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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일랜드의 평화와 장 맥콘빌 살인사건의 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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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윤태식
추천 : 7
조회수 : 2317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9/07/08 14:3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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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일랜드의 평화와 장 맥콘빌 살인사건의 이면



   1972년, 북아일랜드 벨파스트.

  

   그녀의 이름은 장 맥콘빌, 38세의 장은 14명의 자녀를 낳았다. 그 중 넷은 일찍 세상을 떠났다. 남편 아서는 폐암으로 작년에 세상을 떠났다. 곰팡이 낀 축축한 주택에서 홀로 아이들을 키워야 하는 장에게 삶은 너무나 가혹하다.

   

   차디 찬 12월의 밤, 장은 힘든 하루를 보낸 후 목욕을 하고 있다. 현관문의 종이 울린다. 딸 헬렌이 동네 피시 앤 칩스 가게에서 저녁을 들고 돌아온 것이리라. 거실에 있던 아이가 문을 연다.


   하지만 문 밖에 서 있는 것은 헬렌이 아니었다.


   안면 마스크를 뒤집어 쓴 일단의 남녀와 낯 익은 이웃 몇이 장의 집에 들어왔다. 그들은 장에게 옷을 입고 내려와 밖에 있는 차에 타라고 말했다.


   “엄마 걱정은 하지마, 금방 돌아올게.”


   장은 자녀들을 뒤로한 채 차에 몸을 실었다.


   이 날 이후 장을 본 사람은 없었다.


   30년 후, 장 맨콕빌은 북아일랜드와 벨파스트를 집어삼킨 분쟁의 피해자임이 밝혀진다.


*


   1921년, 아일랜드는 영국으로 인해 북부의 아일랜드 자유국, 남부의 아일랜드 공화국으로 분단된다. 북아일랜드는 영국 정부의 통제 아래 있었고 아일랜드 공화국은 가톨릭 신자들이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1969년, 북아일랜드의 50%를 차지하던 가톨릭 신자들은 오랜 시간 영국의 개신교로 인해 좋은 일자리, 거주지, 공권력과 정치적 영향력에서 제도적 차별을 받았다. 이로 인해 염증을 느낀 많은 사람들은 더 나은 삶을 찾기 위해 아일랜드 공화국, 미국, 호주로 떠났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고향을 포기하고 떠날 준비가 된 것은 아니었다. 환멸에 찬 젊은 가톨릭 신자들은 상황을 바꾸고 싶어했고, 그들에게는 폭력만이 유일한 수단으로  보였다.


   이들은 영국의 개신교들을 북아일랜드에서 내보내고 하나 된 아일랜드를 만든다는 목표로 준 군사조직, 아일랜드 공화군국 임시파(Provisional Irish Republican Army 이하 IRA)를 세운다.


   1971년, 돌로러스, 마리안 프라이스 자매는 헌신적으로 공화주의를 지지하는 가족들의 영향으로 21세, 18세의 나이에 IRA에 가입한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게리 애덤스라는 청년도 IRA에 가입한다.


   이후 프라이스 자매는 IRA의 악명높은 폭탄 테러 캠페인에 참여한다. 게리 애덤스는 고등학교까지 밖에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특출난 머리로 자신의 손을 더럽히지 않은 채 IRA의 전략을 결정하는 수뇌부가 된다.


*


   30년 간 지속 된 분쟁동안 수 없이 발생한 IRA의 차량 폭탄 테러는 사람들에게 거리에서 주차 된 낯선 차만 봐도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차량 폭탄 테러는 IRA에게 두 가지 이점을 줬다. 첫 째, 강력한 다량의 폭탄을 목표 지점까지 쉽게 이동 할 수 있다. 둘 째, 폭탄을 숨기기에 알맞고 몇 시간이든 경찰의 관심을 끌지 않고 주차해둘 수 있다.


   1972년 7월 21일, IRA는 벨파스트 인근에 폭탄이 설치된 차량 20대를 준비했다. 타겟은 분주한 쇼핑 센터, 기차 승차장, 버스 정류장 그리고 상업 빌딩과 정부 청사. 불필요한 민간인의 희생을 피하기 위해 IRA는 오후에 당국에 연락해 폭탄 설치구역 인근에 있는 민간인을 대피시키라 경고했다. 하지만 당국은 너무나 많은 폭탄의 수에 당황하여 모든 사람을 대피시킬 수 없었다.


