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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나무귀신
게시물ID : panic_10040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냥이박사
추천 : 22
조회수 : 2343회
댓글수 : 10개
등록시간 : 2019/06/28 22: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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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가 사는 시골마을에 오래된 나무가 있다.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위치한 그 나무는 대략 500년 정도 됐을까? 긴 세월동안 많은 주름과 신령한 기운을 띄게 됐다. 가령 나무위에 올라가 놀던 꼬마들이 골절상을 입거나, 술에 취한 채 노상방뇨를 했던 이웃 아재들이 고환암에 걸려버린 일들 말이다.
   사소한 저주들이 하나둘 쌓이다보니 나무는 범접할 수 없는 존재, 인간보다 우위에 있는 것으로 취급됐다. 나 또한 나무가 두려웠다.
 

   우리 집은 사과와 벼를 재배했었는데 올해는 흉작이었다. 가뭄도 아니었고 태풍이 온 것도 아니었다. 뿌리, 그것은 오래된 나무의 길고 긴 뿌리였다.
   우리가 모르게 뿌리는 사과밭과 논 아래로 뻗어 있었던 것이다. 대지의 양분을 모두 나무에게 빼앗긴 사과와 벼는 힘 한번 못써보고 시들어버렸다.
   제로. 올해 우리가 거둔 수확량이라 할 수 있었다.
 

   며칠이 지난 어느 밤이었다.
 

   “에이, X. 그깟 나무가 사람보다 위대하다는 거야, 뭐야?”
 

   분개한 삼촌이 술에 취한 채 삽과 톱을 챙겨 나무로 향했다. 그러나 직접 몸통을 벨 용기는 없었던지 발걸음을 돌렸다. 대신 우리 밭으로 뻗은 뿌리를 잘라버렸다.
   그날, 삼촌이 집밖으로 나가는 것을 본 것은 나였다. 유일하게 말이다. 그때 삼촌을 말렸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매사 소심하고 용기가 없던 난 그러지 못했다.
 

   돼지우리 공중에 무언가 걸려있었다. 난 얼핏 그것을 본 듯 했는데 어른들은 어린 내게 무언가 감추려 했다. 어른들의 생각과 달리 난 그리 어리지 않았다. 삼촌이 목을 매 죽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삼촌의 시신을 처음 본 것도, 이전에 나무를 베러나가는 삼촌을 최초로 본 것도 나였으니까. 비록 두려움에 가족들에게 말하진 못했지만.
   그렇게 나와 가깝던 가족을 잃었다.
 

   그날이후 우리 가족에겐 알 수 없는 일들이 벌어졌다. 한밤중에 길을 걷던 할아버지가 새까만 무언가를 목격했고, 어머니는 개울 돌다리를 건너다 누군가 자신의 발을 잡아당겼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은 내게도 나타났다.
 

   대낮이었다. 가족 모두가 농사일을 지으러 나간 사이 집을 지키게 됐다. 난 마루에 누워 바닥에서 올라오는 한기를 느끼던 참이었다. 잠시 눈을 감고 있었는데 얼굴이 간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난 파리가 붙었다고 여기며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는데, 그것은 끈질겼다. 짜증이 몰려왔다. “에이씨.” 하는 말과 함께 눈을 떴다.
   나무로 된 천장. 분명 나무와 전등으로만 이루어져야 정상이었다. 적어도 내가 아는 상식에선 말이다. 하지만 저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천장을 새까맣게 매우는 무언가가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것은 나무 뿌리였다. 조금씩 움직이던 그것은 나를 향해 뻗어왔다.
   소스라치게 놀란 난 문을 박차고 집을 나갔다.
 

   “아빠, 아빠. 집에 이상한 게 있어.”
 

   난 가족들이 일하는 밭으로 뛰어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아빤 잠깐 고개를 갸웃거리다 내 손을 잡고 집으로 뛰어갔다. 난 가쁜 숨을 몰아쉬며 문을 벌컥 열었다. 그리고 손으로 천장을 가리켰다.
 

   “현호야, 천장에 뭐가 있다는 거냐?”
 

   아빠의 말은 어딘가 차가웠다. 난 억울했다. 그것은 분명 내 손이 가리키는 천장에 존재했기 때문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 말이다.
 

