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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단편 연재] 기억을 담은 티백
게시물ID : readers_3255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밤의작가들
추천 : 1
조회수 : 268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8/11/02 17:3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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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은 저의 어머니가 만든 가게입니다. 제가 태어나기 전, 그러니까 꽤 오래전부터 어머니는 사람들의 기억을 티백으로 만들어주는 일을 해 온 것이죠.
 사람들은 두고두고 음미하고 싶은 행복한 순간들을 가지고 어머니를 찾았습니다. 연인과의 두근거리는 첫 키스, 이국적인 여행지에서의 붉은 노을과 바람, 아이가 종이 카네이션을 가슴에 달아주었던 어버이날의 아침 햇살, 뭐 그런 것들을요. 어머니는 그런 기억들을 바삭하게 말려 정성껏 밀봉했고, 사람들은 그 티백 한 상자를 소중히 안고 이곳을 떠났습니다.
 
 그런 특별한 능력을 가진 어머니가 있어 저의 유년시절은 따스하고 행복한 편이었습니다. 어머니는 티백을 만들고 남은 기억의 부스러기들을 잘 모아두었다가 제게 우려주셨죠. 집안 형편이 그리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저는 그 기억들을 한 모금씩 음미하는 동안에 세계 여러 곳을 여행했고, 수많은 기쁨의 순간들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건 일곱 살짜리 꼬마에게는 과분한 축복이었죠.
 
 단 하나, 저를 힘들게 했던 건 아버지라는 사람의 존재였습니다. 밖에서 일을 하고 돌아온 아버지는 종종 술에 취한 상태로 집안의 물건들을 집어던지면서 어머니에게 마구 화를 내곤 했습니다. 험한 욕설을 하는 날도, 폭력을 가하는 날도 있었어요.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저 아버지를 미워하고 원망하는 것밖에는. 솔직히 말해 저는, 아버지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길 간절히 바라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밤, 자다가 깨어서는 목이 말라 부엌으로 향했는데 식탁에 어머니가 앉아 계셨습니다. 어머니는 조용히 차를 마시고 계셨죠. 그때 어머니의 표정이 어땠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기억이 안 나는 게 아니라, 어려서 표정을 읽지 못한 것이겠죠. 어쨌든 저는 그 차를 마시고 싶어 어머니의 무릎께로 달려가 졸랐습니다. 평소의 어머니라면 ‘이건 아주 특별한 거야.’라는 설명과 함께 향긋한 차를 티스푼으로 떠서 후후 불어 입에 넣어주셨을 텐데, 그날은 달랐습니다. 단호하게 말씀하시더군요.
 —이건 아직 안 돼.
 그리고는 저를 안고 침실로 가셨습니다. 어머니의 품에 안겨있을 때, 저는 어깨너머로 슬쩍 보았어요. 어머니가 우려낸 티백은 검은 상자에서 꺼낸 것이었습니다.
 
 그 뒤로도 몇 번, 어머니는 한밤중에 홀로 식탁에 앉아 차를 우려내셨습니다. 저는 제 방 침대에 누워 자는 척하면서 물이 끓는 소리, 유리 찻잔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들었죠.
 일곱 살 꼬마였지만, 저는 이미 세상의 온갖 행복이란 행복은 지겹도록 맛본 상태였습니다. 더 이상 새로울 것도 특별할 것도 없었어요. 그러니 어머니가 ‘아직’ 안된다고 말씀하신 그 티백에 대한 궁금증이 날로 커져갔습니다. 그건 대단한 갈증이었어요. 그 티백을 우려서 찬 우유나 오렌지 주스를 마시듯 꿀꺽꿀꺽, 한 잔을 뚝딱 비워버리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몇 달 뒤, 어머니 아버지가 모두 깊게 잠드신 밤에 저는 일을 저지르고야 말았습니다. 식탁 의자를 선반 쪽에 가져다 놓고 의자 위에 올라가 손을 뻗어서, 어머니가 숨겨놓은 검정 상자를 꺼냈어요. 식탁에 앉아 그 상자를 한참 바라보았죠. 심장이 터질 것 같았습니다. 상자를 열어보니 아직 꽤 많은 티백이 남아있더군요. 서른 개쯤 되었을 겁니다. 제가 하나 꺼내 마신다고 해서 들킬 것 같지는 않았어요. 저는 설레는 심정으로 티백 하나를 꺼냈습니다. 물을 끓이면 행여 누가 들을까 싶어, 찬물에 티백을 넣고 우렸지요.
 
