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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이사 가는 날
게시물ID : panic_10019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냥이박사
추천 : 8
조회수 : 1632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9/05/14 22:5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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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시가 뿜어내는 조명은 밤하늘을 주황색 그라데이션으로 물들인다. 시선을 하늘 아래로 끌어내리면 강가 위에 놓인 대교가 보인다. 좀 더 다가가보면, 난간에 손을 짚고 골똘히 생각 중인 빼빼 마른 남자가 보인다. 20대 후반의 앞날이 보이지 않는 ‘박유겸’이다. 그는 생각을 굳힌 듯 신발을 벗고 뛰어들려다 멈춰 선다. 이번이 3번째다.
  ‘죽는 것도 마음대로 하기 힘드네.’ 하고 한탄할 때 누군가 비웃기 시작한다. 유겸은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난 곳을 응시한다. 고급 정장으로 착장한 고교 동창 ‘김학준’이 눈에 들어온다. 한때 가장 친했던 친구였다.
  “어디서 많이 봤다 해서 따라와 봤는데... 여기서 아주 재미난 짓거리를 하고 있구나, 너?”
  유겸은 치부를 들킨 듯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대꾸 없이 신발을 챙겨 돌아서려던 그때 학준이 그를 불러 세운다.
  “인생을 바꾸고 싶지 않아? 아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야. 네가 환경, 돈 문제에 연연하지 않고 직진만 펼쳐진 시작점 말이야.”
   “난 네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오랜만에 봐서 반갑긴 한데... 오늘 본 일은 잊어주라.”
  유겸은 퉁명스럽게 대꾸한 뒤 뒤돌아서서 걸어가려 한다. 그러나 학준은 끈질기게 물고 늘어선다. 그는 유겸의 앞을 가로막곤 손에 명함을 쥐여준다.
  “너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서 그래. 거기 적힌 곳으로 가봐. 이런 기회는 쉽게 안 와. 잘 생각해.”
  이 말과 함께 학준은 손을 흔들며 떠난다. 유겸은 명함을 뚫어져라 내려다본다. 그러다 흥미가 없어진 듯 명함을 대교 아래로 던진다. 그때 하늘 어디선가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온다. 유겸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자 폭죽이 펑- 하고 동시다발적으로 터지고 있다. 그는 환호하는 사람들과 대조적으로 말없이 바라볼 뿐이다.
  여러 주택가를 지나다 보면 언덕 중턱에 허름한 빌라가 있다. 5층짜리 빌라인 이곳은 오래된 듯 여기저기 넝쿨이 자라나있다. 유겸은 외롭게 선 가로등이 밝히는 빌라 주차장을 지나 현관으로 들어간다.
  “유겸 군 오셨어요?”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 엄마.”
  유겸은 신발을 벗으며 집안을 훑어본다. 18평 남짓 한 집이다. 거실엔 몸통이 통통한 오래된 티브이가, 부엌에는 테이프가 군데군데 붙은 식탁과 바닥이 보인다. 고개를 들어 벽을 보면 오래전에 찍은 듯, 어린 유겸과 그의 부모가 함께하고 있는 가족사진이 걸려있다.
  “아버지는?”
  “계모임 갔어. 밥은 먹었니?”
  “모임도 나가고 팔자 좋으셔. 다른 집 부모들은 자식 직장도 알아봐 주고 차도 해주고 한다는데?”
  유겸은 짜증 섞인 말과 함께 방문을 쾅- 닫으며 들어가 버린다. 난 왜 이렇게 꼬인 인생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책상에 놓인 책들을 바라본다. 철학, 토익, 경제학 등 여러 자기 계발서가 보인다. 한때 유겸의 앞날을 밝혀줄 거라 여겼던 것들이다. 하지만 세상은 노력만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내가 기어갈 때 누군가는 뛰어가고 있었고, 그들을 힘겹게 따라잡았다 싶으면 그들은 날고 있었다. 소위 말하는 금수저들이었다. 유겸도 그들처럼 좋은 환경에서 자라고 싶었다.
