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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하거나 뻔한 이야기(23) / 봄바람
게시물ID : readers_3458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철수와영이
추천 : 1
조회수 : 246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0/02/20 20: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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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협의실을 나와 통로를 좌우로 흘낏 거리며 사무실로 들어서자 여자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남자에게 따끈한 커피를 내왔다.
-조금 전에 마셨지 않았나?
-이건 특별 서비스랍니다.
여자가 남자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특별 서비스라? 그래. 그럴 만하지. 그건 분명 특별한 것이었어.
남자는 어깨에 올려진 여자의 손을 잡아끌자 여자가 화들짝 놀란 몸짓을 했다.
-누가 보면 어쩌려고 그래?
-그러게 보이지 않는 곳 어디선가에 누군가의 눈이 보고 있을 수도 있겠지. 그런데 지금의 내 기분은 누군가가 봤으면 좋겠어. 큰 소리로 떠들고 싶기도 하고.
-얼씨구! 잘 하셔.
같은 직장에서 생활한다는 것은 두 사람이 하루 종일 서로를 볼 수 있다는 말이다. 함께 웃고 함께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도 행복한 일이었다.
퇴근 후 저녁 늦은 시각. 여자가 메일을 보내왔다.
 

당신으로 인해 이제껏 보지 못한 세상에 대해 눈을 뜬 것 같아 고마워.
누군가를 안다는 건 그저 스칠 수 있음을 의미하지만, 스침이 켜켜이 쌓여 비로소 누군가와 가깝다는 건 서로 바라보며 이해할 수 있음을 의미하겠지. 그러다 마침내 그 바라봄이 집착으로 변한다면 그게 바로 사랑이 아닐까 싶어. 그런 탓에 집착은 <눈 멈>이 아니라 <눈 뜸>인 것도 같아. 그렇지? <눈 뜸>은 말 못할 행복이야. 눈 뜸은 가슴 속에 활화산 하나를 켜는 것 같아.
<눈 뜸>은 사랑하는 마음이니까. 당신으로 하여 <눈 뜸>의 기쁨을 얻을 수 있음에 감격해 하고 있는 중이야. 언젠가부터 하늘이 투명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지. 그러나 새삼스레 하늘은 늘 푸르게 그렇게 있었다는 걸 비로소 깨달았어. 그러고 보면 <눈 뜸>은 세상을 새롭게 보게 하는 건 가봐. 진정, <눈 뜸><사랑하는 마음>이야. 내 안에서 당신이 평화로울 수 있는, 참으로 어쩌지 못하는 <사랑하는 마음>이 분명해. 당신은 정말 소중해. 이제는 당신이 옆에 없으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늘 지금처럼 당신이 가까이에 있었으면 좋겠어.
 

봄볕은 하루가 다르게 온기를 더해갔다. 가로수며 가까이 보이는 산이며 마침내 세상은 온통 연록 색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한낮의 아스팔트는 때로 가는 아지랑이기 피어오르기도 했다. 여자는 행복에 겨워 늘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무슨 일을 하든 그저 콧노래를 부르며 마다하지 않았다. 주변 동료들은 그런 여자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여자는 그저 태연하게 말했다.
-봄이 와서 그런가? 요즈음은 일이 즐거워요. 다른 사람들은 안 그런가?
-우리가 보기에 뭐 좋은 일이 있는 모양인데요? 복권에 당첨된 것 같지는 않고, 뭔지 모르지만 좋은 일이 있으면 같이 즐깁시다.
-흐흐흥. 좋은 일? 그럼요. 좋은 일이 있지요. 그런데 같이 즐기기에는 너무 아까워서 미안하지만 안 되겠는데요.
남자는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너른 운동장 너머 가로수에는 연록 색 잎이 햇살에 반짝였다. 겨우내 속을 비웠던 가로수는 열심히 마른 땅 깊숙이 뿌리를 박고 물기를 빨아올렸다. 남자는 가로수에서 고로쇠 물을 떠올리고는 혼자 빙긋이 웃었다.
 
-봄이잖아요. 봄은 사람들을 들뜨게 하는 거라구요.
여자는 평소와 달리 쉴 새 없이 말을 했다.
-꼭 바람난 처녀 같구랴. 봄이 좋기는 좋은가 봅니다.
나이 지긋한 교사가 여자를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크하하. 바람난 처녀? 내가? 정말 늦바람 한 번 나 봐요?
-그 대상자로 저를 추천합니다.
젊은 남자 교사가 남자와 여자를 번갈아 보며 말하고는 호탕하게 웃었다.
-김샘은 너무 젊어서 안 돼. 수준이 맞아야지.
-무슨 놈의 바람에 수준이 다 있답니까?
남자는 여전히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미동도 하지 않는다. 이야기에 까여들기가 어쩐지 어색한 것 같기도 했다. 그야말로 도둑이 제 발 저린 격이었다. 남자는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여자를 바라보았다. 여자도 남자를 바라보며 하얗게 웃었다.
-이렇게 멋진 봄 날에는 어딘가 여행이라도 가야되는 건데. 안 그래요?
남자는 여자의 투정 같은 말에 그저 피식 웃을 뿐이었다. 그래. 어디든 가면 좋지. 남자는 여자가 함께 시간을 보내주길 바라는 것이라 생각했다. 창밖으로 올려다 보이는 하늘은 눈이 시린 푸른색이었다. 그 푸른 하늘 한가운데로 구름이 몰려들었다. 이내 구름은 여자의 얼굴로 금방 바뀌어갔다. 여자의 얼굴은 남자를 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남자도 여자를 보며 따라 웃었다.
 
그때 젊은 여교사가 남자 옆으로 다가서며 넌지시 물었다.
-기분 좋은 일이 있나 봐요?
-? 으응. 아니. 아무 것도.
-아무 것은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요. 혹시 김 선배처럼 봄바람이라도....?
-허허, 이 사람이. 내가 그렇게 보여?
-창밖을 보는 모습이 너무 행복해 보여서요. 그러고 보니 김 선배도 그렇고. 두 분이 모두 정상은 아닌 것 같은데요?
-행복해 보인다니 고맙군. , 싱거운 소리들 그만하고 일들이나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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