 저는 마치 여행을 떠나는 사람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습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투명한 물의 빛깔이 변하는 게 느껴졌습니다. 빨리 입을 대고 싶어 참기가 힘들었어요.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요, 십 분? 십오 분쯤? 도저히 더 기다릴 수가 없어서 저는 찻잔을 들어 입에 가져갔습니다. 아직 덜 우러나온, 은은한 빛깔의 액체가 목을 타고 흘러내렸지요. 그 순간, 뺨이 화끈거렸습니다. 불이 붙은 것처럼 아주 뜨거웠어요. 등에선 쓰라린 통증이 느껴지고, 눈에선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어지러웠어요. 찻잔에 우러나온 기억 속에선, 그 기억이 주인이, 마구 얻어맞고 있었습니다. 남자 어른에게 뺨을 맞고 바닥에 쓰러져, 발길질을 당하고 있었어요. 개 같은 새끼, 개 같은 새끼, 너 같은 게 왜 태어나서. 너 같은 건 죽어야 돼, 나가 죽어, 이 더러운 새끼. 남자 어른은 그런 말을 반복하더군요. 남자 어른이 떠나간 뒤 저는, 아, 그러니까 실제 제가 아니라 그 기억의 주인은, 피 맛이 나는 침을 삼키면서 마당으로 기어갔습니다. 그곳에서 수도를 틀어 무릎에 묻은 흙과 피를 씻고, 대야에 물을 받았어요. 그 아픔이 정말 생생하게 느껴지더군요. 덜 우러나온 기억일 텐데도 말이죠. 일곱 살 꼬마 아이가 감당하기엔 버거운 고통이었습니다.
 그런데, 대야에 물을 받고 세수를 하려는데, 그때 수면에 어른어른 비친 얼굴이 어쩐지 익숙했습니다. 그래요, 그건 제 얼굴이었어요. 아니요, 기억의 주인이 아니라, 실제 저요. 제 얼굴이었어요. 어찌 된 일인지, 기억의 주인과 제 얼굴이 똑같더란 말입니다. 기억의 주인이 어푸 어푸, 세수를 하면서 눈가의 눈물을 씻어내고 뜨거운 두 뺨을 식히는 동안에, 저는 깨달았어요.
 
 저와 같은 얼굴을 갖고 있는 기억의 주인, 그 사람은 바로 저의 아버지였습니다.
 
 입을 대선 안됐어요. 어머니의 말대로, ‘아직’은 안 되는 거였습니다. 단 한 모금, 덜 우러나온 기억을 단 한 모금 마셨을 분인데도 저는 너무나 고통스러워 부엌에 그대로 쓰러질 뻔했어요. 온몸이 뜨거웠고, 심장이 터질 것 같았습니다. 저는 간신히 힘을 내어 남은 차를 싱크대에 버리고 찻잔을 헹궜습니다. 그리고는 검은 상자를 제 침실로 갖고 들어갔어요. 검은 상자를 침대 바닥에 숨겨놓고, 이불을 뒤집어쓴 채로 곰곰이 생각해보았습니다. 생각을 하면 할수록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더군요. 조금 전 기억의 주인이 정말 아버지였을까? 어째서 행복이나 기쁨이 아닌 고통스러운 기억이 티백으로 만들어져있는 걸까? 어머니는 왜 한밤중에 그 차를 마시고 계셨던 걸까? 알 수 없는 것 투성이었습니다.   
    
 다음 날, 어머니는 선반에 있던 검은 상자가 사라진 걸 알고는 제게 물으셨습니다. 그래도 상자의 행방을 물으셨을 뿐, 설마 제가 그걸 마셨으리라곤 상상하지 못하시는 것 같았어요. 
 저는 팔아버렸다고 말했습니다. 새 장난감을 사고 싶어서 가게 앞으로 나가 사람들에게 몽땅 팔아버렸다고요. 그걸 마셨다고 고백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게 나을 것 같았어요. 무엇보다, 그걸 마셨다고 고백하는 순간 그 기억에 대해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게 될까 봐, 더 알고 싶지 않은 무언가를 알게 될까 봐, 그게 두려웠습니다.
 