  불 꺼진 방. 유겸은 옷을 벗다가 호주머니에 무언가 잡힘이 느껴진다. 그것을 꺼내보자 자체 발광 중인 명함이 나온다. 그때 유겸의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이미지. 이것은 대교 위에서 학준에게 받았던 명함이었다. 분명 버렸는데 이것이 여기 왜? 명함에는 ‘이사 가는 날’이라는 상호와 함께 주소지가 적혀있었다.
  다음날. 유겸은 밤새 고민 끝에 주소지에 적힌 한 허름한 식당 앞에 당도했다. 학준이 했던 의미심장한 말과, 빛나는 명함에 묘한 끌림을 느낀 것이었다. 그러나 눈앞에 허름한 식당을 보고 있자니 여길 왜 왔을까? 하는 후회가 밀려든다. 발걸음을 돌리려던 그때, 끼익- 하고 식당 문이 열린다. 하얀 정장을 입은 거구의 사내가 나온다. 흑인처럼 느껴질 정도로 새까만 그는 ‘바울’이었다.
  식당 안으로 들어서자 각종 향과 커다란 불교식 그림이 벽에 걸려있다. 식당 운영은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유겸은 향냄새를 맡으며 코를 찡긋거린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유겸은 말없이 고기를 써는 바울을 쳐다본다.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할 수 있다던데... 타로나 점? 뭐 그런 건가요? 아... 그런 거라면 저 잘 못 찾아온 거 같습니다. 지금 나가도 되죠?”
  바울은 피식- 웃으며 고기를 썰던 칼을 들고 유겸에게 성큼 다가온다. 바울의 거대한 육체는 유겸에게 묘한 긴장감을 안겨다 준다. 갑자기 바울이 칼을 번쩍 들더니 유겸의 머리끝을 쳐낸다. 그 바람에 유겸은 털썩 주저앉아 버린다.
  “놀랬어? 머리 위에 파리가 있지 뭐야.”
  “이, 이봐요. 칼 가지고 장난치는 경우가...”
  화를 내려던 유겸은 눈앞의 광경에 말을 잇지 못한다. 바울이 천장에 걸린, 배가 갈려진 돼지 사체 안에 쥐를 던지자 새끼 고양이가 튀어나오는 것이었다.
  “... 마술을 보려고 온건 아닌데.”
  “기독교에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것이 있지만... 불교에선 윤회 사상이 있지. 다시 태어나는 것. 즉, 환생이지.”
  환생이라는 말에 유겸은 황당함을 느낀다. 학준이 말한 인생을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환생을 한다는 말이었던가?
  바울은 여러 부부 사진을 차례대로 테이블 위에 놓는다. 저마다 상류층이었다. 유겸은 사진들을 내려다본다.
  “내 소개를 하지. 난 환생 인도자야. 신이 비밀리에 보냈지. 믿든 말든 본인 의지겠지만... 어찌 됐든 네가 원한다면 여기 있는 부부의 자식으로 태어날 수 있게 돼.”
  “그래서 기왕 죽을 거라면 여기서 죽어서 환생을 해라? 김학준 이 새끼.”
  “대신 조건이 있지. 네가 할 수만 있다면야.”
  유겸은 바울로부터 시행해야 되는 것들을 전해 듣지만 수락하지 못한다.
2
  옆집에 사는 ‘이연주’는 인사성이 좋은 여자다. 그녀는 유겸을 볼 때마다 밝게 웃으며 긍정적인 말을 건네곤 한다.
  비가 오는 날. 유겸은 바울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우산을 챙기지 못했던 유겸이 비를 맞고 있었는데, 연주가 종이박스를 들고 비를 막아준다.
  “오늘도 면접 보고 오는 길이세요?”
  “아, 네. 연주 씨는 오늘 가게 일찍 마감했나 봐요?”
  “아뇨, 오늘 몸이 좀 안 좋긴 한데... 그래도 나가보려고요.”
  유겸은 그녀 또한 앞날이 보이지 않는데 왜 이리 악착같이 살아가는지 궁금해졌다. 그녀 또한 자신과 별다를 바 없는, 아니 더 좋지 않은 환경일 텐데.
