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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 서거에 분사하신, 고태곤 어르신 일대기
게시물ID : sisa_113123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둥글이8
추천 : 12
조회수 : 1246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9/05/17 11:10:35

[나에게는 노무현 대통령 서거일 마다 늘 함께 떠올려지는 얼굴이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을 보고 분사하셨던 우리 동네 할아버지이다. 노무현 대통령 만큼이나 파란만장한 역경의 삶을 살아오신 분이기에 후대들이 꼭 기억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다시 옮겨 본다.]

2009년 노무현 대통령 서거당시, 그 소식에 분사하여 돌아가신 분이 계신다. 그분은 군산 사시는 고태곤 어르신이셨다. 이 사건은 언론에 짤막히 소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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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어르신의 마지막이 언론에 이렇게 볼품없이 묘사되었음은, 중요한 것과 보잘 것 없는 것을 가릴 능력이 안 되는 시대의 특성이리라. 하여 오늘 낮에 어르신이 운영하던 책방에 들렸다가 잊혀져가는 어르신을 기려야할 필요를 절감해 장문의 글을 정리한다. 노무현의 죽음이 이 어르신의 죽음으로 이어진 기막힌 운명의 고리는 한편으로 우리 현대사의 비극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내가 이 어른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십 수년 전, 군산 구역전 사거리에서 피켓을 들고 있을 때였다. 여름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새만금 사업 규탄하는 피켓을 들고 땡볕 내리 꽂는 번화가 사거리 모서리에 서 있었다. 군산이라는 동네는 새만금의 마법이 걸린 지역이고 5천명의 시민이 구역전에 모여 ‘새만금관제데모’까지 했던 터, 당시 그런 피켓을 들고 있으려면 갖은 수모를 감수해야 했다.

그 얼마 전에도 술취한 아저씨가 “니가 뭔데 반대해”라며 달려들어 피켓을 뺏으려 하며 폭력을 휘둘러 곤욕을 치렀었고, 이날 역시 지나던 택시기사가 창 너머로 “후레자식, ㄱ ㅅ끼” 등도 연발했었다. 새만금 반대 순례를 하던 문정현 신부님 등과 수녀님들을 향해 전북도청에서 운영하는 행정깡패들이 젓갈 폭탄을 던지며 “ㅆㅂ년 ㄱㅅ끼”’를 연발한 사건도 있었고, 새만금 자전거 평화순례단 단장은 그 행정깡패가 휘두르는 쇠꼬챙이에 눈이 찢어지기도 했다. 그럴 정도로 새만금 사업이라는 마약에 취해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고 개발이권세력에 미래가 발목잡힌 곳이 바로 전북 - 군산이었다.

하여간 거리에서 피켓 들고 있는 것이 쑥스럽기도 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총이 따갑기도 해서 피켓을 메고 잔뜩 주눅이 들어 있었는데, 어르신이 한분 다가오신다. 고개 돌려 봤더니 칠순이 넘으신 어르신이 비닐봉투에 먹을 것과 음료수를 넣어 가지고 오시는 것 아닌가. 점쟎은 어르신은 ]얼마나 고생이 많냐?]고 나를 격려하시며 봉지를 건네시는데, 적진 한가운데서 시달림 받던 나는 여간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어르신이 단순히 나에게 먹을 것을 건내서가 아니라, 이렇게 정치, 행정, 언론, 여론이 새만금 광풍에 미쳐 돌아가는 현실에서 그 광기에 휩쓸리지 않고 자기만의 판단 기준을 가지고 있는 어른이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큰 힘이었기 때문이다.

하여간 그 얼마 후 어르신에 대한 좋은 기억을 머리에 담고 상가를 돌며 전단지를 뿌리던 터 나운동 유원아파트 앞의 책방에서 어르신과 다시 조우했다. 어르신이 따님과 함께 운영하는 글방였다. 인연이 있는 듯 해 차를 얻어 마시며 앉아서 이야기를 들으니 어르신은 ‘무공수훈자지회’라는 단체에 소속되신 분이셨다. 하지만 그런 흔히 말하는 애국보수단체에 소속된 분들과는 확연히 다른 기품을 느낄수 있었다.

