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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류사념
게시물ID : panic_10003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song
추천 : 13
조회수 : 2149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9/03/27 19:5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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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3학년 때, 나는 제비뽑기에 져서 미화 위원회에 들어갔다.



미화 위원은 아침 6시부터 미화 운동이라는 이름의 교내 청소에 동원되는 허울만 좋은 자리다.



위원회는 3개 조로 나뉘어, 각 조가 한 주에 이틀씩 청소를 맡게 되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촌스럽기 그지 없는 네이밍 센스지만, 나는 제 3 미화팀이었다.



1조는 월요일과 목요일, 2조는 화요일과 금요일.



그리고 우리 3팀은 수요일만 청소를 했다.







토요일엔 학교를 안 나가니까.



한 조는 각각 10명 정도로, 학년이나 성별은 모두 제각각이다.



어차피 아침에 청소하는 것 뿐이니 딱히 불만은 없었지만, 그 중 같은 3학년에 다니는 어두운 이미지로 알려진 이이지마란 놈이 있었다.







키가 작아 언제나 교실에서 책만 읽고 있는 녀석이다.



나는 [우와, 재미없는 녀석이랑 한 조가 됐네.] 싶었다.



다른 조가 더 재미있어 보여 부럽기도 했다.







그리고 개학 후 첫 수요일, 6시에 모인 우리 3팀은, 선생님의 지시를 받아 청소를 시작했다.



교정의 쓰레기를 줍는 쪽이 있는가 하면, 신발장을 걸레로 닦는 녀석도 있다.



그렇게 다들 각각 흩어져서 맡은 청소구역을 열심히 치우고 있었다.







그 중 나는 이이지마와 둘이, 체육관을 기름걸레로 닦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7시부터는 아침 동아리 활동이 있기에, 그 전에 쓱싹 해치우라는 거였다.



결국 나는 말 한 번 섞은 적 없는 이이지마와 둘이서, 체육관을 걸레로 밀기 시작했다.







아침 댓바람의 체육관은 딱히 기분 나쁠 것도 없고, 그저 시원하기만 했다.



이 참에 이이지마랑 뭔 얘기라도 해볼까 싶기도 했지만, 그냥 걸레질이나 했다.



솔직히 어색해 죽을 것 같았다.







엄청나게 조용한 체육관에서 하나도 안 친한 남자 녀석 둘이 말 한마디 없이 아침부터 걸레질이라니, 영 내키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등 뒤에서 끽끽하고 소리가 난다.



농구 시합 도중 농구화가 바닥에 쓸릴 때 나는 그 소리다.







나는 바로 뒤를 돌아봤지만 아무도 없다.



주변을 돌아보자 이이지마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담담하게 걸레질을 하고 있다.



기분 탓인가 싶었지만, 이번에는 저 멀리서 콩콩콩하고 소리가 난다.







공을 바닥에 튀기는 소리다.



그 쪽으로 시선을 돌려도 아무 것도 없다.



내가 두리번거리고 있자, 등 뒤에서 [너도 들었지?] 라고 말소리가 날아온다.







깜짝 놀라 뒤를 보자, 어느샌가 이이지마가 다가와 있었다.



[너도 들었지? 지금 그거.] 라며 싱글싱글 웃고 있다.



어두운 웃음이 기분 나쁘긴 했지만, 이이지마가 먼저 말을 걸은 건 좀 의외였다.







나는 [지금 그거 무슨 소리야?] 라고 물었다.



[잔류사념.]



이이지마는 기름걸레 자루에 턱을 괴고 대답했다.







[사람의 생각이 어느 장소에 머문다는 건 자주 있는 이야기잖아. 생각해 봐. 예를 들면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아버지가 생전 애용하던 의자엔 왠지 아버지가 앉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한다잖아. 이런 게 가장 흔한 잔류사념이야.]



나는 이이지마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유령 같은 거야?] 라고 물었다.







[그거야, 잔류사념이 원한이나 미련 같은 강렬한 거라면 자박령이 될 가능성도 있겠지. 하지만 그런 게 흔한 건 아니야.]



[그럼 뭐라는 건데?] 라며 나는 투덜거렸다.



[살아 있는 사람의 잔류사념이란 것도 있다구. 교장실에 있는 소파에는 앉기 좀 거북하지? 그것도 일종의 잔류사념이야. 교장 선생님의 생각이 머물러 있다는거지.]







헤에, 하고 나는 대충 대답했다.



하지만 내심 기분 나쁜 소리를 하는 녀석이구나 싶었다.



[아마 농구부에 있는 녀석의 잔류사념이겠지. 뜨거운 느낌이 들어. 꽤 농구를 사랑하는 사람의 생령 같은 거 같아.]







아아, 하고 나는 대답했다.



나는 이이지마는 생긴 것 마냥 괴짜구나 하고 생각하며 걸레질을 마쳤다.



열심히 걸레질만 한 덕인지, 다 끝났는데도 6시 30분이었다.







이이지마와 둘이서 체육관에서 나가려는데, 또 등 뒤에서 소리가 들렸다.



끽끽.



[야, 근데 생령이 연습을 하고 있어. 이 사람 누군지는 몰라도 진짜 농구를 좋아하는 거 같아.] 라고 이이지마가 말했다.







그러더니 체육관의 무거운 문이 열렸다.



농구부 주장 우치노였다.



[이야, 너희 아침부터 청소하고 있냐? 제비뽑기 한 번 잘못해서 고생이 많구만!]







나는 [아침 연습치고는 좀 이르지 않냐? 7시부터잖아?] 라고 물었다.



우치노는 씩 웃고 대답했다.



[현 대회가 코 앞이라구. 나한텐 마지막 대회인데다, 올해는 왠지 잘 될 것만 같아.]







나와 이이지마는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이지마는 살짝 브이자를 그려보인다.



우치노에게 [힘내라.] 라고 말하고, 우리는 체육관을 나섰다.







그 후, 청소를 너무 빨리 끝내서 대충 한 거 아니냐고 선생님한테 살짝 혼났다.



결국 남은 30분 동안 교정에서 쓰레기를 줍게 되었다.



7시가 되어 슬슬 다들 등교하기 시작하고, 나와 이이지마도 서로의 교실로 돌아갔다.







이상한 아침이었다 싶었지만, 조금 마음이 따뜻해진 느낌이었다.



출처: https://vkepitaph.tistory.com/725?category=348476 [괴담의 중심 - VK's Epita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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