  “연주 씨는... 하루하루가 즐거워요?”
  밝았던 그녀 얼굴에 잠시 어둠이 내려앉는다. 하지만 연주는 이내 빙긋 웃어 보인다. 작은 한숨과 함께 연주가 입을 뗀다.
  “아뇨. 하루하루가 괴로워요. 그래도... 지금 이 불행 어딘가 행복의 씨앗이 자라나고 있겠죠?”
  연주는 말을 마치곤 길가에 정차한 포터 트럭에 몸을 싣는다. 유겸은 어느새 빌라 현관에 들어와 트럭이 떠나는 것을 바라본다.
  집으로 들어오자 모두가 나간 듯 텅 비었다. 유겸은 가족사진을 보며 바울의 지령을 떠올린다. 그때 유겸의 전화기가 울린다.
  유겸이 집 밖으로 나가자 은색 스포츠카가 그를 반기고 있다. 운전석 창가에서 학준이 고개를 빼꼼히 내밀며 타라고 손짓한다. 유겸은 비를 손으로 막으며 조수석에 탑승한다. 은갈치 같은 스포츠카는 허름한 빌라를 쏜살같이 벗어난다.
  유겸은 신기한 듯 차량 내부를 이리저리 살펴본다. 그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 학준은 힐끔 유겸을 쳐다본다. 내부를 두리번거리던 유겸은 정면을 응시한다.
  “묻고 싶은 게 있어.”
  “뭔데?”
  “그럼 넌... 환생을 한 거지?”
  “그래. 지금 너보다 더하면 더했지. 최악이었어.”
  “후회 안 하냐?”
  학준은 대답 대신 크게 웃어버린다. 미친 듯이 웃어대던 그는 간신히 입을 뗀다.
  “후회? 넌 가난한 부모가 부모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거기다 무식하고 신체 유전자도 좋지 않고 돈도 없는 환경에서 자라면 한계가 있을 거라 생각 안 해? 난 나비가 되고 싶었지, 나방이 되고 싶진 않았어. 그저 그렇게 살기 싫었을 뿐이고, 그 와중에 기회가 와서 잡았을 뿐이야.”
  유겸은 반박하고 싶었지만 그의 한쪽 마음 구석에선 학준의 말에 동의하고 있었다. 그는 침묵을 지키며 창가에 맺힌 빗방울을 바라본다. 빗방울은 흩어졌다 뭉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유겸은 한 철학자의 ‘인생은 마주침의 연속이다’라는 말이 떠오른다. 내겐 또 다른 마주침이 필요한 것일까?
  집으로 돌아간 유겸은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를 듣게 된다. 아버지가 근무 중 입은 부상으로 더는 일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반강제적인 은퇴였다. 이 와중에 유겸은 가장이 돼버린 것이다. 그동안 가족의 지원 없이 자급자족하며 살아왔다. 그 덕에 파도처럼 밀려오는 학자금 대출과 카드빚에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난 앞으로 돈을 모을 수 있을까? 평생 부모를 부양하며 내 인생을 날려버리는 것은 아닐까?
  “유겸 군, 괜찮아. 아버지는 다시 일할 수 있어. 이 엄마도 있잖아.”
  “듣기 싫어. 내가 한두 살 먹은 애야? 사태 파악 정도도 못하냐고? 이렇게 날 힘들게 살게 할 거면 태어나지 말게 했어야지? 왜 난 당신한테서 태어난 거냐고?”
  “너 엄마한테 무슨 말버릇이야?”
  유겸의 아버지가 안방에서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나온다. 유겸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곤 입을 굳게 다문다.
  “여보는 들어가 있어. 내가 잘 타이를게.”
  그러나 유겸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문을 열고 나가버린다. 그때 유겸은 지체장애가 있는 아버지를 모시고 집으로 들어가는 연주와 마주친다. 그는 밝게 인사를 건네는 연주를 무시한 채 계단을 내려간다.
  유겸은 이사 가는 날 식당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간다. 식당 안에서 어울리지 않게 책을 보고 있는 바울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할게요. 환생. 그때 말한 지령을 다 수행하고 올 테니까... 날 다시 태어나게 해줘요.”