   그날 밤. 마을 깊은 산중에 기거하던 무당이 우리 집으로 찾아왔다. 난 이불을 덮고 잠든 척하며 대화를 엿들었다.
우리 가족에게 일어난 재앙이 무당에게 속속 전해졌다. 무당은 말없이 얘기를 듣더니 한 가지 방법이 있다고 했다. 그것은 가족 중에 어린 여자를 재물로 바치면 해결될 일이라는 것이었다. 죽으러 가는 것이 아닌 시집을 가는 것이라며.
   무당의 말이 나온 이후 누군가의 이름이 자주 오르내렸다. 내 여동생의 이름, 현정이 말이다. 난 날이 밝아오면 꼭 반대하리라 다짐하며 잠을 청했다.
 

   다음날. 여동생 현정이가 사라졌다. 증발했다고 해야 하나? 난 어젯밤 가족들이 잠든 현정을 재물로 바쳤음을 직감했다.
 

2
 

   며칠, 아니 한 달이 지났다. 우리 가족에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난 여동생을 희생해서 얻은 평화를 달갑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개울가에 앉아 돌을 던졌다. 내가 한심했다. 왜 진즉에 다 알면서도 말리지 못했을까? 일이 벌어지고 나서야 이렇게 후회하는 걸까? 난 아직 어렸지만 계속해서 반복되는 일에 신물이 났다.
 

   난 몸을 일으켜 납작한 돌을 던졌다. 돌은 두 번 첨벙 거리더니 가라앉아버렸다. 그 모습이 마치 더 나아가지 못하는 나와 같았다.
   그때였다. 내 뒤편으로 인기척이 들리더니 내 눈앞으로 돌 하나가 수차례, 아니 몇 십번이라 해야 하나? 물수제비가 수면 위를 첨벙거리며 나아갔다. 뒤돌아보자 한 사내가 서있었다. 딸꾹- 하는 소리와 함께 새빨간 얼굴이 보였다.
 

   “나이도 어린 녀석이... 땅 꺼지겠다, 이 자식아.”
 

   난 뭐라 대꾸할 말을 찾아보려했지만 마땅치 않았다. 침묵하고 있던 나를 물끄러미 보던 사내는 피식- 하고 웃더니 내 머리를 쥐어박았다.
 

   “, 왜 때려요?”
   “소문 듣고 왔다. 이 마을에 나무귀신의 저주를 받아 자식을 재물로 바친 미친 집이 있다던데... 그게 너네집이지?”
 

   난 갑작스럽다는 느낌을 받았다. 말문이 턱하고 막혔는데, 사내가 마저 말을 이어갔다. 그는 자신을 퇴마사라 밝히며 어른들에게 도움을 주겠다는 말을 전하라 했다. 자신은 마을회관에서 기다리겠다는 말도 덧붙이며 말이다.
 

   늦은 오후. 일을 마친 가족들이 집에 한데 모였다. 난 퇴마사를 만났다고 말하며 도움을 받자고 했다. 이제라도 여동생을 되찾아오자며 말이다.
   하지만 가족들은 마른 한숨만 푹푹 내쉴 뿐 누구도 동의하지 않았다. 구하자는 얘기는커녕 여동생은 좋은 곳으로 시집을 갔다고 했다. 난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날이 밝아오자 난 마을 회관으로 단신으로 걸어갔다. 가족 중에 나 혼자라도 나간다면 동의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개울 위에 놓인 돌다리를 건너려 했다. 이 다리를 건너야만 회관으로 당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걸음, 한 걸음, 발걸음을 뗄 때 어머니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무언가 발을 잡아당겼다는 말. 난 애써 태연한 척하며 걸었는데 무언가 발목을 감싸 쥐었다.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리자 얼마 전 천장에서 본 그것.
   뿌리가 내 발목을 감싸 쥐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난 겁에 질린 채 그것을 발에서 떼어내려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어린 나의 완력으론 역부족이었던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힘을 줄수록 그것은 나를 물가로 끌고 가는 것 같았다. 울상이 되어 울음을 터트리기 직전 누군가 나타나 뿌리를 부숴버렸다. 고개를 들자 퇴마사였다.
 

   “나이스 타이밍.”
 

   난 퇴마사의 도움으로 무사히 개울을 건널 수 있었다. 난 바닥에 주저앉은 채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퇴마사는 나를 내려다보더니 고개를 갸웃 거렸다.
 

   “근데... 혼자 왔니?”
 

