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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연구
게시물ID : panic_10113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테라코타맨
추천 : 2
조회수 : 1642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20/02/18 12:3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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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죽음 연구 (시공격자 프랙탈)



죽음 연구

"죽음은 완전한 끝이야. 두려워할 대상도 주체도 애당초 없다는 얘기지."

"그걸 자기가 어떻게 그리 잘 알아?"

"영혼은 살아있는 육신이 보여주는 현상에 지나지 않아. 심장마비가 오면 맥박이 멈추고 뇌사하면 뇌파가 잠잠해지듯, 육신이 죽으면 영혼 또는 자의식은 그냥 없어질 수밖에 없지. 뇌 없는 뇌파?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아."

"그래도 아무도 가보지 못한 사후 세계를 그렇게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을까?"

"왜 못해. 영혼은 파동인가, 입자인가? 중력, 전자기력, 약력, 강력 가운데 어떤 힘으로 추동되는가? 질량이 없다니 중력은 아니겠고, 물질적인 육신을 떠난 터에 물질의 핵 속에 갇혀있는 약력이나 강력을 품을 이유도 없겠고.. 남은 것은 전자기력인데 전자는 또 물질 아닌가? 그것도 우리 인간이 가장 쉽게 측정할 수 있는 형태의 질량 또는 에너지의 존재 형식이고 말이야. 만약 영혼이 전자기력으로 발생되는 전자기파 같은 것이라면 그걸 우리가 지금까지 전파탐지기나 오실로스코프 같은 장비로 측정해내지 못하고 놓쳤을까?"

"5의 힘이나 전혀 다른 존재양식의 가능성은?"

"과학이란 걸 조금만 알아도 그런 말을 할 순 없을 걸."


이사악은 늘 이성적이었다. 그런 그를 친구들은 별종 취급하면서도 극히 이성적이고 과학적이고 논리적으로, 모두 무서워하고 껄끄러워하는 죽음을 그토록 아무렇지않게 여기는 멋진 사람으로 생각한다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었고, 또 그 사실을 은근히 즐기는 편이었다.


"과학을 전공하지도 않았으면서.."


사람들은 말하곤 했다. 그를 지지하는 사람도 반대하는 사람도 그렇게 말을 시작했다.


그리하여 자기 자신을 전투적인 무신론자로 확고히 자리매김하기 위해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기로 했다. 말로만 아니라 실험으로 직접 보여주자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현대과학이 만든 가장 정교한 감지기, 예민한 측정기들을 총동원해도 영혼이란 현상은 측정불가능하며, 따라서 존재한다고 할 수 없음을 과학적으로 증명하자는 것이었다. 과학자, 기술자, 의학자 출신의 전투적인 무신론자는 그의 주변에 차고 넘치는 만큼, 영혼 탐지를 위한 실험실은 금방 완성되었다. 그것도 과학재단의 연구비로 대학병원 안에.


하지만 어느 쪽으로든 결정적인 실험 데이터를 얻을 수는 없었다. 임종에 가까운 환자들을 가족의 동의 하에 영혼 탐지 실험실로 데려와 몸에서 나오는 모든 신호를 잡으려고 노력했지만 얻어지는 것은 대부분 의미를 알 수 없는 잡음 뿐이었다. 최고의 감도를 내는 초전도 양자간섭 소자로 죽어가는 사람의 뇌에서 나오는 미약한 자기장을 측정해보아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가장 큰 문제는 임종이 가까울수록 늘어나는 의료적인 처치 때문에 영혼 탐지 장치의 정상적인 작동이 거의 불가능해진다는 점이었.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하나의 전쟁 같이 계속되는 생명연장, 구급조치가 그 자체로서 생명이 꺼지는 순간, 영혼이 스러지는 또는 영혼이 빠져나간다는 그 초유의 민감하기 그지 없는 순간을 측정해내려는 그 모든 노력을 무위로 돌린다는 사실이었다.


죽음 준비

"영혼은 무슨.. 거 봐! 죽는 순간 모든 게 끝이잖아!"


그 한 마디를 실험으로 증명하기가 그렇게 힘들 줄이야. 영혼 탐지 실험실을 운용한 지 1년이 다 되어가지만 성과는 없었다. 통계치를 끌어낼 수 있을 만큼의 자료 축적은 고사하고 단 하나의 의미있는 측정도 해내지 못한 상태였다.


"이사악, 과학재단에 새로운 연구계획서를 제출하는 게 어때?"


대학병원 유전자 분석실에서 고참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는 진우진이 이사악에게 물었다. 일주일에 한번씩 만나는 영혼 탐지 실험실 팀 회의였다. 진우진 아래에 있는 박사과정 대학원생 두 명도 함께 한 자리였다. 전투적인 무신론자 그룹에서도 급진적인 진우진은 죽음의 인문학적인 고찰을 담당하는 전문가로서 이사악을 연구진에 합류시킨 터였다. 원래 이사악의 제안에 따라 만들어진 팀이었지만 연구비와 시설을 제공하는 진우진은 자연스럽게 팀장이 되었고, 이사악은 객원 철학자로서 큰 틀을 짜고 대학원들과 함께 실질적인 연구를 수행했다.