  바울은 말없이 계약서를 내민다. 유겸이 허겁지겁 서명하는 사이, 학준이 식당에 숨어 이 모습을 훔쳐보고 있다.
  “넌 죽고 싶은 거니? 아니면 다시 태어나고 싶은 거니?”
  “나도 몰라요. 그냥... 마음 바뀌기 전에 끝내자고요.”
  유겸이 말을 마친 뒤 식당 문을 열고 나간다. 그러자 슬며시 학준이 모습을 드러낸다. 바울은 앉은 채로 학준을 올려다본다.
  “네가 저 아이를 데리고 왔구나?”
  “그도 나처럼 기회를 얻을 수 있는 거잖아요.”
  “그때 네가 환생을 포기했다면... 어땠을 거 같니?”
  “글쎄요... 불행했겠죠?”
  “넌 행복의 기준이 환경과 돈이라고 생각하니?”
  학준은 바울을 보며 입꼬리를 슬며시 올린다.
  “수없이 많은 불행들이 소수의 행복을 만드는 법이죠. 난 그 소수가 된 것이고.”
  바울은 말없이 테이블에 놓인 어느 상류층 부부의 사진을 바라본다.
3
  유겸은 집에 부모가 없는 틈을 타 가족사진을 모조리 찾아낸다. 그리고 거침없이 사진 속에 자신을 오려낸다. 한번 망설이다 시작된 가위질은 멈추질 않았다.
  유겸은 오려진 사진들을 한데 모아 놀이터에서 불태운다. 이를 지나가던 연주가 발견하곤 유겸에게 다가온다. 연주는 놀란 표정을 짓는다.
  “유겸 씨... 설마.”
  유겸은 쭈그린 채 연주를 올려다본다. 그녀는 마치 무언가 안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유겸 씨, 그러지 마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
  “연주 씨도 이사 가는 날이라는 식당을 알아요?”
  “나도 오래전에 환생을 하려고 했으니까.”
  연주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사진에 붙은 불을 끄려 한다. 유겸은 그녀를 떼어놓으며 방해하지 말라고 소리친다.
  “인생을 다시 시작해보겠다는데, 당신이 무슨 참견이야?”
  “그렇게 살면 행복할 거 같아요? 수저, 수저, 거리는데 그렇게 금수저가 되고 싶어요?”
  “이거 안 놔?”
  “당신도 들었잖아. 환생할 때 마지막으로 필요한 게 뭔지. 그걸 하겠단 말이야?”
  유겸은 그녀의 말에 침묵을 지킨다. 그는 자리를 박차고 놀이터를 벗어난다.
  유겸은 식당에 들어가 바울을 다시 만난다. 불태워진 사진 조각들을 건네자 바울은 큰손을 펼쳐 받는다. 그리곤 두 손을 모아 방언처럼 기도를 하자 손바닥에서 사진이 하나 나온다. 얼마 전 선택했던 상류층 부부의 사진에 아기가 추가됐다.
  “이제 한 가지만 더하면 환생할 수 있겠구나. 할 수 있겠니?”
  “이제 와서 못할 게 뭐가 있어요.”
  바울은 보여줄 게 있다며 자신을 따라오라 말한다.
  바울을 따라간 곳은 어느 달동네였다. 이곳에서 무얼 보라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던 차에 바울이 손으로 어딘가 가리킨다. 유겸은 바울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고정시킨다. 그러자 리어카에 폐지를 실어 나르는 노부부가 보인다.
  “저분들을 보여주는 이유가 뭐죠?”
  “저 자들은 학준의 전 부모다.”
  유겸은 그들을 보며 자신의 부모가 저렇게 살게 되진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그래서... 저 모습을 보여주면서 환생을 만류하겠단 겁니까?”
  “너의 선택을 확실하게 하고자 함이지.”
  “내가 환생을 하지 않으면... 난 저 리어카를 뒤에서 미는 자식으로 살겠죠.”