   내가 그렇다고 말하자 퇴마사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 갑자기 실성한 듯 웃다가 이런, 제기랄.” 이라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난 시간이 걸려도 사례는 충분히 할 테니 도와달라고 했다.
 

   “이건 너 같은 겁보가 할 수 있는 게 아냐. 할 수 있겠어?”
 

   내가 할 수 있다고 자신감을 내비치자 퇴마사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는 오늘 밤, 내가 나무 몸통에 톱질을 할 수 있으면 돕겠다는 말을 남기고 회관으로 떠났다.
   난 할 수 있다고 대꾸했었지만 망설임이 앞섰다.
 

   집에 돌아오고 난 뒤 밤이 되지 않길 기도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벽에 걸린 시계는 째깍- 거리며 굴러갔다.
   마침내 해가 떨어졌다.
   난 어른들 몰래 창고에서 톱을 꺼내 들었다. 눈을 들어 저 멀리 우뚝 솟은 나무를 쳐다봤다. 그것은 달빛을 받아 푸르스름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여러 생각들이 오고갔다. 삼촌이 홀로 뿌리를 베러나가던 순간, 여동생을 재물로 바쳐야하는 회의에서 반대를 했어야 했는데, 하는 생각들 말이다. 하나같이 용기가 없어 일을 그르쳤다. 난 톱을 쥔 손에 힘을 꽉 주고 나무를 향해 걸어갔다.
 

   나무 앞에 섰다. 나무는 대략 20미터의 높이에 몸통이 어른 세 명을 합친 둘레였다. 나무껍질에는 무수히 난 상처가 보였는데 이 흔적을 남긴 이들은 모두 합당한 대가를 치렀으리라. 하지만 난, 여동생을 구해야했다.
   눈을 질끈 감고 나무에 갖다 댄 톱에 힘을 주려했다.
 

3
 

   누군가 내 손에 든 톱을 거칠게 뺏어 던졌다. 눈을 뜨고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퇴마사가 보였다. 무표정으로 날 쳐다보던 퇴마사는 이내 잇몸이 보일정도로 웃어보였다.
 

   “그만하면 됐다. 어지간한 사내놈보단 네가 낫겠다.”
 

   퇴마사는 오늘은 늦었으니 집에서 잠을 청하고 동이 트는 대로 나무 앞으로 나오라 했다.
   난 뜬 눈으로 밤을 샜다. 여동생을 구할 기회를 얻었지만 떨리는 가슴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무 앞. 퇴마사는 등에 짊어진 가방에 무언가 가득 담은 듯 어깨가 축 쳐진 인상이었다. 우린 조금 피곤했지만 눈빛만은 생기가 넘쳤다. 난 퇴마사의 안내를 받으며 산속으로 걸어갔다.
 

   한참을 걸어 올라갔을까? 숨에 부칠 때쯤 퇴마사가 걸음을 멈췄다. 손에 든 나침반 같은 물건을 품에 넣은 퇴마사는 이곳에서 여동생을 구해야된다고 했다.
   어떻게 구해야 되냐는 물음에 퇴마사는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뭘 어떡해? 싸워야지.”
 

   퇴마사는 가방을 내려놓고 가져온 물건을 하나 둘 꺼내들었다. 곧장 부적으로 묶은 동아줄을 나무에다 두르고, 바닥에는 매미 유충을 잔뜩 깔았다.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물까지 뿌려댔다.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묻자 퇴마사는 귀찮아하는 듯 했지만 답해줬다.
 

   “이건 부비트랩, 그리고 매미 유충은 나무뿌리의 양분을 먹어. 우리가 상대하는 게 나무니까 이해되지? , 이 물은... 사람으로 치면 바이러스를 유발하는 병균 같은 거야.”
 

   그렇게 우린 바위틈에 숨어 해가 지길 기다렸다. 퇴마사는 단검과 라이터를 건넸다. 자기가 도와달라고 할 때 그것을 사용해야한다며. 반드시.
 

   산속에 어둠이 내리깔렸다. 부엉이와 들개가 시끄럽게 울어댔다. 조용한 것보단 낫다는 생각을 하고 밤하늘을 보자 보름달이 보였다. 그것도 거대한.
 

