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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명의 간을 꺼내먹은 북한의 연쇄살인마 "박명식 사건"
게시물ID : panic_10119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99콘
추천 : 31
조회수 : 4616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0/03/08 19:05:29
이글은 실제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글을 읽고 불편함을 느끼실 분들은 읽지 말기를 당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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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북한에서 일어난 연쇄살인사건을 소개해드릴까 합니다.
범인 박명식은 함경남도 신포시에서 1990년 4월부터 살인을 시작해
그가 붙잡히던 같은해 11월까지 11명의 10대 청소년과 1명의 20대 여성을
칼로 찔러 살해하고 피해자들의 배를 갈라 그들의 생간을 적출해 먹은 사건입니다.

북한의 언론은(언론이라고 해봐야 김씨왕조의 정치선전 도구이지만)
김씨일가의 정치 홍보를 위한 뉴스와 기사는 적극적으로 다루지만
북한주민들이 동요할 수 있거나 체제유지에 해가 되는 것들은
애초에 보도가 차단되기에 강력범죄나 재해같은 사건 사고를
전하는 뉴스와 기사는는 보기 힘들다고 합니다.

하지만 연쇄살인이나 정치범 같은 체제에 큰 위해를 가하는 사건들의 경우
김정일이나 김정은이 직접나서 조사를 직접 지시 보고받고
검거부터 처형까지 아주 자세히 적극적으로 사건을 다루는 경우가 있는데
명분은 사회불안요소를 제거했다는 이유로
김씨왕조의 정치홍보용으로 적극 활용하는 케이스가 있는데

오늘 소개해드리는 사건이 그런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북한의 중앙TV와 로동신문에서도 자세하게 보도되어
한국의 여러 매체에서 뉴스와 기사로 소개된 적이 있습니다. 
국내 종편의 북한관련 프로그램에서도 몇 번 다뤄진적이 있기도 한데 
그때 그지역에 거주하던 탈북자들이 게스트로 나와
당시의 분위기나 민심 등을 이야기하기도해
세간에 많이 알려진 사건이기도 합니다.
 
시작합니다.
 
이 이야기는 1990년 북한 함경도 신포시에서 시작됩니다.

박명식은 말수가 적고 내성적이고 소심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를 아는 주변의 이웃과 직장동료들의 증언으로는
소심한 성격탓에 남에게 싫은소리 한 번 하는것을 보지못했고
다른 누구와도 언쟁하는 것을 본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 성격탓에 다른 누구에게 원망을 살 사람은 아니었기에
그의 범죄가 드러났을때 주변사람들의 충격은 더욱 컸다고 합니다.

그는 평소 몸이 약했는데 사건이 일어나기 몇 년 전부터 간경화를 앓게 되었습니다.
치료를 잘 한다는 병원에도 가보고 어렵게 큰 돈을 구해 
간에 좋다는 귀한 약을 중국에서 구해 먹어보기도 하였으나
그의 상태는 호전되지 않고  더 악화되었습니다.
 
몇 년간 큰 돈을 들여 먹은 약과 병원치료가 허사로 돌아가고 
1990년 초 의사로부터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이야기를 듣게됩니다.
그 소식을 듣고 박명식을 안타깝게 여긴 친한 지인이 남들 모르게 찾아와
용한 무당이 너의 병을 고쳐줄 줄지 아느냐?며 무당을 만나 볼 것을 권했고
박명식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곳을 찾갑니다.
(공산국가인 북한에서는 미신과 종교활동에 대해 단속이 심하다고 합니다.
단속에 걸릴 경우 양쪽 모두 처벌을 받아 친한관계의 사람이 아니라면
무당같은 미신에 관련된 이야기는 함부로 꺼내지 않는다고 합니다.)

박명식은 무당을 만나 자신의 살아온 날들을 하소연 하고는
무당에게 자신의 생사라도 알고싶다며 점을 봐 달라며 애원했고
혹시라도 만약에 살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살 수 있을지
방법을 알려달라며 무당에게 매달립니다.

그의 생사를 점치던 무당은 점궤를 보고는 치유될 수 있다는 말을 합니다.
자신의 병이 완치가 된다는 무당의 말에 박명식은 뛸 듯이 기뻤지만
그것도 잠시 무당은 뜻 밖의 엄청난 말을 꺼냅니다.
 
