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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기록 / 엘리자베스 앤더슨(1)
게시물ID : panic_9987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어떤것
추천 : 7
조회수 : 1107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9/02/20 18:5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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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오늘부터 교외에 있는 작은 사무실에 출근하기로 했다. 단순히 걸어서 출근할 만한 거리와, 업무 종료시 자율퇴근 이라는 점에서 고른 곳이다. 그들이 신문에 낸 공고에 의하면, 적어도 아직 아무런 직업경험이 없는 당신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건 자명했다. <타이피스트 구함, 자격증/경력 불필요>

도착 하기로 한 시간보다 십분 쯤 일찍 갔을 때, 그 오래된 4층 건물 안에서 불에 그을린 듯 한 채도가 낮은 갈색머리의 여성이 당신을 맞이한다.

"미스터 콜린? 반갑습니다. 바네사 스미스 입니다."

필요 이상으로 격식을 차리는 말투와 말끔한 양복차림이다. 곧 쓰러질 것 같은 낡은 4층짜리 건물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여기저기 널부러져있는 서류의 양은 범상치 않지만 실내에 있는 세명의 직원들 모두 옷차림이 깔끔하다. 당신은 곧 사무실 가장 안쪽의 녹색 문 안으로 인도되었다.

이십년 쯤 전에나 썼을 법한 양철 책상이 구석쪽에 딱 붙어있다. 북 엔드가 있긴 하지만 아무런 파일도 보이지 않는다. 책상에는 녹슨 구석은 없지만 잉크자국 처럼 보이는 얼룩이 여러군데에 걸쳐 보인다. 깨끗한 신품이지만 그 자체로 구시대의 상징인 검은색 타자기가 보인다. <주의사항>이라고 적힌 에이포 용지가 꽂혀있다.

"당신이 이 건물 안에서 지켜야하는 규칙들 입니다. 저희 사무실은 여러 제휴업체들과 건물을 공동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꽤 자주 서로의 사무실을 왕래하는 일이 있습니다."

당신은 용지를 손에 들고 보기 시작한다.

1. 4층 복도에서는 어떠한 소리도 내서는 안됩니다. 여기서 어떠한 소리란, 평균적인 호흡소리 이상의 모든 소리를 포함합니다.

2. 만약 건물 내에서 안내받지 못한 곳이라고 생각되는 복도에 들어섰다고 여겨진다면, 반드시 모든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이동하세요. 불이 꺼져있거나 이상한 소리가 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3. 당신이 들어가려는 사무실의 문이 잠겨있다면, 모든 업무를 중단하고 당신에게 배정된 방으로 돌아가십시오. 이 경우 사무실은 당신에게 어떠한 종류의 질책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당신이 업무 중인 방의 문 또한 잠겨서는 안됩니다.

4. 본 건물에서 근무하는 총 인원은 43명이며 가능한 빨리 모두의 얼굴을 외워두어야 합니다. 혹은, 적어도 소속된 사무실의 직원의 이름과 얼굴을 외워두십시오. 또한 다른 사무실에 방문하게 되더라도 결코 들어서서는 안됩니다. 전달해야할 물건이 있다면 내부의 직원을 불러 건네 주십시오.

5. 어떠한 종류의 통신기기도 출납을 불허합니다. 외부의 주파수를 수신가능한 휴대용 라디오 또는 핸드폰 등은 퇴근 시 까지 담당 상사에게 맡겨드십시오.

6. 업무 시간 동안 용변, 식사, 그 외의 용무로 배정받은 방에서 이탈하게 될 때엔 포스트 잇에 당신의 이름과 용무를 적어 안내 데스크의 직원에게 제출 하세요. 아무리 짧은 용무라도 반드시 제출되어야 합니다.

당신은 의아해졌다. 비록 당신이 사회경험이 없는 새내기 대학생이라도 이것이 평균적인 회사 내 규범에서 크게 벗어나 있다는 사실은 눈치챌 수 있었다. 고개를 돌려 바네사를 바라보자 그녀가 질문을 알아챘다는 듯이 대답한다.

"그 외의 사항에 대해서는 제약사항이 없습니다. 혹시 명시된 규칙 중에 업무에 차질이 있을만한 내용이 있었나요?"

당신은 고개를 저었다. 납득하긴 힘든 종류의 규범이었으나 딱히 신변에 위협이 되거나 업무 환경 치고는 문지가 될만 한 내용은 없는 까닭이다. 신경이 쓰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다른 사무실에 유별나게 주변머리가 없은 고위직이 있는가 한다.

고심끝에 당신이 고개를 끄덕이자 바네사는 눈에 띄게 안도한 표정으로 잠시 기다려 달라고 말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그녀가 들고 온 물건은 검정색의 투박한 녹음기였다. 광택없는 검은색에 각이 진 외형, 어찌보면 통신기 처럼도 보였다. 안에 들어가는 테이프에 비해 지나칠 정도로 거대한 외견은 한손으로 쥐면 벽돌처럼 보일 듯 했다. 바네사는 들고 온 상자에서 녹음기를 재빨리 내려놓았다. 

