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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낭만소녀
게시물ID : readers_3332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리버보이
추천 : 1
조회수 : 460회
댓글수 : 16개
등록시간 : 2019/03/01 02:5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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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 (소개팅,사진,지붕,가위,앞머리)
   제시어로 써본 글입니다!
 
 
 
 
 
 
 
 정연은 소개팅이 싫다고 했다.
  만남을 위한 만남은 낭만적이지가 않아. 소개팅 제의에 늘 도도한 표정으로 말하는 그녀였다.
 

  그렇게 낭만을 좇던 그녀가 소개팅 한 번 해보지 못하고 스물둘 꽃다운 나이에 목숨을 잃었다. 병에 걸렸다거나 차에 치여서가 아니라 눈 때문이었다.
 

  정연은 눈이 오는 날이면 황홀한 얼굴로 웃었다. 마치 누군가 눈길에 미끄러지는 자신의 손목을 잡아당겨 안아 줄 것 같다고 했다.
  낭만의 계절이라며 겨울을 누구보다도 사랑했던 정연에게 겨울은 길고 날 선 선물을 주었다. 유난히도 많은 눈이 내린 다음 날 오후, 구름이 햇살을 가려 세상은 침침했다. 그날도 아마 정연은 낭만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지붕 위에 쌓인 눈과 처마 끝에 달린 고드름이었다. 새하얀 눈이 정연의 피로 온통 질척거릴 즘 구조대원이 그녀를 안았다. 조금만 더 빨리 발견되었다면 살 수 있었을 거라는 얘기가 눈보라처럼 사람들 사이에서 부옇게 몰아쳤다.
 

  미용실을 찾았다. 언젠가 앞머리 있는 남자는 답답해 보여서 싫다는 정연의 말을 들은 뒤부터 늘 왁스로 올리거나 짧게 치고 다니던 나였다. 미용사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가릴 때마다 지나치게 답답함을 느꼈다. 정연히 죽은 뒤 근 10년만의 변화가 낯설기는 한 모양이었다.
    

  앞머리를 내리고 며칠이 지나서 한 남자가 나를 찾아왔다. 아파트 현관 앞에서 담배를 물고 있는 모습이 썩 마음에 드는 첫인상은 아니었다.
 

"왜 머리를 내렸습니까?"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는 내 뒤로 그의 음성이 들려왔다. 나는 그가 누군가와 전화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비밀번호를 모두 누르고 뒤돌아섰을 때 그의 시선이 정확히 나를 향해있는 것을 보고, 앞선 질문이 내게 한 것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나는 멍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아무리 뜯어보아도 내가 모르는 얼굴이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 내게 왜 머리를 내렸냐고 물었을 때 나는 구구절절 그 이유를 설명해야 할까?
 

"누군데 그런 걸 묻습니까?"
 

  그는 필터 끝까지 핀 담배를 아파트 건물 벽에 아무렇게나 비벼 끄고선 말했다.
 

"정연히 친굽니다."
 

  나는 그의 말에 닫히려는 현관문 사이로 손을 들이밀었다. 내 손과 부딪힌 문이 다시 열리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이 정연이를 죽였다는 거."
 

  심장이 뛰었다. 심장은 태어났을 때부터 죽 한결같이 뛰어왔을 텐데도 심장이 뛰고 있다는 것이 미치도록 선명하게 느껴졌다. 마치 정연히 죽던 그 날처럼.
 

"이미 10년 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나는 그를 내 집으로 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집에 손님을 위한 차 같은 건 없었다. 지난 10년간 누군가를 내 공간 안으로 들인 것은 처음이니까. 주전부리 하나 없이 그냥 우두커니 자리에 앉아 그가 먼저 입을 열기만을 기다렸다.
 

"그냥 궁금했습니다. 정연이를 죽이고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왜 내가 죽였다고 생각합니까. 정연히는 단순 사고사였어요. 겨우 무뎌졌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당신 덕분에 다시 괴로워지기 시작하네요."
 

  나는 앞머리를 감싸 쥐며 고개를 숙였다.
 

"대학 다닐 때 정연이랑 같은 사물함을 썼어요."
 

  그가 재킷을 열어 서류봉투 하나를 꺼냈다.
 

"정연이 사물함이 따로 있었는데 문이 고장 나서 제 사물함을 같이 쓰기로 했었죠. 정연이가 죽고 나서 사물함을 정리하다 발견한 거예요."
 

  그가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나는 그를 말리지 않았다.
 

"후우-"
 

  집안이 담배 연기로 가득 찼다.
 

"내일 정연이가 있는 납골당에 갈 건데 같이 갈 생각 있으면 아침 9시까지 준비하고 연락 주세요."
 

  그는 전화번호가 적혀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종이를 소파에 넌지시 올려놓고 집을 나섰다. 적막을 깨는 시계의 초침 소리가 서둘러 봉투를 열어보라며 내 등을 떠밀었다.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열었다. 제법 많은 양의 A4 용지가 잡혔다. 아침 해가 뜰 때까지 나는 그 종이에 적힌 내용을 읽고 또 읽었다.
 

  정연이다웠다. A4용지 속 내용은 일종의 낭만 계획서 같은 것이었다. 계획서 안에서 나는 첫사랑의 죽음으로 평생 슬퍼하는 청년1이었다. 계획서에서 청년 1은 자신의 말이라면 곧이곧대로 믿고 따르는 순애보였다. 이마를 덮는 앞머리가 답답하다고 말하면 절대로 앞머리를 내리지 않는 바보 같은 청년.
 