"아직 시간이 한 달 남았으니.."

"인터넷 광장에서 종교미신 나부랭이들이 깝치고 난리도 아니던데. 우리가 모든 걸 과학기술에 우겨넣으려고 한다고. 천박하다고. 과학기술이란 게 원래 항시적인 '공사중' 팻말 세우고 있는 임시 천막 아니냐면서.."


진우진은 금방이라도 온갖 욕설을 입에 담을 기세였다. 일 년이 다 되어가도록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자신에 대한 질책이기도 한다는 사실을 이사악은 잘 알고 있었다.


"가족 친지가 없는 그런 환자들을 찾아보고 있습니다. 의료진들의 야단법석 없이 우리 실험실에서 조용하게 임종을 맞이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을.."

"가족이 없더라도 마지막 순간까지 모든 의료적인 처치를 다하잖아. 법률이 정하고 있기도 하고, 가족이 없더라도 정부에서 비용을 대기 때문에 병원으로선 그렇게 안 할 이유가 없고.. 어쨌든 논문을 쓰려면 적어도 한 번은 제대로 자료를 뽑아낼 수 있도록 하라구."


진우진은 못을 박았다. 과학재단에서 추가 연구비를 지원받지 못하고 한 달 안에 성과를 내지 못한다면 팀은 해체될 게 뻔한 상황이었다.


이사악에게 팀 해체는 실은 별 게 아니었다. 인터넷 광장에서 말도 안 되는 무지몽매한 자들과 지리한 싸움을 계속해야 한다는 사실이, 우주의 비밀을 다 알고 있다는 식의 그들의 표정과 말투와 태도를 견뎌야 한다는 사실이 괴로울 뿐이었다. 화가 날 뿐이었다.


"그렇다고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피도 눈물도 없어 보였던 진우진의 말이 새삼스러웠다. 이사악에게는 병 주고 약 주는 얄미운 모습으로 비쳤다.


"위험하지 않을까?"


진우진은 거듭 염려의 말을 했지만, 그렇다고 말리지는 않았다. 그 또한 결과가 궁금했던 것이다. 종교미신 바이러스에 항생제 같은 실험적 증거를 제시한다.. 무척 구미가 당기는 일이었다.


이사악은 영혼 탐지 실험실 환자용 침대 위에 누웠다. 시간은 외부의 교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자정으로 정했다. 진우진을 비롯한 모든 팀원들이 각자의 자리를 지켰다.


뇌파를 추적하다가 여러 갈래로 제각기 튀던 뇌파의 개별 파동이 하나로 모아지는 순간, 정확한 세기의 전압으로전기 충격이 가해졌다. 뇌파는 한꺼번에 무너졌고 그의 전두엽은 일시적인 뇌사에 빠져들었다. 물론 이면에서는 또 다른 전기 충격이 들어오면 언제라도 뇌파의 흐름을 다시 이어갈 수 있는 그림자 파동이 살아있을 터였다.


초전도 양자간섭 소자를 비롯한 영혼 탐지기들이 일제히 이사악의 뇌에서 나오는 미세한 신호들을 잡아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림자 뇌파가 무너지면서 느닷없이 심정지가 찾아왔다. 영혼 탐지기와 뇌파가 공진하다가 파괴적인 간섭을 일으킨 것이었다.


죽음 순간

영혼, 의식, 혹은 자의식이라는 그 무엇은 뇌라는 컴퓨터를 통한 무수한 전자들의 흐름 패턴일까, 아니면 그 전자들의 정교한 흐름의 주변에 형성되는 전기장 또는 자기장의 꽈배기 같은 변화 패턴일까.


그렇다면 그 전자기적인 신호를 초전도 양자간섭 소자로 잡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잡아낸 신호들을 어떤 전자기적 장치에 저장하고, 더 나아가서 뇌 안에서 흐르듯 마음대로 흐를 수 있도록 해주는 장치에 넣어준다면 어떻게 될까. , 곧 육신 밖에서도 존재하고 작동할 수 있지 않을까.


뇌가 의식 또는 전자기장의 패턴/흐름을 만들어 내는 것일까, 아니면 그 전자기장의 패턴/흐름이 지속가능하게 존재할 수 있는 무대로서 뇌를 선택한 것일까. 뇌와 비슷한 복잡도와 회로를 갖는 컴퓨터로 의식을 옮길 수도 있지 않을까.


