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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이 나온다는 수국저택 이야기
게시물ID : panic_10104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마포김사장
추천 : 25
조회수 : 4537회
댓글수 : 7개
등록시간 : 2019/12/26 17:4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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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우리 아버지는 늘 예의 바르고 
사람들과도 잘 어울리는 성격이지만 
기본적으로는 인간을 신뢰하지 않았다. 

은퇴 후에 살 집을 구할 때도 첫 번째 조건은
‘사람과 부딪치지 않을 한적한 곳’이었다. 
그런 아버지에게 솔깃한 제안이 들어왔다. 

“지은 지 10년쯤 됐는데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 있다. 
손질을 하면 충분히 기분 좋게 살 만하고 가격도 싸다. 
문제는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도 괜찮겠느냐”는 제안이었다.

아버지는 귀신 따위를 믿지 않았다. 
엄마에게 물어보니 “만일 나타난다면 
이야기 상대가 되어 줍시다”라며 
호탕하게 웃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두 분은, 
정원에 셀 수 없이 많은 수국이 흐드러지게 핀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수국 저택’으로 이사하게 된다. 

과연 듣던 대로 집이 넓어서 
짐을 정리하는 데만 꼬박 사흘이 걸렸다. 
바쁘게 지내는 동안은 귀신도 나타나지 않았다. 
열흘이 지나고 스무 날이 지나도 마찬가지였다. 
부모님은 싼 값에 좋은 집을 얻었다며 기뻐하셨다.

그런데 한 달쯤 지났을까. 
매일 청소와 손질을 하느라 저택의 일이라면 
자신의 손바닥처럼 훤히 알게 된 엄마가 
이상한 말을 하기 시작했다. 

무언가 자신의 모습을 살피고, 그늘에서 몰래 
이쪽을 훔쳐보고 있는 듯한 기척이 느껴진다는 거다. 
혹시 귀신이 아닐까 하는 엄마의 말에 아버지는, 
세상에 귀신이 어디 있냐며 크게 (비)웃었다고 한다.

그런 대화를 하고 며칠 후에 일이었다. 
갑자기 내린 소나기 때문에 엄마가 허둥지둥 빨래를 걷고 있는데, 
가끔 정원을 어슬렁거리던 고양이가 아버지 눈에 띄었다. 
여느 때와는 달리 꼬리를 바짝 치켜세운 모습이었다. 

고양이는 툇마루 안쪽의 장지 그늘을 향해 
위협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 머리 위에서 번개가 번쩍 빛을 발했다. 
그 순간, 아버지는 보았다. 
갑작스러운 번갯불 밑에서, 
장지 뒤에 숨어 있는 무언가를.

그것은 새카만 어둠 덩어리였다. 
이어서 울린 천둥소리에 
그 어둠 덩어리는 놀란 듯 
펄쩍 뛰어오르다시피 툇마루 위로 달아났다. 

마침 엄마가 양팔 가득 빨래를 걷고 
툇마루로 올라가려고 하자, 
아버지는 허둥지둥 엄마를 붙들며 말했다. 
“올라가지 말아요.” 

왜 그러냐고 묻자 아버지는 대답했다. 
방금 귀신 같은 게 나타나서 툇마루 위로 올라갔다고. 
열 살 난 어린아이 정도 크기의 어둠덩어리였다고. 

그러자 이번에는 엄마가 깔깔거리며 아버지를 놀렸다. 
“세상에 귀신이 없다고 한 건 당신이었잖아요”. 
아버지는 그제야 아뿔싸 하고 
섣불리 말을 내뱉은 걸 후회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분명히 보았다. 
어둠덩어리 귀신을. 
다소 위험해 보이는 존재가 이 저택에 살고 있다는 걸 
엄마에게도 인지시켜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수고를 들일 필요도 없었다. 
엄마 쪽에서 먼저 이야기를 꺼냈기 때문이다. 
“나도 봤어요”라면서.
 
엄마가 부엌에서 요리를 하고 있는데 
‘그것’이 자기 뒤에 있던 마늘 절구통을 몰래 들여다보다가 
엄마가 갑자기 뒤돌아보자 
당황한 나머지 양념절구를 뒤집어쓰고 말았다고.

머리부터 양념장을 뒤집어 쓴 채로 허둥거리며 달아났는데 
그 모습이 몽글몽글이라고 할까 스륵스륵이라고 할까 
매우 귀여웠다고 한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한동안 귀를 기울이고 있자니 
구석에서 가느다란 울음소리가 들려오더란다. 
가려워서 괴로워하는 소리였다. 

엄마는 ‘그것’에게 다가가, 
“쯧쯧, 함부로 장난을 치다가 벌을 받은 거야. 
내가 식초 물을 만들어 줄 테니 그 물로 씻으렴” 
하고 마치 어린아이를 혼내듯이 엄한 얼굴로 타일렀다. 
그러자 ‘그것’은 풀 죽은 모습으로 
식초 물을 찰박찰박 튀기며 씻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한다.

이 귀여운 소동은 어디까지나 엄마 혼자 겪은 일이었다. 
따라서 엄마가 아무리 그 존재가 위험하지 않다고, 
그저 어린아이 같은 것이라고 설명해도 
아버지는 믿으려 하지 않았다. 

더구나 시커먼 생물은 식초 물로 가려움을 없애준 은혜를 아는지, 
엄마가 혼자 있으면 가까이 다가왔다가도 
아버지가 나타나면 허둥지둥 도망쳐 버렸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아버지는, 
엄마가 요물에게 열중하는 까닭이 
아들이나 손자들과 떨어져 사는 적적함 때문이 아닐까 
하고 걱정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후, 엄마의 말이 옳았다고, 
마침내 아버지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일이 생겼다. 
감기에 걸려 앓아누운 일이 계기였다. 