여느 보수단체에 소속된 이들은 ‘무턱대고 개발사업 찬성하고, 관에서 추진하는 사업은 무조건 오케이’이다. ‘국가가 하는 것은 잔말 말고 따라야 한다.’가 그들 '애국단체'의 모토였다. 이런 집단의식으로 스스로 고민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찾아 볼 수 없을 때가 많다. 이렇기에 정치인들은 이들 보수단체들을 동원해서 시민들 선동에 앞장서 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분은 기성세대의 문제를 꿰뚫어 보시고 이를 강력히 비판하시는 명철함이 있으셨다. 군산에서 진행되고 있던 ‘새만금 사업’과 ‘핵폐기장 사업’에 대해서 반기를 들면서 성토하셨을 뿐만 아니라, 종종 이외의 사회적 현안에 대해서 귀뜸해 드리면 아무런 편견이나 선입견, 권위의식 없이 골똘히 들으신 후에 '내가 간 잘 못 알았었네'하며 고개를 끄덕이며 수용하셨다. 마치 어린 학생 같은 수용력을 가지신 분이셨다. 나이들어 닮고 싶은 어른의 모습이셨다.

그 모습이 일순간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기에 나는 어르신의 인생이 궁금했고, 그 후로 종종 찾아뵈면서 그의 삶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리고 그 만남의 말미에 나는 어르신의 생이 인의를 아는 군자의 모습 그대로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한 강직한 인간의 인생을 관통한 처절한 투쟁사를 어찌 다 이 짧은 글에 담아 낼 수 있을 것인가.

어르신은 불의를 보면 견디지 못하고 정의가 아니면 행하지 않는 그런 분이셨다. 6.25 직전에 사병으로 입대하셨는데, 하사 한명이 저지르는 부조리에 문제를 제기하며 맞서다가 엉덩이 살이 파일 정도로 두들겨 맞고 창고 한쪽에 버려졌다고 한다. 워낙 초죽음이 되도록 맞았던 터라 아예 몸은 움직일 수 없는 지경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개죽음 당하는 것은 당시 일도 아녔다. 7,80년대까지 군대 내 구타에 의한 사망 등은 ‘군기확립’이라는 이유로 별다른 처벌도 않고 유야무야 되었던 실태로 봤을 때, 어르신이 그때 유명을 달리 했어도 하등 이상할 것 없었다. 당시 해방 직후. 남북의 이념 투쟁이 격화되면서, 단지 사상이 의심 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람을 파리 잡던 하던 흉흉한 정국이었기에 말해서 뭐하랴. 그를 살린 것은 그 후임병이었다고 한다. 어르신을 신망하던 후임병이 창고 뒤쪽에 쓰러져 있는 어르신께 고참들 몰래 밥을 가져다 먹여 살렸다고 한다. 그렇게 한 달 동안 창고 뒤쪽에 버려진 체로 있다가 살아나왔다고 한다.

이후 어르신은 계속 그렇게 있다가는 또 다른 시비로 맞아죽을 것 같아서, 살아남기 위해 소위 임관 시험을 준비하셨단다. 하지만 당시에는 책 살돈이 없어서 시간 날 때마다 헌책방을 오가면서 역사책을 읽고 외우면서 공부했다고 한다. 그리고 시험에 합격해서 기어이 소위 계급장을 달았다고 한다.

어르신을 괴롭혔던 그 하사는 어떻게 되었냐고? 소위계급장 달고 나타나니 그는 어르신 앞에서 제대로 서있지도 못하고 사시나무 떨듯 발발발 떨고 있었다고 한다. 계급이 깡패라고, 자기 계급으로 내리 눌러서 어르신을 쳐 죽이다시피 해서 창고 뒷 쪽에 버렸던 자이다. 그의 발상으로는 더 높은 계급 달고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어르신이 자신을 쳐 죽이는 것도 아무 문제꺼리가 되지 않기에 어르신의 소위 계급장을 본 순간 그의 혼령은 이미 지옥에 떨어졌던 듯하다. 하지만 어르신은 자신의 지위를 악용하는 이가 아녔기에 핏기 없이 떨고 있는 그에게 다가가 “인생 그렇게 살지 말아!”라는 한마디 말을 건네고 끝냈단다.

