세상의 모든 것을 다정히 감싸 안고 싶었다. 며칠 전에 보았던 백제왕궁에서의 화려한 생활, 어제 알게 된 거지들의 고단한 인생까지도 모두모두 그의 가슴에 축축이 젖어 깊숙이 파고들었다. 벅차오르는 기대감에 심장이 거세게 두근거리고 날아오를 듯 황홀한 행복감에 젖어 꿈을 꾸는 듯 이곳에 그대로 영원히 잠들고 싶은 그였다.
영랑이 산 정상에서 뒤를 바라보니 수십 개의 봉우리들이 겹쳐 있어 그 끝을 볼 수가 없으며, 봉우리들 사이로 오색구름이 바다를 이루어 멋진 장관을 연출하고 있다. 동쪽하늘에 희미한 여명이 더욱 밝아오기 시작했지만 아직도 어두운 바다는 검푸른 물결로 출렁거린다. 영랑은 이미 거대한 바다 속에 묻힌 우주의 진리를 발견한다. 세상은 물결을 따라 끊임없이 바뀌지만 결국 제자리에 다시 오듯 돌고 도는 것이다. 그 넓은 백성의 바다에서 인간은 필요한 사람들만 골라내어 만나듯 자신의 예술도 그런 우주의 한 부분인 것이다.
 

조금 있으려니 바다의 검푸른 기운이 점차 가시고 조금씩 환해지면서 수평선 저 멀리에서 붉은 빛이 조금 보이더니 들불이 바람이 번지듯 사방으로 널리 퍼져갔다. 붉은 빛이 온 세상을 붉게 물들이면서 동그란 아침 해가 영랑의 지친 가슴에 희망을 불어넣으며 바다 위로 치솟았다. ‘아하~ 정말 장엄하도다. 바로 이것이다.’ 참을 수 없는 희열을 느낀 영랑.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붓을 들어 물감을 찍더니 거침없이 그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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