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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하거나 뻔한 이야기(12) / 유리 그릇
게시물ID : readers_3444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철수와영이
추천 : 1
조회수 : 299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9/12/29 23: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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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사실, 걱정도 되고 부담이 되기도 해요. 그렇다면 가지 말까 봐요.
-약속이 되어 있다면서 어떻게 안 가. 그건 그렇고 몇 시에 가는 건가요?
-11시에 모여서 예배를 보고 출발해요.
차가 유원지 쪽으로 접어들 무렵부터 두 사람은 저녁 식사를 할 식당을 찾느라 기웃거리고 있을 때 여자가 독백하듯이 말했다.
 
-가지 말고 밤새 당신과 함께 모텔이나 갈까 봐요. 그리고는 밤새 당신께 계획서를 써 달라고 조를까봐.
연구학교 지정을 위한 계획서는 관심이 있는 학교들이 경쟁을 하기 때문에 작성에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것이 아니다. 자칫 갖은 공을 들이고도 심사에서 탈락이 되면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게 된다. 더러는 담당자의 능력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계획서 작성에는 신경이 곤두서지 않을 수 없다.
모텔. 유원지에는 골목골목이 유흥음식점이고 모텔이었다. 모텔의 네온사인이 요란스럽게 빙글거리기도 하고 깜빡거리기도 하고, 길게 줄달음치기도 했다. 온갖 밤의 역사가 만들어지는 도회지의 블랙홀 같은 곳. 그래, 언젠가 장난스럽게 함께 가기로 했었지. 그러나 오늘은 아니야. 오늘밤은 이미 약속이 있다니까.
-조금 겁나는데? 그래도 오늘은 그런 말만 들어도 충분히 기분이 좋군.
남자의 말에 여자가 소리 내어 웃었다. 둘은 민물매운탕 집을 발견하고 그리로 들어갔다. 여자는 가끔 시계를 흘낏거렸고 다소의 조바심을 내보였다. 그러나 둘은 서로에게 시선을 고정시켜놓고 있었다. 여자의 하얀 얼굴을 들여다보는 것은 적어도 남자에겐 큰 즐거움이었다.
 
-술 한 잔 하겠어요?
-아니, 됐어요.
그러면서도 여자는 갈등하고 있었다. 가야하나 말아야 하나. 혼자 술잔을 홀짝거리던 남자는 취기가 조금씩 온 몸으로 퍼지는 것을 느꼈다. 달리기로 땀을 흘린 뒤라 취기가 퍼지는 속도가 무척 빨랐다. 여자는 남자에게 계획서 만드는 일을 다시 콧소리를 내며 졸랐다.
-!
남자는 그런 여자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여자의 투정을 도무지 비켜갈 재간이 없는 듯 했다. 말하자면 남자는 어느 순간부터 사랑스런 그녀를 이길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 여자에게 자신의 심정을 실토하고 말았다.
-참 신기하네요.
-뭐가요?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남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미양 씨의 맑은 눈을 들여다보면 무엇이든 도무지 거절을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여자가 목을 뒤로 젖히며 하얗게 웃었다. 남자는 그런 여자의 목덜미가 참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래. 거절할 수가 없을 거야. 왜냐하면 여자는 유리그릇이거든. 혹여 깨질까 걱정이 되는 유리 그릇. 그래 그녀는 분명 유리그릇이었다. 때문에 여자를 보고 있으면 남자는 무엇인가를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저절로 들었다. 결국 계획서 초안을 만들어 주기로 하고 여자에게 잘 다녀오라고 했다. 여자의 얼굴이 금방 환해졌다.
-그래, 즐겁게 다녀오세요. 내 귀여운 악마.
다시 술이 몇 잔 목구멍을 타고 흘러들자 온 몸이 후덥지근해졌다.
-가서 수액을 잔뜩 마시고 즐겁게 다녀오세요.
-정말 가도 돼요?
여자가 생글거리며 말했다. 정말 가도 되는지를 몇 번씩이나 되물으며 여자는 아이마냥 좋아했다. 수액을 온 몸에 가득 담아오라고 장난스럽게 말하자 여자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 온 몸에 가득 담아 올게요.
-양쪽 가슴 속에 가득 채워올 것. 내 몫으로 말이지.
-알겠어요. 넘치도록 가득 담아올게요.
여자와 남자는 함께 웃으며 밖으로 나섰다. 언제나 느끼는 일이지만 하늘이 별이 총총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도회의 하늘이라는 게 늘 오염에 찌들어 제 색깔을 가져보지를 못한다. 그러함에도 사람들이 도시로 모여드는 것은 생활의 편리를 내세우기는 했지만 순전히 이기심일 탓일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자 남자는 취기로 몽롱해 있음에도 밤늦도록 컴퓨터 앞에 앉아 여자의 하얗게 웃는 얼굴을 떠올리며 계획서를 만들기 위해 자료를 뒤적였다.
 
다음날 토요일에 남자는 결혼식장엘 다녀오느라 온통 하루를 다 소비했다. 결혼식장에서 남자는 여자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즐거운 시간인지, 고로쇠 수액을 많이 마셨는지.
여자는 온몸으로 봄을 느끼고 있다며 함께 왔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사실은 지금 막 저도 당신을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당신에게서 문자가 왔어요. 정말 사랑하는 사람은 보지 않아도 뜻이 통하는 모양이지요? 참 신기해요. 더구나 당신도 같은 시간에 같은 생각을 했다는 사실이 나를 얼마나 행복하게 했는지 아세요?
여자의 들뜬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늦은 밤 시간이 되어서야 계획서를 어느 정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남자는 여자의 환한 미소를 떠올리며 컴퓨터에 계획서를 파일을 저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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