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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홈비디오
게시물ID : panic_10041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song
추천 : 8
조회수 : 1328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9/06/30 23: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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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지금 혼자 살아. 런던에서 가족과 함께 북적이며 살아가다가 갑자기 혼자 나와서 살려니까 적응하기까지 조금 힘들긴 했지만, 그래도 노력하고 있어. 그래도 가끔 외롭기는 하더라.

집 나온 지는 벌써 몇 년 정도 됐고, 연락하는 횟수도 최소화했어. 가족이 못되게 굴어서 그런 건 아니야, 항상 나한테 잘해주셨으니까. 가족도 날 사랑하고, 나도 내 가족을 사랑해. 그냥... 나 살기도 바빠서 연락할 필요성을 못 느낀 거야. '네 탓이 아니라 내가 이상한 거야'라는 표현 많이 쓰잖아? 나도 그래, 이건 정말 내가 문제였거든. 가족이 잘못한 건 없었지만, 같이 살면 살수록 내 목을 옥죄는 기분이 들었어.

그래서 현재 이렇게 된 거야. 최근에 집에 다녀오면서 예전에 찍었던 홈비디오 몇 개를 챙겨왔어. 가족이 너무 그립더라고. 그래서 아이스크림 한 사발 떠놓고 한 편 때리기로 했어.

시작은 평범했어. 북적이는 크리스마스 시기였지. 애들은 집안 곳곳을 뛰어다니고, 엄마랑 이모들은 저녁 준비를 하는 중이었어. 이때 크리스마스가 아직 기억나. 그때 난 딱히 할 것 없이 방에 있었거든. 아빠가 카메라를 들고 방마다 돌아다니면서 촬영했어. 2층으로 향하는 계단, 안방, 이모네가 머무르는 방, 내 자매들 방, 그리고 내 바...

영상 속에 내 방이 없었어. 내 방이었어야 하는 자리에는 벽이 있었어. 다른 비디오테이프를 틀었어. 나와 부모님이 본머스 해변으로 놀러 갔던 테이프였지. 엄마랑 물놀이 하던 게 희미하게 기억나는데, 영상 속에는 엄마 혼자만 물놀이 중인 거야. 덜컥 겁이 났어. 이번에는 내 생일을 촬영했던 테이프를 넣었어. 가족들이 '생일 축하합니다' 노래 부르는 장면으로 시작하더라. 카메라가 외삼촌들 어깨 사이로 줌인하더니 초가 꽂힌 채 손대지 않은 케이크와 비어있는 의자를 비추었어.

다음 테이프, 또 다음 테이프를 재생했어. 올턴타워 여행, 런던에서 보낸 시간, 테네리페섬 여행. 매번 영상이 재생됐지만, 어떤 영상에서도 나는 존재하지 않았어. 자꾸 겁나고 무서워진 나는 결국 집에 전화를 걸기로 했어. 지난 3년 사이에 대체 내가 빠진 일정이 뭐가 있는지 확인하려고. 전화를 걸고 신호음을 들었어...

하지만 없는 번호라고 나오더라.

컴퓨터로 가족 SNS를 검색했지만 아무 결과도 나오지 않았어. 내 가족이 존재했다는 증거가 하나도 나오지 않는 거야.

현실을 깨닫자 몸이 차갑게 굳는 게 느껴졌어. 내 집 근처로 지나가던 익숙한 전철 소리가 지난 며칠 동안 안 들렸다는 게 문득 생각났어. 도착해야 할 우편물은 일주일이 지났지만 아직 안 왔고. 벌써 일주일 째 내가 대화하거나 만난 사람이 없어. 내가 사는 곳, 왜,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 기억해내려고 했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어. 엄마 이름, 자매들 이름, 내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았어.

다만 한 가지, 이것만은 알겠더라.

난 잊혀졌고, 누구도 날 찾지 않는다는 사실을.

출처 https://m.blog.naver.com/iamsuekim/221503875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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