 그리고 그날 오후, 전 어머니의 눈을 피해 집 근처 골목에 숨어 정말로 그 티백을 팔기 시작했습니다. 의외로 티백은 빠른 속도로 팔려나갔습니다. ‘이건 밝은 기억을 담은 게 아니에요, 아주 어두운 기억이에요. 행복한 게 아니라 슬픈 거예요.’라고 설명을 드려도, 어른들은 개의치 않고 값을 치렀죠. 전 그것이 의아했지만, 어쨌든 두 번 다시 맛보고 싶지 않은 그 티백을 집안에서 없애게 되어 기뻤습니다. 그런데,
 
 
 ……차 어떠신가요? 뜨거운 물 좀 더 드릴까요?”
 
 
 
 나는 퍼뜩 정신이 들어 테이블에 놓인 잔을 바라본다. 내가 마신 샘플은 ‘봄날, 벚꽃, 동물원 - 2007’이라는 이름의 티백. 75도씨의 따뜻한 물을 부어 3분간 우려낸 차였다. 특별히 구하고 싶은 티백이 있어서 이곳 ‘마들렌스 프라이빗 티 컴퍼니(Madeleine's Private Tea Company)’를 찾아왔지만, 남자는 매뉴얼대로 진행을 해야 한다며 주문서 작성을 미루고 나에게 이 티백을 우려 주었다. 유리잔에 담긴 분홍 빛깔은 아름다웠고, 끝 맛은 꿈결처럼 아련했다. 당신과 함께 이 차를 마시는 상상을 잠시 해 본다. 우리에게도 이렇게 티백으로 만들 만한, 아름답고 아련한 기억의 조각이 있었던가. 당신에 대한 기억을 티백으로 만든다면 그 차에선 비 냄새가 날 것만 같다. 퇴근 시간, 우산이 없는 나를 위해 회사 앞까지 찾아왔던 당신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당신의 젖은 바짓단과, 당신의 젖은 어깨, 당신의 젖은 눈동자, 모든 것이 비 오는 날의 풍경 속에서 되살아나… 마음에 비가 내린다.
 나는 서둘러 티백을 사서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뜨거운 물을 사양하고 남자에게 뒷이야기를 재촉한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 그 티백을 사 갔던 어른들이 골목 주변을 서성이다 저를 발견하곤 불러 세우더군요. 전에 사간 것과 비슷한 티백을 또 사고 싶다면서요. 남아 있는 게 없다는 저의 말에 어른들은 몹시 아쉬워했습니다. ‘아, 난 그게 두 상자쯤은 필요한데! 그 차를 마셨더니 내가 얼마나 행복한 인간인지 알겠더라고.’ 이런 말들을 하면서요. 아, 어떤 어른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꼬마야, 그때 판 것보다 더 센 건 없니? 더 잔인하고, 더 슬픈 거 말이야.’
 
 누군가는 저의 아버지의 기억을 통해 자신의 행복을 깨달았다지만, 저는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불쌍했습니다. 불쌍했지만 미웠고, 불쌍했지만 원망스러웠습니다. 아버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아버지에게 어떤 감정을 가져야 할지, 도무지 마음을 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토록 죽길 바랐던 아버지인데, 막상 아버지의 기억 속에 죽으라는 말을 듣고 발길질을 당했던 장면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내가 바라는 건 이런 게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티백에 손을 댄 걸 후회하고 또 후회했습니다. 차라리 아무것도 몰랐던 때가, 마음 편히 아버지를 원망하고 저주하고 죽길 바랄 수 있었던 때가, 더 좋았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열아홉 살 때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후 스무 번째 생일날에, 어머니로부터 아주 특별한 티백 한 상자를 선물 받았습니다. 그건 서로 다른 스무 개의 기억이 담긴 티백 컬렉션이었습니다. 열아홉 개의 티백에는 저와 어머니 아버지가 함께 만들어간 시간들이 켜켜이 담겨 있더군요. 제가 태어나던 순간부터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순간까지 열아홉 해의 시간들이 모두, 정성껏 손질되어 향긋하게 말려져 있었어요.
 사실 좀 놀랐습니다. 아주 어릴 때 기억은 제 머릿속에 남아있지 않은데, 차로 우려냈더니 그 속에선 자상한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거든요. 어머니는 마지막 스무 번째 티백을 상자에서 꺼내, 저에게 설명해주셨습니다. 거기엔 아버지의 일곱 살 시절 기억이 담겨 있다고요.
 
