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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판타지]민족혼의 블랙홀 제36화 고대광실 아리아
게시물ID : readers_3409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HK.sy.HE
추천 : 1
조회수 : 400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9/08/27 04: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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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혼의 블랙홀 



제36화 개밥에 도토리, 고대광실 아리아


재선이 말했다.

“누님 말씀처럼, 만약 네가 우리 셋 중에서 고를 수 있다면, 나와 혼인해 다오.”

내가 대답했다.

“불초하고 여러 가지로 부족한 소녀를 어여삐 봐 주시어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혼인은 인륜지대사라 하여, 제 혼사에 대해 아버지께서 전적으로 결정하셨고, 돌아가신다 하여 그 약속이 깨지지 않습니다. 더구나 그 대상이 동생 분 되십니다. 죄송합니다. 부디 반가의 여식을 취하시어 후대에 길이 남길 명문가를 일구소서.” 

그 때, 운현궁 대문 밖으로 재은 현주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오라버니! 어머니가 부르십니다.”

나와 눈이 다시 마주쳤다.

“새언니! 아까는 언니가 너무 예뻐서 그만 어머니가 오라버니를 부르신다는 전갈을 잊어버렸어요. 다시 뵈오니 좋아요.”
라고 말하며 방긋 방긋 웃었다. 나 역시 재은 현주를 따라 미소를 지었다.

“명복 오라버니와 혼인해서 우리 집에 오시면, 저랑 바느질 같이 해요.”

재선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허술해 보이던 표정에 금이 갔다.

“...재은아, 그게 무슨 소리야?”

재은 현주는 순진무구한 얼굴에 티없이 맑은 미소를 지었다.

“응? 오라버니는 모르셨습니까? 명복이 오라버니가 태어날 때부터, 여기 새언니랑 혼인시키기로, 약조가 맺어져 있다는데요?”

순간, 재선이 비틀거렸다.

“...그럼 방금 누님께서 하신 말씀은 뭐지? 셋 중에 무얼 고른다고?”
재은 현주가 재잘댔다.

“오라버니께서 뒤따라 나간 다음에, 군주 언니가 엄청 웃으셨어요. ‘그 말을 곧이 듣는 재선이도 참으로 한심하구나!’라면서요. 그 다음엔 구당 형부랑 한바탕 싸움이 붙었어요. 저는 현부인 마님이 부부싸움 말리는 걸 구경하다가, 마침 어머니께서 부르신다는 게 생각나서 이리 나왔어요.”

잠시 내가 들은 말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기억을 더듬자, 나를 ‘우리 집 며느리가 될 예정’이라며 ‘셋 중 누굴 선택할 거냐’고 바람을 잡은 뒤, 현부인이 진실을 말하려 할 때마다 끼어들어 말을 막던 재영 군주의 모습이 생각났다. 혹시나 하는 희망을 품은 재선에게 현부인이 ‘양자는 정실 소생에 한한다.’는 사실을 말하자, 말이 너무 심하다며 짐짓 감싸고 돌던 장면도 떠올랐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단,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더니.’

방금 시누이의 숨겨진 악의를 목도한 기분이었다.

재선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지금, 누님께서 안채 여인들만 아는 혼약 정보를 이용해 날 놀려먹은 것이란 말인가?!”

내가 동의했다.

“...그런 듯 합니다.”



재선의 어깨가 축 쳐졌다.

“그럼 그렇지. 나 같은 천출에게 무슨 기회가 온다고. 아버지가 왕족이면 뭐 하나, 어머니가 천하다는 이유만으로 내겐 아무런 기회가 없는데.”


묵묵히 듣고 있던 성남이가 입을 열었다.


“저라도 운현궁에서 나오고 싶을 것 같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이리 쥐고 흔들려 들다니, 참으로 간특한 누님이십니다.”


자신을 이해해주는 듯한 발언에, 재선의 안색이 살짝 돌아왔다.


“그렇지? 누님께선 날 가장 미워하신다. 현부인 마님께서 누님을 복중에 수태하신 동안 내가 생겼고, 누님은 딸로 태어났는데, 뒤이어 내가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었거든.”