   쉬익... 쉬익... ...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산중에 울던 동물들의 소리가 사라졌다. 마치 최상위 포식자가 나타나자 숨죽인 사냥감들처럼 말이다.
   그 소리는 마치 구렁이가 바닥을 기는 것 같기도 하고, 커다란 쇠가 바닥을 긁는 것 같기도 했다. 그 소리는 점점 커지더니 우리가 설치한 함정으로 다가왔다.
 

   잠시 동안 정적이 흘렀다. 그것은 소리 없이 바닥에서 솟아올랐다. 난 어렴풋이 그것이 나무귀신임을 알았다.
   그것은 뿌리에 둘러싸인 거대한 사람 형태였다. 난 신경을 곤두세우고 나무귀신의 얼굴을 집중해서 봤다. 어디선가 낯이 익었다.
   나무귀신은 얼마 전 여동생을 재물로 바쳐야한다던 무당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역시, 이 마을의 무당이 나무귀신이었군.”
 

   퇴마사는 칼을 손에 쥔 채 나갈 채비를 했다. 그는 내게 신호를 받으면 빨간 뿌리를 자르라고 했다. 그럼 여동생을 구할 수 있다면서 말이다. 퇴마사는 말을 마치고는 나무귀신을 향해 뛰쳐나갔다.
 

   퇴마사는 능숙한 몸놀림으로 뿌리를 칼처럼 날카롭게 만들어 공격하는 나무귀신의 공격을 요리조리 피했다. 그는 동아줄을 등진 채 나무를 유인한 뒤, 나무가 다가오자 몸을 잽싸게 피했다. 나무가 동아줄에 닿자 부적들이 연쇄적으로 폭발했다.
 

   쾅- - 하는 소리와 함께 나무귀신을 감싼 뿌리들이 터져나갔다. 그와 동시에 땅바닥... 아니 땅속이라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벌레들이 무언가 갉아먹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매미 유충들일 것이다.
 

   나무귀신의 움직임이 현저히 느려졌다. 퇴마사는 그 틈에 상당 부분의 뿌리를 베어내고 나무귀신의 본체를 공격하고 있었다. 넋 놓고 화려한 대결을 지켜보던 난 퇴마사의 외침에 정신이 들었다.
 

   “뭘 보고만 있어? 땅위로 솟아난 뿌리 중에 빨간 뿌리를 찾아.”
 

   정신을 차리고 땅을 보자 커다란 뿌리들이 솟아나 꿈틀대고 있었다. 난 눈을 돌려 빨간 뿌리를 찾기 시작했다.
 

4
 

   땅 위로 꿈틀거리는 빨간 무언가... 내가 찾던 뿌리가 보였다. 난 단검을 손에 쥔 채 뿌리를 향해 달려갔다. 그러나 다른 뿌리들이 날 가로막으며 공격하기 시작했다.
 

   “아저씨, 뿌리가 절 공격한다는 말은 없었잖아요?”
   “내가 말했잖아.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고.”
 

   난 뭔가 사기를 당한 기분이었지만 지체할 수 없었다. 퇴마사는 갈수록 힘이 빠져 가는데 비해 나무귀신은 점점 힘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난 항상 묻어가길 원했지, 이렇게 전면에 나서서 무언가를 해결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저 뿌리들 어딘가에 여동생이 있을 것이다. 내가 용기만 낸다면 구해낼 수 있는 문제다. 그렇게 머리로는 생각을 하고 있지만 몸이 움직여주지 않았다.
 

   푹- 하는 소리와 함께 퇴마사의 옆구리가 뿌리에 찔렸다. 빨간 선혈이 바닥에 흩뿌려졌다. 어린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 거대한 문제 같았다.
   망설이던 사이 뿌리가 내 손에 쥐여져있던 단검을 뺏어갔다. 설상가상이었다. 이제 내게 남은 것은 라이터뿐이었다.
 

   뿌리는 쓰러진 퇴마사를 향해 뻗쳐갔다. 퇴마사가 내게 무언가 소리를 질러댔지만 내 귀에는 희미하게 들릴 뿐이었다. 난 귀를 막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렇게 또다시 철저히 지켜만 보고 말았다. 어떻게 하면 용기를 낸단 말인가? 어떻게 하면 내 목소리를 낸단 말인가? 난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오빠.” 하고 여동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촉매제가 된 건지 모르겠지만 나도 모르게 몸을 일으켰다. 내 가슴속에 불꽃이 일렁이는 기분이 들었다. 품에서 라이터를 꺼냈다. 라이터에는 알 수 없는 문자들이 촘촘하게 쓰여 있었다.
   난 빨간 뿌리를 향해 달려 나갔다.
 