  “오늘 밤이야. 오늘 밤까지 마지막 지령을 수행하고 와. 그럼 넌 몇 달 후에 다시 태어나게 될 테니까.”
  해가 진다. 유겸은 놀이터 벤치에 멍하게 앉아 있다가 몸을 일으킨다. 때가 된 것이다. 느릿느릿하던 발걸음이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한다.
  현관문 앞에 서자 집안에서 고기 굽는 소리가 들려온다. 슬며시 문을 열고 들어가자 유겸의 부모가 고기를 구우며 유겸을 반긴다. 어딘지 미안한 표정을 짓는 아버지가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연다.
  “유겸아. 가족끼리 고기 먹은 지도 오래됐네. 어서 여기 와서 앉아라.”
  유겸의 엄마는 들뜬 표정으로 고기를 구우며 앉으라고 재촉한다. 유겸은 마지못해 자리에 앉는다.
  고기를 한 점씩 먹지만 이것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알 수 없는 기분이다. 시간이 얼마 없다. 이것을 해내야 한다.
  “앞으로 종종 이런 기회 많이 만들어보자. 아비도 여러모로 알아보고 있으니까 너무 부담 갖진 말고.”
  유겸은 침묵을 지키다가 대뜸 흰 종이를 부모 앞에 내민다. 종이에는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았다.
  “유겸 군, 이게 뭐야?”
  “보험... 을 들어주려고 하는데... 사인이 필요해서.”
  “이야, 네가 무슨 돈이 있어서? 이러지 마라.”
  “아니에요. 저... 어디 다른 좋은 곳으로 가게 됐어요.”
  유겸의 부모는 활짝 웃으며 그를 안아준다. 축하한다는 그들의 말에, 그들이 하는 저 사인에 유겸은 죄책감을 느낀다.
  유겸은 식사를 마친 뒤 현관문을 열고 조용히 빠져나온다. 계단을 내려갈 때 누군가 앉아있는 모습이 보인다. 연주였다.
  “사인... 받았어요?”
  유겸은 말없이 흰 종이에 쓰인 부모의 사인을 들어 보인다. 연주는 지나쳐가려는 유겸의 옷깃을 붙잡는다.
  “이거 환생하기 전에 읽어봐요. 세상에 환생을 주관하는 신이 있다면... 행복을 주관하는 신도 있으니까. 이건... 그 행복을 주관하는 신이 당신에게 주는 편지에요.”
  유겸은 그녀가 건네는 편지를 받고는 빌라 현관을 빠져나간다.
4
  한밤중에 식당 안은 촛불로 은은하게 빛난다. 공중에는 번데기가 떠다니며 새로운 모습을 고대하고, 유겸은 새로운 인생을 고대한다.
  바울이 무언가 중얼거리며 땅바닥에 상류층 부부의 사진을 놓자 블랙홀처럼 땅이 쑥 꺼진다. 그것은 아득히 내려가는 절벽과도 같았다.
  “이곳 환생문으로 발을 딛고 빠져들면... 넌 이 부부의 자식으로 태어나. 그럼 세상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금수저가 되는 것이지. 좋은 유전자에, 좋은 환경, 그리고 없어지지 않을 재산과 명예. 이 모든 것을 누릴 수 있게 돼. 그렇지만 후회는 없는 것이겠지?”
  “... 그럼요.”
  유겸은 한 걸음씩 환생문으로 발을 뗀다. 하지만 바울이 재차 건넨 말에 유겸은 발걸음을 멈춘다.
  “그 흰 종이. 아무것도 안 적혔다고 여겼겠지만 부모 눈엔 보이게 돼있어. 그 종이엔 마법이 깃들어서 모든 상황을 이해하게 만들어주지. 네가 환생하는 것도.”
  유겸은 머리에 망치를 맞은 듯 충격을 받는다. 이 상황을 부모가 알고 있다? 알고도 이것을 승낙해줬다고? 유겸은 주저앉고 만다.
  “행복의 신이라고 했던가? 그걸 펼쳐서 읽어봐. 그게 마지막 시험이 될 테니까.”