“그렇지만 이런 식으로 살살 약한 부분을 자극하며 현부인 마님의 꾸지람을 듣게 만들고, 그 자리에서 되려 걱정하는 척을 하다니요!”


“여인이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고, 누님께서는 자라면서 아들로 나지 아니한 것에 대한 한을 많이 품었어.”

서자와 얼자.
처지가 같기 때문인지 말이 잘 통하여, 금세 친해졌다.

“성남아, 여기 문 앞에서 이럴 게 아니라, 후일에 감고당으로 뫼시어 못한 말을 다 하거라.”

집에 가자고 독촉했다. 

“새언니! 저도 언니네 집에 같이 놀러 가도 되나요?”

재은 현주가 함초롬하니 웃었다.

“아버지께서 아프셔서...”

내가 말끝을 흐렸다. 애초에 ‘후일에 뫼시어라.’는 말은 ‘언젠가 다시 만나자.’는 뜻이었다. 즉, ‘특별한 일이 없으면 다시 볼 일이 없다.’는 의미이다.

“아아... 네. 참, 그랬죠.”

재은 현주가 시무룩해졌다. 큰 눈망울에 실망감이 가득했다. 마음이 바뀌었다. 나 역시 태어나서 처음 또래 동성 친구를 사귈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사랑채와 안채는 아버지 병 수발로 어수선하니, 성남이 모자가 머무는 행랑채에 잠시 들렀다 가시지요. 어떻습니까?”

내가 제안했다. ‘후일에’ 모시라고 말함으로써 상대방과 빨리 헤어지라는 인상을 남긴 것을 얼른 지웠다.

“재은아. 방금 어머니께서 나를 부르신다고 하지 않았느냐.”

재선이 함박웃음을 지었다가, 이내 급정색을 하고는, 큼, 큼 하고 헛기침을 하며 진중한 척 말했다. 아직까지도 살짝 창백했던 안색이 완전히 원래대로 돌아왔다.

“내 들어가서 어머니를 뵙고 허락을 받아 오겠다.”

☆ ★ ☆ ★ ☆ ★

쓰개치마를 둘렀다.

성남이가 나를 업었다.

재선은 재은 현주를 업고 같이 운현궁을 나섰다.


청계천을 건너 종로 한복판으로 접어들자, 이전과 같이 장사치들이 난전을 벌이고 있는 골목이 나왔다.

달라진 점이 있었다.


마당 크기의 공간을 확보하고,

판소리가 벌어지고 있었다.


"오라버니! 저거 꼭 보고 싶어요!"

재은 현주가 탄성을 질렀다.



자진모리 장단으로 판소리를 흥겹게 몰아가고 있었다.

“날이 새면 행악질
밤이 들면 도둑질을
평생에 일삼으니 

제 어미 붙을 놈이 
삼강을 아느냐 
오륜을 아느냐. 

굳기가 돌덩이요 
욕심이 족제비라 

네모진 소로로 
이마를 비벼도 
진물 한 점 안 나고 

대장의 불집게로 
불알을 꽉 집어도 
눈도 아니 깜짝인다.”

놀부 심보를 묘사하는 대목이었다.



집에 몇 편 없던 한글소설에서 흥부전을 읽은 기억이 새록새록 솟아났다. 내가 아는 누군가가 생각났다.


"성남아. 저거 꼭 보고 가자!"

나도 재은 현주를 따라 외쳤다. 성남이와 재선이 모두 발걸음을 멈추었다.

이어서 흥부 타령이 나오고 있었다.


"흥부 흥부 우리 흥부

세상에서 제일 착해.


마을 사람 누구라도

어려운 일 생길라 치면,


제일 먼저 달려 와서,

동네 호구 감수하고


홍반장이 되어 갖고

두 팔 걷고 도와 주니


인망이 하늘에 닿아라~"


타령하는 소리꾼이 길게 말꼬릴 늘이자,

고수가 북을 두드렸다.


"얼쑤!"


주변 구경꾼들이 장단을 맞추었다.

어쩐지 마음이 불편해졌다.


장단이 더욱 빨라졌다.
노랫소리가 휘몰아쳤다.