   뿌리들이 내 몸에 상처를 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내 목표는 단 하나, 빨간 뿌리였다. 퇴마사를 공격하던 나무귀신은 방향을 내게 틀었다.
 

   “그래, 바로 그거라고.” 하고 퇴마사가 나를 북돋아줬다.
 

   빨간 뿌리를 향해 불과 1미터를 앞뒀다. 어느새 나무귀신도 그 앞까지 다가왔다. 난 빨간 뿌리에 라이터를 갖다 대려다 방향을 틀었다. 나무귀신 본체로 말이다.
   칙- 하고 불을 켰다. 그러자 기다란 불꽃이 치솟더니 나무귀신에게로 옮겨 붙었다. 나무가 기괴한 소리를 내며 괴로워했다. 난 고개를 돌려 퇴마사를 봤다.
   그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반응이었다.
 

   “이젠 숨어들지 않을 거예요.”
 

   난 바닥에 떨어진 단검을 쥐고 빨간 뿌리를 갈랐다. 그리고 한참동안 난도질을 했다. 현정아, 현정아. 오빠가 미안해라는 말을 중얼거리며 칼질을 하다 보니 여동생의 모습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난 잠들어있는 여동생을 뿌리 속에서 끄집어냈다.
   뺨을 때리고, 흔들어보았다. 그러자 여동생은 초록빛의 물을 왈칵 쏟더니 눈을 떴다. 난 여동생을 힘껏 껴안았다.
 

   나무귀신이 땅속으로 기어들어갔다. 퇴마사는 일격을 가하려했지만 그러지 못하고 발라당 누워버렸다. 그는 구급차를 불러달라는 말과 함께 내일까지 나무를 베어야한다고 했다. 뿌리가 아닌 몸체를 말이다.
 

   동생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니 반가움과 우려가 반쯤 섞인 반응이 나왔다. 돌아와서 기쁘지만 저주가 두려웠던 것이다. 난 다음날, 혼자서라도 나무를 베겠다고 다짐하며 동생을 옆에 재운 채 뜬 눈으로 밤을 샜다.
 

   해가 떴다. 난 곧장 톱을 챙겨 나무로 향했다. 그리고 지체 없이 나무에 톱을 댄 채 썰기 시작했다. 서걱- 서걱- 하는 소리와 함께 부스러기가 흩날렸지만 어린 내 힘으론 역부족이었다. 꼬맹이가 톱질을 하기에는 나무 몸통이 너무나 컸다.
   잠시 후, 우리 가족이 우려 섞인 눈빛으로 내 뒤에 서있는 게 느껴졌다. 난 아랑곳하지 않고 톱질을 이어나갔다.
 

   그때였다. 여동생을 재물로 바쳐야한다던 무당이 나타났다. 그는 어딘가 불에 그슬린 듯한 인상이었다. 난 그가 나무귀신임을 이제는 안다.
 

   “뭣들 해? 이 자식이 하는 걸 당장 안 막고? 그리고 여자애가 왜 여기 있어? 자자, 다시 아이를 재물로 바치면 나무귀신께서 노여워하지 않으실 거야. 내 말을 믿어.”
 

   가족들은 나와 무당, 그리고 여동생을 번갈아 바라봤다. 난 가족들이 어떤 선택을 하든지 나무를 베어버릴 것이다. 비록 저주를 받는다할지라도 난 용기를 낼 것이다.
   지금 하는 일은 옮은 일이고, 충분히 용기를 낼 일이니까.
 

   그때였다. 가족 중에 어른들이 뒤에서 도끼를 꺼내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무당의 격한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무에 도끼질을 해댔다.
   무당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커다란 나무가 우지끈- 소리를 내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와 동시에 무당의 몸에 불이 붙었다. 그는 괴로워하며 마을 언덕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끝없이... 끝없이...
   우리 가족은 여동생을 둘러쌌다. 저마다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앞으론 침묵하거나 그릇된 선택을 하지 않겠다며 여동생을 안아줬다.
   난 뭔가 우쭐한 기분이 들었다. 베어진 나무 앞으로 탁 트여진 마을 전경이 보였다. 이전에 보지 못한 것을 새롭게 보게 됐다.
   난 그날 키가 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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