  청년1 말고도 수많은 역할이 있었다. 내게 서류를 준 남자는 무슨 역할이었을까. 어느덧 시간은 830. 나는 서둘러 준비를 마친 뒤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연의 사진 앞에서 남자와 나는 묵념했다. 해맑게 웃고 있는 정연의 표정을 보니 옛 생각이 떠오른다. 중학생 때 교회에서 처음 만난 정연에게 나는 반쯤 미쳐있었다. 티를 내지 않으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녀도 딱히 싫어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기에 나는 줄곧 그녀 곁에 머물렀다.
 

  그녀는 영화 같은 만남과 사랑을 원했다. 밋밋한 만남으로 시작된 나와 그녀는 연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시간을 거듭하며 점차 깨달았다.
 

  남자와 나는 남자의 차로 자리를 옮겼다. 정연의 소망을 들어주기 위해 옳고 그름을 생각하지 못한 채 정연을 죽음으로 인도한 사실을 그에게 모두 털어놓았다. 정연이 죽고 나서야 나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처마 끝에 붙은 고드름만 바닥으로 떨어트릴 생각이었다. 지붕 위에 쌓인 많은 양의 눈이 그녀를 덮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애초에 그녀의 계획은 죽음이 아닌 병원 신세 정도였겠으나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았던 것이다.
 

"정연이는 현실에서 낭만을 찾기 힘들다는 사실에 괴로워했습니다. 왜 그렇게 낭만에 집착하는지는 저도 아직까지 잘 모르겠어요. , 정연이만의 사연이 있겠죠. 중요한 건 죽더라도 정연이가 낭만을 꿈꿨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당신을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어요."
 

  남자와 나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당신이 갇혀 자신을 원망하며 사는 것은 낭만적이지 않으니까. 그날 정연이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외진 곳으로 저를 불렀어요. 문자로 10시까지 와달라고 했죠."
 

  그날 10시라면 정연이 내게 고드름을 떨어트려 달라고 약속한 시각이었다.
 

"그런데 문자를 보낸 다음 날 정연이는 약속한 시각보다 1시간 더 늦게 나오라고 신신당부를 하더군요."
 

"아아."
 

  나는 그의 말에 짧게 탄식했다. 그녀는 고드름 따위로도 자신이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가 늦게 도착해 자신이 살 수 없도록 미리 계획한 것이라고 밖에는 생각이 미치지 않는다.
 

"정연이는 정말 죽을 생각이었나 보네요."
 

  답답한 기분에 창문을 열었다.
 

"굳이 당신이 아니었어도 정연이는 자신이 영화 속 주인공과 같은 처지에 놓이도록 애썼을 거예요. 계획서 안에서 저는 첫사랑의 죽음으로 평생 슬퍼하는 청년2였어요. 서류 내용에 적힌 청년1의 묘사를 보자마자 당신이라는 걸 알았어요. 정연이가 자주 당신에 대해 이야길 했거든요. 저 역시 정연이를 사랑해서 그 당시 당신에 대한 기본적인 것은 알아야겠다 싶어 조사만 해뒀었어요. 덕분에 이렇게 우리가 만나고 있는 거고요."
 

  다른 사람에게 나에 대한 이야기를 했구나. 나는 그에 관한 이야기를 한 번도 듣지 못했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소개팅이나 선은 고사하고 여자조차 만나지 못하는 나와 그를 보고 있자니 어쩌면 이것이 그녀가 원했던 것이 아닐까 싶었다. 평생 자신을 그리워하며 살아갈 남자들의 모습이 그녀에게는 그토록 낭만적으로 느껴졌던 것일까. 혼자 깊은 생각에 잠겨있을 때 그가 나의 집중을 흐렸다.
 

"그리고 지금까지 해주신 이야기는 잘 녹음해서 제 메일로 보내 놓았습니다."
 

 아직 공소시효가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나의 고백을 모두 녹음했다고? 눈에 살기가 어렸다.
 

"너 이 자식, 원하는 게 뭐야?"
 

  그가 담배를 꺼내 물었다. 나는 그의 입에 물린 담배를 빼앗아 반으로 잘라버렸다.
 

"원하는 게 뭐냐고!!"
 

  그의 멱살을 붙들며 소리쳤다.
 

"정연이가 그렇게 낭만에 집착하는 이유가 알고 싶어요. 10년이나 지나 이제 와서 부질없다는 거 알지만, 여전히 저는 정연이를 잊을 수 없고 정연이에 대해 더 알고 싶은 마음입니다. 혼자서는 힘들 것 같으니. 당신이 날 좀 도와야겠어요."
 

  나는 맥이 탁 풀렸다. 10년이 지나서야 겨우 그녀에게 벗어나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앞머리도 길게 내린 것인데 결국 나는 정연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일까. 그녀는 이런 전개까지 예상했을까. 어쨌거나 나는 또다시 정연에게 사로잡히게 되었다.
 

난 비흡연자니까 내 앞에서는 피지 말아줬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내가 정연이보다 한 살 많아요.”
 

 그는 나의 말에 대충 고개를 주억거린 후,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서 어딘가에 있을 그녀의 자취를 향해 가속 페달을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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