이후 6.25가 터지고 그는 최전선에서 사선을 넘나드는 임무를 수행 했단다. 그가 어떤 임무를 수행했는지는 다음 한 줄이면 드러난다. ‘백마고지 전투(6.25 중 가장 치열한 전투 중 하나)에서 수색중대장 임무를 맡았고 이로 인해 무공훈장을 두 개를 받았으며(1952.12.10일 무성화랑무공훈장, 1953.06.25 금성화랑무공훈장) 이승만이 직접 헬기타고 나타나서 훈장을 수여함.’ 이에 따라 어르신은 죽을 고비도 수없이 겪었다는데, 북한군이 스피커를 동원해서 ‘고태곤 너 이 새끼 목을 따버리겠어’라는 엄포를 할 정도였다니 과히 당시의 아찔함이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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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 개입 후에는 전세가 극도로 분리해 졌다는데 하루 종일 기관총을 쏘는 것으로도 모자라 밤새 쏘고 또 쏴도, 중공군이 시체를 밟고 끊임없이 밀려 내려오는 것은 그야말로 악몽이었다고 한다. 한번은 중공군 진지 근처에서 육박전 하는 중에 그 시체에 파묻혔는데, 중공군이 사망확인을 하려고 죽은 시체에 일일이 총검을 꽂고 다니는 중에 얼굴 옆에 단도가 꽂히는 아찔한 경험까지 하셨단다. 하여간 그 후 중공군 총알의 과녁이 되지 않기 위해서 낮에는 썩어가는 시체 분비물과 냄새 속에서 7월의 땡볕을 버텼고, 밤 역시 그들의 눈에 띄지 않게 천천히 몸을 굴려서 시체더미를 뚫고 3일 만에 아군 진지로 돌아왔다고 한다.

이러한 괴로운 기억 때문에 따님 이야기에 의하면, 책방 의자에 앉아서 졸던 할아버지는 가끔 ‘위생병 위생병’하고 잠꼬대를 하다 깨어나고, 해마디 6월이 되면 ‘포성 때문에 귀가 아파서 잘 수 없다.’며 배란다에 나와서 뜬눈으로 새우시곤 했다고 한다.

자. 그런데 이런 얘기로 끝날라 치면 어르신 얘기를 아예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625전쟁의 무용담은 '독립군 잡아 죽이던 <간도특설대>장교를 하다가 해방 후 빨갱이 잡아 죽이는 구국의 영웅'이 된 백선엽 장군이나 박정희 등의 이야기에 무수히 회자되었기 때문이다.

어르신의 강직한 성품에 의해 만들어지는 남다른 이야기가 지금부터 시작된다. 6.25직후부터 어르신이 군생활을 했던 10년의 시간 동안 군 조직은 그야말로 ‘부정부패의 박물관’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일 예로 대한민국 국군의 최악의 방산비리 사건으로 일컬어지는 ‘국민방위군 사건’을 들 수 있는데, 이는 6.25기간 동안 국방부 고위 장교들이 군수물자를 빼돌려서 10만명의 국군이 아사한 사건이다. 적은 내부에 있다는 말이 딱 맞는 사건이었다. 이에 대한 책임으로 국민방위군 사령관과 부사령관 등 관련자 5명이 사형을 당하기는 했지만, ‘10만명’이 몰살당했으니 책임을 물어 조치한 사건이지, 어지러운 전쟁기간 내에 이런 사건이 얼마나 많이 빚어지고 은폐되었겠는가.

이 때문에 당시에는 늘 물자가 부족했고 결핍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리고 이 결핍을 보충할 수 있었던 가장 효과적이고 직접적인 방법은 다른 중대, 다른 대대로부터의 도둑질이었다고 한다. 90년 중반에 군생활 했던 나도 고참들로부터 ‘도둑질’을 장려 받았을 정도였기에 50년대 상황은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물품 부족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장교들은 그 부족한 물품을 빼돌려 시장에 팔아먹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장교들은 사병들을 자신의 종부리 듯 사역에 동원했고, 산의 나무를 잘라 팔아먹기 위해 물길을 막고 숲을 깍아 냈다고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끊이지 않고 터지는 군납비리는 그때부터 그렇게 차분히 기반이 다져지고 있었던 것이다.