“흥부의 마음씨는 
저의 형과 아주 달라
 
부모에게 효도하고 
어른에게 존경하며 

이웃 간에 화목하고 
친구에게 신의 있어 

굶어 죽어 가는 사람 
먹던 밥을 덜어주고 

얼어서 병든 사람 
입었던 옷 벗어주기 

늙은이의 짊어진 짐 
자정하여 져다 주고

장마 때 큰 물가에 
삯 안 받고 건네주기

남의 집에 불이 나면 
세간 건져 지켜 주고
 
길에 보물이 빠졌으면 
지켜 섰다 임자 주기 

청산에서 백골 보면 
깊이 파고 묻어주며 
수절과부 보쌈하면 
쫓아가서 빼어 놓기 

어진 사람 모함하면 
화를 내며 적극 구명 

불쌍한 놈 재앙 닥쳐 
달려들어 구원하기 

길 잃은 어린아이 
바로 부모 찾아주고 

주막에서 병든 사람 
본가에 기별하기 

계칩불살 방장부절 
남의 일만 하느라고 
한 푼 돈도 못 버니 
놀부 오죽 미워하랴~~”

속이 울렁거리고 토할 것 같았다.
성남이가 아버지에게, 왜 그리 쓸데없이 남을 도우며 손해를 보고 사느냐며 따지던 장면이 다시금 떠올랐다.


“매번 남을 도왔지만,

마을 사람 가난하여

흥부에게 사례 못 해


흥부 역시 착해 빠져

값을 받을 생각 안 해


마을 사람 누구라도

흥부 도움 당연지사.”

흥부가 남에게 도움을 주는 것을 호의가 아닌, 권리로 받아들이는 마을 사람까지 생겼다고 한다.

”남의 일만 하느라고 한 푼 돈도 못 버니 놀부 오죽 미워하랴~“

어쩐지 놀부의 마음이 이해될 것만 같았다. 아버지는 아파 누워 계시고, 성남이의 과거 시험은 백척간두의 낭떠러지에 선, 우리 집안의 운명을 상기했다. 

그렇지만 놀부가 흥부를 빈손으로 쫓아내, 흥부가 부인과 자식을 데리고 산과 들과 바다를 떠돌며 유리걸식하게 만드는 지경에 이르자, 놀부 마음을 이해한다는 생각이 쏙 들어갔다.


이어지는 노래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내가 읽었던 판본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지 않았다.

흥부는 놀부에게서 쫓겨난 이후에도 금슬이 너무 좋아서, 마누라와의 사이에서 도합 25명의 자식을 둔다. 입힐 옷과 기저귀가 없어서, 자식 스물 다섯 명을 나이 순서대로 주욱 벗겨서 앉혀 놓고, 똥오줌을 쌀 때마다 치운다. 

“스물 다섯 되는 자식 
다른 사람 자식 낳듯
한 배에 하나씩 낳아 

3~4세 된 연후에 
낳고 낳고 했다면 

사십이 못다 되어 
그리 많이 낳겄느냐. 

한 해에 한 배씩 
한 배에 두셋씩 
낳고 낳아 놓았구나. 

그래도 아이들은 

칠칠 일이 지나면은 
안기도 하여보고 

백 일이 지나면은 
업기도 해보고 

첫 돌이 지나면 
손 잡고 걸어보고 

삼사 세가 되면 
의복 입고 다녔어야
 
다리에 골이 오르고 
몸이 활발할 터인데 

이 집 자식 기르는 법은 
멍석을 말 때에 

세 줄로 구멍을 내어 
한 줄에 열 구멍씩 

첫 구멍은 조그맣고 
차차 구멍이 커 간다. 

한 배에 낳은 자식 
둘이 되나 셋이 되나 

앉혀 보아 앉으면은 
첫 구멍에 목을 넣고 

하 루 몇 때씩을 
암죽만 떠 넣으면 

불쌍한 이것들이 
울어도 앉아 울고 

자도 앉아 자고 
똥오줌이 마려우면 
멍석 쓴 채 앉아 눈다. 