감기에 걸린 아버지는 며칠 동안 계속 높은 열이 지속되었고 
의사를 불러 약을 받았지만 전혀 효과가 없었다. 
엄마의 불안은 극에 달했다. 
평소에 건강한 사람일수록 몽둥이가 부러지듯 
덜컥 죽을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엄마가 불온한 생각을 하며 
부엌에서 혼자 눈물로 소매를 적시고 있는데, 
어느 순간 시커먼 생물이 나타났다고 한다. 

‘그것’은 마치 울고 있는 엄마를 달래주려는 
다정한 몸짓을 해보였다. 
그때 엄마가 말했다. 

“너처럼 이 세상의 이치에 벗어난 생물을 
우리 남편은 인정하지 않는단다.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직접 눈으로 보면 놀라고, 
대체 어찌 된 까닭으로 태어났는지 궁금해서라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거야.”

엄마의 애원이 시커먼 생물에게도 통했던 모양이다. 
‘그것’은 엄마를 따라 아버지 앞에 모습을 보였다. 
그러고는 아버지의 머리맡에서 한시도 떠나지 않았다. 

신기한 건 시커먼 생물이 아버지의 머리맡에 있는 동안 
열이 빠르게 내리기 시작했다는 거다. 
마침내 아버지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번 친숙해지자 시커먼 생물은 
아버지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아버지가 책을 읽고 있으면 다가와 
곁에 앉아 책을 들여다보는 척했다. 
아버지는 그것을 ‘검지’라고 불렀다.

하루는 엄마가 부르는 노래를 검지가 
웅얼웅얼 아기 옹알이하듯 
따라 부르는 모습을 본 아버지가 
“노래를 부를 수 있다면 
말을 가르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이들이 배우는 교재를 구입해서 글을 가르치기도 했다. 
수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지만 
엄마는 매일매일 검지의 재롱을 보는 일이 즐거웠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집을 소개해 준 부동산업자가 놀러왔다가 
과음을 하고 실수로 그만 툇마루 밑에다가 
먹은 걸 게워버리는 일이 있었다. 

하지만 툇마루 밑이어서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런데 그날부터 며칠간 검지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걱정이 된 부모님은 온 저택을 다니며 검지를 찾았다. 

그러다가 툇마루 아래에서 
오물을 뒤집어 쓴 채 누워 있는 검지를 발견했다. 
검지는 마치 독감에 걸린 것처럼 끙끙거리며 옴짝달싹 못하고 있었다.

엄마는 검지를 조심스럽게 옮겨서 깨끗이 씻겼다. 
그때 아버지는 알아차렸다. 
검지가 처음 만났을 때보다 확연히 작아져 있다는 것을. 

며칠간 앓던 검지는 자리에서 일어나자 
두 분에게 걱정을 끼쳤음을 아는지 
몸을 흔들흔들 하며 애교를 부렸다. 

하지만 지금까지와는 달라진 점이 있었다. 
엄마가 몹시 기뻐하며 어루만지려고 하면, 
검지는 그 손이 닿는 찰나 약간 움츠러들었다. 
마치 뜨겁게 달구어진 주전자를 가까이 들이대면 
저도 모르게 몸을 빼는 것처럼.

그날 이후로 아버지는 검지를 관찰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도달한 결론을 엄마에게 털어놓았다. 
아버지가 세운 가설은 이랬다. 

수국 저택은 
오랫동안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 때문에 
사람이 살지 않았다. 
그리하여 저택은 사람을 그리워하게 된 것이다. 

즉, 검지는 
이 저택이 사람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만들어낸 요물, 
일시적인 목숨인 셈이다. 

하지만 수국 저택은 
엄마와 아버지라는 주인을 얻어 만족하게 된다. 
그러니 더 이상 외로움을 느끼지 않게 되었고 
자연히 검지는 점점 사라질 수밖에 없었던 거다.

검지를 살리기 위해서는 
두 사람이 떠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 
아버지가 생각한 해결책이었다. 
엄마는 반대했다. 
“당신의 생각이 항상 옳을 수는 없다”면서. 

하지만 며칠 후에 나타난 검지의 모습이 
완전히 작아졌음을 인지한 엄마는 
아버지의 생각이 옳았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떠나기로 결심한다. 

이사를 가기로 한 그날, 
아버지는 검지를 불러다 놓고 
이렇게 타일렀다고 한다.

검지야. 섭섭하냐. 나도 섭섭하다.
너는 또 혼자가 되겠지.
이 넓은 저택에서 홀로 살게 될 거다.
하지만 검지야.
같은 고독이라도 그것은
나와 내 아내가 너를 만나기 전과는 다르다.
나는 너를 잊지 않을 거다.
내 아내도 너를 잊지 않을 게야.
멀리 떨어져서 따로 살더라도 늘 너를 생각하고 있을 게다.
달이 뜨면, 아, 이 달을 검지도 바라보고 있겠지,
하고 생각할 게다.
검지는 노래하고 있을까, 하고 생각할 게다.
꽃이 피면, 검지는 꽃 속에서 놀고 있을까, 하고 생각할 게다.
비가 내리면, 검지는 저택 어딘가에서
이 빗줄기를 바라보고 있을까, 하고 생각할 게다.
얘야, 검지야.
너는 다시 고독해질 게다.
하지만 이제는 외톨이가 아니란다.
나와 내 아내는 네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참으로 슬프고 다정한 말이 아닌가. 
그런데 부모님이 떠난 뒤로 검지는 어떻게 됐을까. 
여기에는 약간의 에피소드가 더 있는데 
궁금하신 형제자매님들은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 <안주>에서 확인하시면 될 듯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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