자. 이러한 부조리의 한 가운데 던져진, 정의에 불타는 젊은이 고태곤. 불의를 참지 못하는 강직한 성격의 어르신은 이런 문제가 보일 때마다 문제를 제기했다고 한다. 말로 해서 개선될 일이 아니고 부조리는 싸이고 싸였고, 급기야 자기 상급자인 모 대령에게 총까지 꺼내들며 항명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 결국 대위에서 중위로 강등까지 당했다고 한다. 백마고지 전투의 1등 공신으로 무공훈장 두 개를 차고 있는 어르신을 그렇게 강등시킬 수 있었던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이들 군조직이 기실 깡패조직보다 더 추악하게 의협의 사슬에 묶여 있기 때문에 이권이 맞물린 이들이 서로서로 뒤를 봐준 때문이다.

어르신은 당시의 힘겹던 군생활 압박의 가장 큰 특징으로 ‘함께 비리를 저지르지 않으면 버틸 수 없게 만드는 분위기’를 든다. 그도 그럴 것이 비리를 저지르는 간부와 장성들은 부하들이 해꼬질 할 수 없도록 공범자를 만들어야 한다. 공범이 되면 함께 비리의 결과물을 나누면서 점차 ‘비리가 밝혀질 위협’을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공범을 많이 만들면 만들 수록 안전해진다. 이런 식으로 관계가 물고 물리면 종국에는 군조직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비리 집단이 되는 것이다. 이렇다보니 퇴역하고 나서도 각종 이권에 개입해서 수천억의 국방비를 빼내다 걸리는 사건이 수시로 터지는 사건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들의 눈으로 군은 나라를 지키기 위한 조직이 아니라 이권의 샘일 뿐인 것이다. 이러한 질병이 다른 곳도 아닌 군에 광범위하고도 집요히 퍼져 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이렇게 어르신은 군조직이라는 것이 인의를 지킬 수 있는 장소가 아닐 뿐 아니라, 청렴하게 살려면 굶어죽어야 하고, 진급도 불가능한 현실에 통탄했다. 자신은 진정 나라와 겨레와 전우들을 위해서 목숨 받칠 각오로 군에 뛰어든 것인데, 군조직 자체가 ‘이권이 맞물린 부패한 조직들의 사슬’ 이상이 아님을 깨달았단다. 하여 10년의 군생활을 마무리하고 강등된 중사의 신분으로 50년대 말에 제대했다고 한다. 그 50년이 지난 2009년에도 해군의 군납비리를 폭로했던 김영수 소령이 해군 조직의 왕따를 당해 결국 퇴역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그런 터이기에 ‘장교라면 너도나도 한몫 챙기는 것이 관례인 50년대 군대의 분위기’를 어르신과 같은 강직한 인물이 어찌 견딜 수 있었겠는가.

어르신의 전역에 부하들은 부모를 잃은 듯이 아쉬워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어르신은 부인을 친정에 보내고 혼자 독신 생활하다시피 했었는데, 이는 함께 살면서 가족의 궁핍한 처지를 눈앞에 보면 마음이 약해져서 비리에 연류 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렇게 나라의 의를 홀로 구하려는 어르신의 마음이 부하 사랑의 마음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은 당연했는데, 그는 ‘굶주리는 우리 불쌍한 부하들 먹여 살려야 한다.’며 군에서 나오는 월급과 특별 포상금 같은 것을 몽땅 쏟아서 돼지잡고 쌀팔아 이들을 먹여 살렸다고 한다.

물품 빼돌려 팔아먹고, 개인 사업을 위해 병사를 사역에 동원하는 장교들 속에 그가 얼마나 부하들로부터 존경받은 인물이었는지는 예상할 수 있는 바와 같다. 하지만 어르신은 그렇게 퇴역했고, 부하들은 부모를 잃은 듯 슬퍼했다고 한다. 중공군이 홍수처럼 밀려오는, 사선을 넘나들던 백마고지 전투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당당히 맞섰던 그가, 군내 부정비리를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왔음은 결국 군조직이 ‘인의’를 갖춘 이가 발디딜만한 곳이 아님을 강변하는 것이다.