   오후 2시를 조금 넘은 시간. 20대의 차량이 순차적으로 폭파하기 시작한다.


   귀를 찢는 폭음과 함께 짐승같이 울부짖는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거리에 퍼진다. 10대를 포함한 사망 9명, 부상 130명. 북아일랜드가 피로 물들은 금요일이다.


   사건 이후, IRA는 후회와 불공평함을 느꼈다. 왜 분쟁의 피해자는 항상 영국인이 아닌 아일랜드인인가?


   IRA의 게리 애덤스와 프라이스 자매는 이 불균형을 맞추기 위해 새로운 계획을 세운다.


   1973년 3월 8일, 프라이스 자매와 IRA의 회원들은 영국 런던의 4가지 주요 시설(중앙형사재판소, 화이트홀 궁 인근 군 부대, 농림식품부, 런던 경시청)에 폭탄 차량을 준비한다. 화이트홀과 런던 경시청에 준비한 폭탄은 경찰 감시망에 걸리지만 나머지 두 폭탄은 계획대로 작동하고 250명의 부상자를 발생시킨다.


   같은 날, 프라이스 자매는 히스로 공항에서 경찰에게 체포당한다. 영국 정부는 국내에서 벌어진 끔찍한 범죄행위의 용의자인 자매에게 어느 때 보다 빠르게 20년형을 선고했다. 


   프라이스 자매는 자신들의 신병을 북아일랜드로 이감해주기를 요청하지만 거절당한다. 이에 자매는 단식으로 자신들의 의지를 나타냈다.


   몇 주에 이어지는 단식, 프라이스 자매의 건강은 급격하게 악화되어 가고 있었다. 두 자매가 정부 관할 구역에서 목숨을 잃으면 IRA의 보복과 북아일랜드의 공화주의자들에게 더 열정적이고 단합된 회원을 모을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기에 영국 정부의 근심은 커져만 갔다.


   하지만 영국 정부는 프라이스 자매를 이감하는 대신 강제로 음식을 먹이는 것으로 자신들의 의지를 보였다. 


   음식을 강제로 먹이기 위해 영국 정부는 저항하는 자매의 입에 나무조각을 넣어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한 후 튜브를 식도에 넣어 음식물을 쑤셔 넣었다. 이 과정에서 프라이스 자매의 치아는 부러지고 잇몸은 문드러졌다. 공포스럽고 고통에 몸 부림치다 고문이 끝나면 자매는 음식을 토해내고 관리인들은 과정을 반복했다.


   프라이스 자매는 이 식고문의 유일한 피해자가 아니었다. 이 방법은 수십년 전 있었던 서프러제트(20세기 초 영국에서 일어난 여성 참정권 운동과 운동가들을 가리키는 용어)들이 단신 투쟁을 할 때도 사용된 고문 방법이었다. 영국의 페미니스트들은 이 고문이 또 다시 같은 여성에게 쓰이는 것에 격분했고 식고문은 강간에 준하는 범죄라고 비난했다.


   프라이스 자매에게는 고통스럽지만 시간이 갈 수록 우세인 상황이었다.


   1975년, 계속되는 식고문과 자매의 극렬한 저항은 심각하게 망가진 자매의 건강 상태와 영국 정부의 북아일랜드 이감 결정으로 마무리 된다.


*


   영국 정부와 IRA의 피 비린내 나는 분쟁이 진행되는 동안, 장 맥콘빌의 자녀들은 아직 답을 찾고 있었다. 1972년 차디찬 12월의 어느 밤, 대체 어머니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90년대 말, 분쟁이 서서히 막바지에 이르며 IRA의 핵심 인물 몇몇이 미국의 보스턴 대학에서 진행되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인터뷰를 하게 됐다. 그 중 한 명은 돌로러스 프라이스. 다른 한 명은 IRA에서 게리 애덤스의 오른팔로 활동했던 브렌단 휴즈였다. 둘은 장에게 일어났던 일에 대해 비슷하게 증언했다.