"미스터 콜린, 당신의 업무는 이 녹음기에 저장된 내용을 가능한 정확하고 빠진 부분이 없이 타이핑 하는 겁니다. 하루에 지정된 할당량은 없지만 최저한 하나 이상의 업무 수행률을 기대하고 있어요. 재생과 타이핑이 완료되었다면 제게 가져와 반납하시면 됩니다. 그 후 추가로 업무를 진행하고 싶으시다면 말씀해주세요. 오늘은 우선 한개 분량의 데이터를 종이 위로 옮길 겁니다. 직원 소개와 건물 안내는 내일 도와드리도록 하죠. 아참, 시간은 달리 지정되어있지 않습니다. 급여는 저희가 공고한 바와 같이 매 건당 50불을 당일 현금으로 지급할 겁니다. 그럼 일을 끝마치는대로 제게 보고해 주십시오."

빠르게, 하지만 정확한 발음으로 말을 끝마친 바네사는 종종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문에는 말발굽이 달려있어서 신경써서 굳이 닫아놓지 않는 한 완전한 폐쇄는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당신은 잠시 손가락을 풀고, 녹음기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약 1분 여 간 치직거리는 노이즈, 헐떡거리는 소리)

- 어, 이거 녹음 되고 있나? (간헐적인 퓨즈. 녹음 내용을 확인하는 중인 듯 하다.)

- ...저는 엘리자베스 앤더슨 이고요, 여기는 뉴 햄프셔 입니다. 현재, 현재는...(*한숨소리) 아마도 2007년 9월 15일 일거에요. 아! 이게 무슨 소용이야!

(한참동안 숨죽여 우는 소리만 들린다. 다소의 욕설, 한숨소리.)

- 진짜,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네요. 젠장 난 이게 무전기 인 줄 알았단 말야. 어쨌든, 달리 할 일도 없으니 하는거고. 벌써 십 오일째 다른 사람 얼굴은 구경도 못했고, 통조림이 떨어진지는 이틀 째 입니다. 바깥 상황이 상황이니 먹을 걸 구하러 가느니 혀 깨물고 죽는게 낫겠어요. 제시가 그 짓거리 하러 나간대놓곤 지금까지 안돌아왔거든. 아, 제시 포스터는 제 친구에요. 근사한 허니블론드를 가졌고, 캔맥주를 헐리웃 배우보다도 근사하게 마실 줄 알고, 우리 중 누구보다도 끝내주는 이탈리아 발음을 가졌고, 지금은 시체겠죠. 같이 나간 모리스는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어요. (*울먹임) 

- 저 빌어먹을 폭탄이 떨어지기 전에는 우린 주립 대학교에서 툭하면 수업을 째는 시시한 불량배들 이었고, 그 날도 이 촌구석에서 유일하게 먹을만한 베이비립을 파는 파비안네에 가는 길이었어요. 아 베이비립... 후, 그러니까 모리스의 중고 bmw를 타고 주택가에 들어섰을 때 폭격이 시작됐습니다. 휘파람 같은 소리가 들리기에 하늘을 봤더니 온통, 온통 검은색 점 들이, 점점 커지고 있었어요. 제시가 그 전날 빌려온 비디오 테이프에 들어있었던 밴드 오브 브라더스. 딱 거기서 본 것 같았어. 비명을 지르며 우린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갔어요. 이게 맞나? 아니, 그런건 잘 모르겠지만. 솔직히 말해서 지금 생각해보면 그 연파랑색 양철 지붕이 우리를 폭탄으로부터 지켜주기는 무리였지. 어?(*원인을 알 수 없는 소음. 잠시 녹음이 멈췄다. 숨을 죽이고 소리를 들어보려는 듯 하다.) 이상한 소리가 났는데...

하여튼, 그 이후는 잘 기억이 안나요. 정신이 들어보니까 우린 제시네 집 지하에 들어와 있었어요. 모리스는 머리에서 피를 줄줄 흘리고 있었고 제시는 나와 모리스를 돌보느라고 자기 얼굴에 잿가루가 범벅이었어요. 로널드 포스터 씨의 위대한 선견지명으로 지하실에는 그럭저럭 우리가 며칠을 버틸만 한 통조림이 있었어요. 밀가루도 있었지만 불이 없었고. 사실 방공호라기엔 너무 물자가 없었지만 밖에 죽어나자빠진 시체들보다야 신세가 나았습니다. 하루 이틀이 지나고 우리에게 가장 큰 문제는 화장실이었어요. 폭탄은 아마 화학탄이었나봐. 우리중 유일한 남자였던 모리스가 그 다운 배짱으로 바깥을 다녀왔을 때, 걘 아마 다섯번 쯤 토했을 거에요. 바깥에, 시체가 걸어다닌대요. 정확히는 시체나 다름없는 모습의 사람들이. 최소한 똥오줌을 갈기는 꼴을 친구들에게 보여주긴 싫었던 나도 보게됐죠.(*헐떡임, 물을 마시는 소리.)

좀비 라고 하나? 피부는 온통 짓물러서 버터처럼 녹아내리는데 특히 얼굴이 심했어요. 눈썹이 뺨 즈음에 매달려있는 사람도 있었지. 우리가 알던 사람들을 찾아보려는 시도는 모조리 실패했어요. 사실 이목구비가 모조리 자기 멋대로 달려있는데 누굴 알아보기란 어려운 일일거에요. 사람들은 적어도 우리가 지켜보고 있는 동안엔 계속 서 있기만 했어요. 누군가 바닥에 끈끈이를 발라 둔 것 처럼. 그리고 셋째날이 됐어요. 제시는 통조림의 갯수를 헤아리더니, 우리가 용기를 내야 할 타이밍이라고 했어요. 이대로 가면 채 며칠 못가서 다 굶어 죽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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