세상에 난 연후에 
실오라기 하나라도 
몸에 걸쳐 본 일 없고 

한 번도 문턱 밖에 
발 디뎌 본 일 없고 

다른 사람 얼굴 보아 
소리 들어본 일 없고 

그저 앉아 큰 것이라 
때묻은 여윈 낯이 
터럭이 거칠거칠. 

동지섣달 강아지가 
아궁에서 자고 난 듯 

멍석 쓴 채 밤새고 나면 
빼빼 마른 몸뚱이가 
대강이를 엮어 놓은 듯 
못 먹고 앉아 크니 

원 무르게 되어서 
큰 놈들은 스무 살 씩 
작은 놈들은 열칠팔 세,
 
남의 자식 같으면 
농사하네 나무하네 
한창들 벌이를 하련마는
 
원 늦되어서 부르는게 
어메 아비 음식 이름, 
아는 것 이 밥뿐이로구나. 

다른 음식 알려 한들 
세상에 난 연후에 
먹기는 고사하고 
보거나 듣거나 하였어야지. 

밥 갖다 줄 때가 
조금만 지나면 
자식들 그저 떼를 쓰며,

"어메 밥 어메 밥" 
하는 소리 
비 올 때 개굴개굴
개구리 소리도 같고 
석양천에 매암매암
매미 소리도 같고 

언제라도 밥 들고 들어가도록,
"어메 밥 어메 밥" 하는구나아아아~”

감정을 듬뿍 실어 가난 타령을 했다. 구경하느라 주욱 늘어선 사람들 사이에서 흑흑거리며 울음소리가 들렸다.

“울 자석도 돌을 못 넘기고 죽었어라.”

“번듯하게 먹이고 입혀서 과거 공부 시켰으면 사람 구실을 할 것인데...”

“돈이 웬수여. 아비가 능력이 없으니께 자식이 벌이 하도록 도와 주지도 못 허고, 공부도 못 시키고.”

“뭐라카노. 공부 시켜서 과거 보낼라문 요새는 거, 안동 김 씨한테 뇌물 싸 갖고 바쳐야 하는 기 아이가.”
“벼슬자리가 부르는 게 값이라 카던데. 안동 김 씨 일족이면 저기 나오는 흥부 자슥처럼 늦되어 ”어메 밥 어메 밥“거려도 과거에 합격시켜 준다던데. 벼슬 하고자프문, 돈을 내든가, 원래 친척이든가.” 

구경꾼들이 떠들든가 말든가, 창은 점차 절정을 향해 치달았다.

“밥을 하도 안 하니 
아궁이 풀을 뽑았으면 
한 마지기 모내기는
넉넉히 심었겠네.

그렁저렁 여러 해에 
자식은 더럭더럭 
풀풀이 생겨나고 
가난은 버쩍버쩍 
나날이 심해 가니 
흥부 식구 굶어내기 
초상난 집 개 같구나.”

“초상집 개”라는 노래를 듣자, 재선과 재은 현주가 몸을 떨었다.

흥부 마누라가 등장할 차례였다. 때마침 구성진 중모리를 읊고 있었다.

“흥보의 마누라가 견디다 못하여 가난 타령 섧게 울제,

가난이야~ 가난이야~ 
원수 년의 가난이야~

천만고에 있는 가난 
아무리 헤아려도 
내 위에는 다시없네. 

환도소연 불폐풍일 
도정절의 가난하기, 

내 집보단 대궐이요 
삼순구식 십년일관
정광문(鄭廣文)의 가난하기 
내게 대면 부자로세. 

어릉중자는 주렸으나   
오얏이나 얻어먹고 

소중랑은 굶을 적에 
방석 털을 삼켰으니 

오얏을 어디서 보며 
방석이 어디 있나. 

선산 잘못 써 이런가 
무덤이나 파자 하되 

종손이 말릴 테요 
귀신이 저희한가 

점이나 하자 한들 
쌀 한 줌이 없었으니 
복채를 낼 수 있나. 

애고애고 설운지고 
기한이 이러하니 
불고염치(不顧廉恥)가 저절로 되네.”

때마침, 누군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복채 필요 없으니, 소저 내게서 운수를 점쳐 가시겠소?”

-37화에서 계속-
출처 https://blog.naver.com/dankebitte/221629583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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