아마 그렇기 때문에도 나는 이 어르신과의 만남 후에 625와 월남전의 경험을 회상하며 군복을 입고 다니면서 ‘애국’을 떠벌리는 노인양반들을 더더욱 불신하게 되었다. 그들은 북한군과 중공군, 월남군을 적으로 규정해 도살 하고 현재는 생각이 다른 국민들을 '종북좌파'로 규정하여 폭력을 휘두를 지언정, 그들의 둔감한 정의감은 군대내 부조리를 전혀 인식도 못했고, 그 부조리에 타협했으며, 그 부조리에 저항하는 고태곤 어르신 같은 이를 학대했던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는 터져 나오는 전현직 육해군 장성들이 연류 된, 부정과 비리는 바로 그들 수준의 애국이 누적된 참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로 지금도 길거리에서 군복입고 ‘애국’을 강변하며 진보단체들을 ‘빨갱이’로 규탄하는 그들은 이렇게 명백히 눈에 보이는 부정과 국방부의 비리의 결과물에 함구한다. 아니 ‘함구’정도가 아닌 ‘공생’ 중인 현실이다. 일예로 재향군인회라는 단일 조직만 해도 해마다 국방부와 2천억의 수의계약을 치르고 그 와중에 각종 납품 비리사건이 터져나고 있다. 오죽했으면 재향군인회 내부 간부가 이 사실을 폭로했다.

자 이런 비리가 조직적으로 연류 되어 있기에 총을 쏘면 나가지가 않고, 방탄조끼는 구멍이 뚫리고, 수류탄이 터지지가 않고, 전차는 기동이 안 되며, 조잡한 어군탐지기가 장착된 ‘최신의 구조함’은 재난 현장에 출동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바로 이런 짓을 전 현직 군인들. 정부와 국정원의 지령을 받고 관제데모를 하고 다니는 보수단체들이 함께 기획, 실행, 동조 해온 것이다. 전직 해군참모총장들이 나란히 구속된 사건은 이 참상을 대변한다. 국가안보의 가장 해악을 주는 세력이 바로 전현직 군인들, 군조직이라고 하면 너무 심한 말일까?!

아니 별로 심한 말 같지는 않다. 그 둔감한 정의감, 결핍된 인의로 과거 50년 전에 그랬던 짓을 지금도 고스란히 하고 있는 것 같이, 앞으로 50년 100년이 지나도 군조직 내의 체질화된 부정과 비리의 관행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이 나라는 병들어 가는데, 그 병들어 가는 원인을 저들은 ‘방구뀐 놈이 성내는 식’으로 엉뚱한데 풀고 있다. 인의가 빠진 말뿐인 ‘애국’의 참상이다.

하여간 어르신은 군 제대 후에 면장시험을 합격해서 군생활 중에 부하들 아끼듯이 면민을 돌보셨다고 하는데, 새벽 네 시 반에 나가서 밤 12시에 돌아오시곤 하셨다고 그 따님은 기억한다. 어르신은 하루 종일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마을 곳곳을 순찰하며 살피셨다는데, 여느 가정집 부엌에 들어가 솥을 손으로 긁을 때 녹슨 때가 나오면 밥해 먹은 지 오래인 것을 판단해 구호 쌀을 몰래 실어다 놓고 가는게 일상이셨다고 한다. 당시 면장의 직분을 수행하면서도 관청의 고질적인 부패에 맞서 지역 주민들을 보살피셨다. 현재 군산에서 2천억대 하수관거 비리사업이 버젓이 진행되고 있음에도 오히려 그 비리사업에 연류된 일부 공무원들이 이를 밝히려는 시민을 악성민원으로 매도하고 있는 현실이다. 하물며 60년대부터 면장 생활하면서 관료들의 부패와 맞서신 어르신의 노고는 눈에 보이는 듯 하다. 그가 공직을 물러나기 직전인 1989. 06. 30 대통령 공로표창장을 받은 것은 그가 공직생활 중에 얼마나 치열하게 애민해왔는지를 드러내는 사례이다.