   장이 실종되기 몇 주 전, IRA는 장이 영국군의 정보원이라는 첩보를 듣고 장의 집을 수색하던 중 주방에서 군용 라디오를 발견한다. 취조 끝에 장은 영국에 정보를 보내기 위해 라디오를 사용한 것을 고백한다. 장은 이따금 단순히 경보를 보내기 위해 라디오를 사용했다고 말했지만, 그 다음 주에 또 다른 군용 라디오를 가진 것을 들킨다.


   장에게는 불행하게도, IRA는 장을 반복적인 범죄자로 판단했고, 회의 끝에 그녀를 처형하기로 결정한다.


   IRA는 장의 시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에 대해서도 결정해야 했다. 수뇌부 중 하나인 이보르 벨은 다른 영국 쥐새끼들에게 경고를 주기 위해 벨파스트 거리 위에 유기할 것을 제안한다. 게리 애덤스는 10명의 자녀를 둔 미망인을 공개적으로 죽일 시 가톨릭 커뮤니티가 IRA에 반할 것이라 생각했다.


   게리는 대신 누구도 장의 죽음과 IRA의 연관성을 찾을 수 없도록 제거하길 제안한다.


   장은 계획대로 살해당한다. 돌로러스 프라이스는 이후 자신이 장의 처형 장소에 있었고 장의 머리에 총을 쏘고 새로 판 무덤에 묻었다고 증언했다.


   2003년, 마침내 장의 시체가 발견된다. 장의 자녀들은 어머니의 실종으로부터 31년이 지난 후에야 자신들의 어머니에게 안식을 찾아줄 수 있었다.


   IRA의 회원들이 장의 처형 명령을 지시했다고 증언한 게리 애덤스, 그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장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졌을까? 


   그 답은, ‘아니다’였다. 오히려 게리 애덤스는 평화의 상징으로 세상에 알려진다.


   1998년, 게리 애덤스는 당시 IRA의 테러 행위를 중지하는 협정인 성금요일 협정(벨파스트 협정)을 체결한 정당 Sinn Féin의 리더였다. 이 정전협정을 보답하기 위해 당시 영국의 총리였던 토니 블레어는 북아일랜드에 의회를 양도하고 다수의 북아일랜드 주민이 아일랜드 공화국과 통일하길 바란다면 영국은 막지 않을 것이라 약속한다.


   장 맥콘빌의 자녀들과 IRA의 전사들은 동의하지 않았지만, 협정 이후 게리 애덤스는 아일랜드와 영국에 평화를 불러온 상징이 됐다.


   장 맥콘빌의 자녀들에게 게리 애덤스는 어머니의 죽음을 책임지지 않고 도망간 범죄자였다. 이들은 정의를 위해 장기간에 걸친 캠페인을 벌인 끝에 2014년 4월 게리 애덤스를 법정 위에 세우는 데 성공하지만 그는 나흘만에 벗어나고 만다.


   수 많은 IRA 회원들, 브렌단 휴즈, 프라이스 자매는 IRA의 궁극적인 목표인 통일된 아일랜드를 포기한 게리 애덤스를 비난했다. 


   오늘 날까지 북아일랜드는 영국의 국토로 남아있다.


   게리 애덤스는 오늘 날 까지 결코 IRA에 가입한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 게리 애덤스가 없었다면 북아일랜드와 영국에 평화가 오지 않았을 수 있다. 그의 무죄는 평화를 위한 작은 대가라 볼 수도 있다. 하지만 IRA가 행한 폭력의 피해자인들에게 그 대가는 너무나 크다.


*


   이 글은 패트릭 래든 키프의 범죄 다큐멘터리 책 ‘Say Nothing: A True Story of Murder and Memory in Northern Ireland’ 과 여러 참고자료들을 기반으로 쓰였습니다.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으시면 아래의 내용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참고자료

  1. Say Nothing: A True Story of Murder and Memory in Northern Ireland
  2. 장 맥콘빌
  3. 아일랜드 공화군국 임시파(IRA)
  4. 돌로러스 프라이스
  5. 마리안 프라이스
  6. 게리 애덤스
  7. 피의 금요일 폭탄 테러
  8. 올드 베일리 폭탄 테러
  9. 브렌단 휴즈
  10. 성금요일 협정(벨파스트 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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