초전자 양자간섭 소자와 같은 감지/전송 장치를 사이에 두고 뇌에서 컴퓨터로 의식이 옮아갈 때, 그 형식은 어차피 허공에서 서로의 존재를 교대로 이끌어 내는 전기장과 자기장의 어울림, 곧 전자기파의 형태를 띨 수 있지 않을까. 결국, 자의식 곧 영혼이 전자기파 혹은 빛의 형태로 존재할 뿐만 아니라, 끝도 없고 한도 없는 우주 공간을 빛의 다발의 형태로 홀로 끝없이 맴돌 수는 없을까. 질량/에너지 보존 법칙은 물질/에너지 패턴의 보존 법칙으로 진화할 수는 없었을까.


더 나아가 특수 상대성 이론과 일반 상대성 이론 그리고 양자역학이 그리는 저 우주의 진실은 질량/에너지와 시공간 사이에도 또다른 등가의 원리가 성립하면서 우주 시공간을 떠돌던 빛의 다발은 어느 블랙홀의 언저리 또는 어느 별의 중심에 불확실성의 원리가 극히 짧은 시간 동안 허용하는 시공간의 틈으로 스며들어가 시공간 격자의 진동으로 바뀌어 온 우주에 편만할 수는 없을까.


저승 여행

전기 충격과 함께 강제로 멈춘 뇌파, 영혼 탐지기와의 간섭으로 무너져 내린 그림자 뇌파에 이어 심장까지 멎으면서 이사악의 육신이 식물인간의 상태에 빠져드는 동안 그의 정신은 무의식에 빠져들었다.


그 갑작스러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진우진은 재빨리 응급실의 도움을 받아 인공 심폐 장비를 붙여 이사악의 육신이 그나마 식물인간 상태에 머물 수 있도록 만드는 데에는 성공했다.


그 순간, 무의식에서 빠져나온 이사악의 자의식, 영혼은 진우진과 자신의 육신은 물론이고 그 순간의 존재방식을 훤히 꿰뚫어보고있었다. 의혹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전자 가상입자의 순간적인 가속 운동과 그 가상입자 주변에 발생하는 전자기파 사이를 진동하는 존재방식은 이해할 만했고, 그 진동이 우주 시공격자의 프랙탈 진동으로 바뀌며 온 우주공간에 편만하는 존재감도 그렇게 낯설지 않았다.


선택의 시간

시공격자의 프랙탈 파동.. 우주 전체에 하나의 작은 부분인 개체를 실을 수 있는 존재형식이었다. 시공격자에 탑재되었기 때문에 시공을 초월할 수 있었고, 시간/공간이라는 무대와 질량/에너지라는 무대 위 배우가 구분되는 틀에 갇히지 않았기 때문에 3차원의 이면까지 포함한 4차원의 세계를 넘나들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하나의 통일된 자의식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은 놀라웠다. 전체에 매몰되지 않은 개체.. 개체에 고립되지 않는 전체.. 전체와 개체의 그 절묘한 상보적인 관계는 미시세계에서만 작동하던 양자역학을 거시세계로 역재규격화한 듯했다.


물론 과학을 전공하지 않은 그의, 자꾸만 작아지려는 자의식의 입장에서는 그 모든 현상들을 과학 용어로 정리하고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수미일관한 법칙에 따르고 있다는 엄연한 진실만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온 우주를 통으로 느끼는 마당에 3차원에 갇힌 인간의 작은 마음, 작은 지경, 좁은 논리로 간신히 쌓아올린 해상도 낮은 '과학'으로 자꾸만 회귀하려는 경향은 인간의 과학, 인간의 이성, 인간의 논리라는 한계 속에서 평생을 살아온 이사악으로서는 불가항력이었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4차원 우주는 전두엽의 3차원 생체 전기회로에서 제멋대로 튄 전기 불꽃이 만들어낸 환영에 불과했다. 마음과 에너지와 존재가 한 덩어리로 돌아가는 우주적인 상황에서 그처럼 시공격자로부터 격리되고 에너지로부터도 분리되는 퇴행은 그를 더 이상 4차원에 머물 수 없도록 만들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어느 차원에 머물 것인지는 순전히 선택의 문제였던 것이다.


상대론의 광대한 4차원과 끈 이론의 정교한 11차원에서 스스로 쪼그라들고 조악해진 그의 자의식은 그의 육신으로 돌아왔다. 전두엽에 다시 전기 불꽃이 튀기 시작했고 심장이 펄떡이기 시작했다.



소멸

진우진 그리고 의사들은 기적이라고 했다.


자기가 완전히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사악 본인은 실은 자신이 3차원의 육신에 다시 갇힌 것임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의문이 들었다.


"유전자 조작처럼 영혼 탐지기 같은 어정쩡한 장치로 우주적인 영혼의 진화 과정에 함부로 끼어들어 망쳐버린 것은 아닐까?"


육신의 죽음이 완전한 끝이 아님을, 영혼이란 현상의 복잡성을 '과학적으로' 알게 된 그로서는 수억 년 진화의 산물인 유전자를 암실에서 색안경을 쓴 채 시커먼 청룡도로 난도질하는, 자칭 정교하다는 최첨단 유전자 공학의 무모에 전투적인 무신론자 자신을 비추어 보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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