  유겸은 연주가 전해줬던 편지를 펼쳐서 읽어본다. 어딘지 낯익은 느낌이 들었다. 엄마였다. 글은 급하게 쓴 듯 엉망에다가 짧았다.
  유겸 군, 아니 유겸아. 못난 우리들 앞에 태어난 그 순간이 잊히질 않아. 우린 최선을 다했지만 널 행복하게 해줄 수 없었구나. 부디 새로운 곳에선 네가 하고 싶었던 것들 맘껏 펼치길 기도할게. 사랑해. 그동안 우리와 함께 해줘서 고마웠어.
  유겸은 흐느끼기 시작한다. 바울은 환생문이 곧 닫히겠다며 서두르라고 재촉한다.
  “마음을 다 잡았는데, 이런 걸 알려주는 이유가 뭡니까?”
  “인간들은 자기가 처한 상황을 부모 탓으로만 여기지. 그놈의 수저, 수저. 너희들이 자신을 흙 수저라고 할 때 부모도 그걸 다 알아.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최선을 다할 뿐이지.”
  “당신은 그냥 환생만 시켜주면 되잖아. 왜 이런 짓까지 하는 건데?”
  “난 환생의 기회를 주기도 하지만, 그보단 깨달음을 주는 자이기도 하지. 내 이름이 바울인 이유도 그렇고.”
  “사도 바울...”
  환생문이 닫혀버린다. 유겸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바울을 쳐다본다. 바울은 품에서 통장을 꺼내든다.
  “환생을 포기했으니... 너에게 선물을 주마. 대신 두 가지 중에 선택을 해야 돼. 여기 이손에 든 통장, 그리고 네가 환생을 택했다는 진실을 알게 된 부모의 기억 삭제.”
  유겸은 고심 끝에 무언가를 택한다. 그러자 바울은 탁월한 선택이라며 유겸을 추켜세운다.
  어느새 새벽이다. 유겸은 새벽닭이 우는 밤공기를 마시며 빌라로 향한다. 놀이터에 꾸벅꾸벅 졸고 있는 연주가 보인다. 유겸은 슬며시 그녀에게 다가가 툭하고 건드린다. 연주는 침을 닦다가 당황하며 얼굴을 가린다. 그러나 이내 유겸이 멀쩡히 돌아온 모습에 미소 짓는다.
  “환생을 포기했군요?”
  “뭐, 수저의 종류가 달라도... 밥은 다 먹는 거 아니겠어요?”
  둘은 마주 보며 크게 웃는다. 그러다 연주가 출근할 때 타는 트럭이 이들 앞에 정차한다. 연주가 차에 올라타며 유겸에게 말을 건넨다.
  “언제 한 번 밥이나 먹어요. 진정한 의미의 다시 태어난 사람끼리.”
  트럭은 유유히 유겸을 남겨놓고 떠난다.
  유겸은 그날 밤, 가족들과 집에서 저녁을 함께 한다. 소박하지만 이 안에서 생각만 바꾼다면 충분히 행복해지리라는 확신이 가득 찬다. 마침, 뉴스 시간이 다가온다. 티브이에서 낯익은 이름이 보인다.
  속보입니다. G사 그룹의 차남인 김학준 씨가 오늘 오후 4시경, 상습 마약 투약 및 자살시도로 긴급 체포됐습니다. 체포 당시 김학준 씨는 약에 취해 부모가 보고 싶다는 이상 행동을.....
  유겸은 티브이를 꺼버린다. 씩 웃으며 수저를 들자 수저가 나무로 돼있음을 보게 된다.
  “난 비싼 수저보다 이런 나무 재질이 더 좋은 거 같아. 밥맛이 좋잖아?”
  “그래도 비싼 수저가 더 좋지 않겠냐?”
  “우리... 열심히 살아서 꼭 이사 가요. 두 분 다 그때까지 건강하시고.”
  창밖에서 누군가의 시선이 이들을 보다가 점점 멀어져 간다. 빌라 위로 폭죽이 터지기 시작한다. 어두운 밤하늘에 그려지는 빛의 향연. 허름한 빌라를 밝게 비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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