 아버지는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심각한 학대를 받고 자랐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그런 사정을 전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끔 아버지가 술에 취해 폭군으로 변해버려도 참아낼 수 있었다고 하시더군요. 아버지의 상처를 감싸고, 결핍을 채워주고 싶으셨다고요. 저는 아직도 그런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한 가지는 분명했어요. 아버지는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아무런 사랑을 받지 못했지만, 자식인 저에게는 나름대로 사랑을 주려고 노력했었다는 것 말이죠.
 아버지는 나쁜 남편이었지만, 나쁜 아버지는 아니었던 겁니다. 열아홉 개의 티백을 하나씩, 천천히 우려 마시는 동안에 저는 그 사실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어요.
 
 마지막 남은 한 개의 티백은, 아직 마시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걸 검은색 상자 안에 넣어 침대 밑에 보관하고 있어요. 스무 번째 생일 이후로 벌써 10년이 시간이 흘렀지만 저는 여전히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아버지의 고통을 제대로 마주할 용기가 생겨나는 순간을요.
 

 ……자, 손님은 어떠신가요. 오늘, K씨의 어린 시절 기억이 담긴 티백을 구하러 이곳에 왔다고 하셨죠. 그 티백의 맛이 어떨지는 손님께서도 대강 짐작하고 계실 겁니다.
 이제 모든 절차가 끝났으니, 여기 이 주문서의 빈칸만 채우시면 바로 티백을 꺼내드릴 수 있습니다. 적절한 물의 온도와 침출 시간도 상세히 적어드릴 겁니다. 하지만 차를 한 모금 마신 후에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선 저희는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습니다.
 정말, 괜찮으신가요?”
 
 
 
 펜을 손에 쥐었을 뿐, 나는 주문서에 아무것도 적지 못한다. 나는 이미 당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알고 있다. 당신은 여덟 살에 어머니를 잃었다고 했다. 울면서 매달리는 당신을 두고 어머니는 떠났고, 아버지의 퇴근이 늦어질 때마다 새어머니는 당신을 때렸다고 했다. 준비물이 필요해서 새어머니에게 오백 원을 달라고 할 때마다 새어머니는 당신에게 욕을 했고, 매일 준비물 없이 빈손으로 학교에 가는 바람에 선생은 당신에게 몽둥이를 휘둘렀다고 했다. 당신은 그 기억을 티백으로 만들어두었다고 했다. 가족과의 연을 끊고 악착같이 일에 매달려 성공할 수 있었던 건 모두 그 티백 덕분이라고, 당신은 어느 비 오는 밤의 포장마차에서, 내게 말했다. 그때 당신은 울고 있었다.
 
 언젠가 나를 위해 우산을 씌워주었던 당신. 당신의 삶엔 항상 외로운 비가 내렸다. 흠뻑 젖은 당신의 모습이 내 눈에는 보였다. 나는 당신의 삶 위에 나란히 서서 당신을 향해 우산을 기울여주고 싶었다. 당신의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 당신의 결핍이 얼마나 커다란지, 아무것도 짐작하지 못했던 주제에.
 당신이 서 있는 자리에 쏟아지는 건 비가 아니라 폭풍우였다. 당신과 나란히 선다는 건 거센 폭풍우에 삼켜지는 위험을 감당해야 하는 일이었다.
 나는 어느새, 당신을 빗속에 버려둔 채 도망치고 싶어졌다.
 
 오늘 나는 왜 이곳에 왔을까. 어째서 당신의 아픈 기억을 들여다보고 싶어졌을까. 당신의 고통을 마주하고 나면, 나는 영영 당신을 버릴 수 없을지도 모르는데.
 여덟 살, 당신은 몰래 울고 있을 것만 같다.
 
 나는 지금 당신의 그 눈물을 외면하고 싶은 것일까, 닦아주고 싶은 것일까. 어느 쪽일까.
 
 
 
 
 
- written by 설탕연필 / 밤의 작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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