어르신은 시류에 흔들리지 않고 오직 사람 사랑하는 마음을 앞세워서 일을 하셨고, 그러다보니 그가 발디딘 모든 곳에서 그가 살아온 평생을 통해 수도 없는 싸움을 해 오셨다. 하지만, 그 ‘인의’의 기반에 세워진 강직한 의지는 그를 지치지 않고 나아가게 할 수 있었던 듯하다. 이것이 바로 여느 나이든 양반들과 달리 ‘새만금’과 ‘핵폐기장’ 등 거대국책사업 집단최면의 함정에 빠져들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고, 갖은 사회부조리에 대해 끊임없이 성토하실 수 있었던 힘이며, 피켓을 들고 있던 청년에게 음료수를 건네고 집으로 돌아와 그 딸에게 ‘젊은 청년이 땡볕에서 고생하고 있음’을 몇 번이나 안타까워하면서 한숨을 쉬게 할 수 있었던 따스함의 원천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어르신의 강직함은 결국 어르신을 비극으로 내밀고 있었다. 어르신은 이 부조리한 사회와 평생을 통해서 불화했지만 그 막바지의 사건은 노무현의 죽음이었다. 노무현은 한편으로 어르신 자신이었다. 아무리 성심을 쏟아도 변화하지 않는 군조직 앞에서 끊임없이 좌절했지만, 그 앞에서 쓰러지지 않고 꿋꿋이 나아가고 버텼던 그 자신을 어르신은 노무현의 모습을 통해 보셨을 것이다. 그런데 굳건한 성벽 같던 노무현은 수구세력들의 끊임없는 시비와 찝적거림에 결국 주변인들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던졌다.

노무현은 그렇게 주변인들의 과오까지 자신의 어깨에 짊어지고 떠났다. TV에서 그 충격적 소식을 접하며 어르신은 이 조악한 국가에 맺힌 그간의 한이 머리로 역류하는 것을 느끼셨을 것이다. 평생을 싸워왔지만, 하나도 바뀌지 않은 이 부조리한 세상이 원망스러웠을 것이다. 그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결국 어르신의 강직함은 그 순간 꺾이셨다. 더 이상 이 세태를 버틸 수 없으셨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에 애통해 하던 80대 노인이 TV를 보다 숨졌다.’는 초라한 몇줄 기사 속에 숨겨진 한 인간의 파란만장한 삶이다.

어르신이 평생을 싸워 오셨던 이 조악한 세상은 그의 사후에도 어르신의 이름을 욕되게 함을 멈추지 않았다. 노무현을 죽음으로 몰았던 이명박 정부는 ‘노무현대통령 사망에 노인 분사’라는 제목의 기사가 불러올 파국을 우려해서 장례식장에 경찰을 파견해 그 남겨진 가족들에게 ‘노무현 대통령 때문에 분사한 것이 아님’이라는 확인서를 받아 가려고 까지 했던 것이다. 이에 천국으로 향하던 어르신의 혼은 이 기가 찬 현실을 져버릴 수 없어 지금도 구천을 떠돌고 있을 줄도 모를 일이다.

그 누구보다 정의롭고 강직하되, 절절히 사람을 사랑하고 나라를 위해서 진실 되게 자신을 내던진 어르신. 어르신은 나서서 공을 취하지 않았고, 우연히 쥐어진 공도 아낌없이 주변에 나눈 탓에 사람들에게 전혀 알려진 바 없이, 오직 저 몇 줄의 기사 속의 ‘80대 노인’으로 흔적이 남을 뿐이다.

* 2016년 초에 이 글을 올리고 나서 어떤 분이 연락을 해오셨다. 본인의 아버지가 백마고지 전투에서 어떤 지휘관의 헌신적 보살핌 덕분에 죽지 않고 살아 남았고 그 분의 은덕을 늘 기리셨다는데, 그분이 바로 이 글의 주인공 고태곤 어르신이셨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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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님과 함께 운영하던 책방에서  고태곤 어르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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