살려면 다른 사람의 생간을 먹어야 하고 덧붙여 젊은사람의 간일수록
효과가 더욱 좋으니 되도록 젊은 사람의 생간을 먹으라는 말까지 했으니까요

남들에게 싫은 소리 한번 해본적이 없던 박명식이었기에
그 말을 듣고서 며칠을 깊은 고민에 빠집니다.
 
그는 며칠을 고심하다
간을 먹고 걸려서 죽으나 간경화로 죽으나 마찬가지인데
죽기전에 무당이 시킨대로 해보고 죽자는 결론을 내립니다.

박명식은 젊은 사람의 간이 더 효과가 좋다는 말을 다시금 떠올리며 
10대 청소년과 20대 초반의 젊은사람을 범행대상으로 삼았는데
박명식이 범행을 위해 계획을 세우던 때가 마침 4월이었습니다.
 
북한에서 4월달은 우리의 중.고등학생 나이의 학생들이
농촌동원을 나오는 철이어서 농촌동원을 나온 학생들을 대상으로
그는 천천히 범행대상을 물색합니다.

(북한에서는 농번기에 15살이상의 학생들은 농촌동원 이라는 이름으로
강제동원되고 협동농장에서 우리의 자원봉사 개념인 노력지원 이라는 이름으로
봄과 가을 두번 강제동원 됩니다.
봄에 약 1주일 가을철에는 약 3주정도 강제동원 되는데
환자가 아니라면 남녀구분없이 누구나 열외없이 동원되어
협동농장에서 일하게 되는데 할당량을 다 채우지 못하면
해가 떨어져도 일하는 경우가 허다하고
숙식은 집단농장이나 농장원의 집에서 대부분 해결한다고 합니다.)

박명식은 농촌동원을 나온 학생들의 숙소에 따로 지키는 사람이 없고
학생들도 고단한 농사일 뒤 잠이들면 누가 업어가도 모른다는 점을 노리고
범행에 앞서 낮에 학생들이 잠을자는 숙소에 몰래 침입해
숙소의 구조를 파악하고 늦은밤 모두가 깊은 잠에 든 시간을 노려
숙소에 몰래 침입합니다.

피곤에 지쳐 곯아떨어진 학생들 중 한명의 입을 틀어막고
미리 준비해 놓은 칼로 학생의 급소를 찔러 저항하지 못하게 만들어
피해학생을 안고 숙소를 빠져 나오며 그의 계획대로 되는듯 했지만
의외의 변수가 발생합니다.
 
민가에서 키우던 개들이 낯선이의 발소리에 시끄럽게 짖어댄거죠  
한밤중에 요란하게 개짖는 소리가 나자 사람들이 하나둘 잠을 깼고
인기척을 느깐 박명식은 안고있던 피해학생을 바닥에 내려놓고는
그대로 도망쳐버립니다.
 
그가 내려놓고 간 피해학생은 즉시 발견이 되었지만
안타깝게도 과다출혈로 다음날 사망합니다.

박명식은 첫 범행이 실패로 돌아가자 꼬리가 밟힐것을 우려해
첫 범행 현장과 몇 킬로 떨어진 농장을 물색했고
그곳에서 한 학생을 살해해 납치해 그의 목적을 이루는데 성공합니다.

해당 농장에서는 아침이 되어서야 피해 학생이 사라진 것을 알게되고
뭔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낀 사람들은 피해학생을 찾기위해
마을주변과 과 농장주변을 샅샅이 찾았습니다.
 
2번째 피해학생은 숙소에서 조금 떨어진 밭에서 발견되었는데.   
시신은 칼로 난자당해 배가 갈라져 있고 간은 사라져 있었습니다.
발견당시 시신의 훼손정도가 얼마나 심했는지 
처음 발견한 사람은 피해자의 시신을 보고 기절했고
깨어난 이후에도 한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악몽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두건의 살인사건이 연달아 발생하고 신포시 보안서(한국의 경찰서)에서
사건을 조사하지만 피해자들이 10대이고 잔혹하게 살해당했다는 것 말고는 
용의자를 특정할만한 특별한 단서는 현장에서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용의자 조차 특정하지 못해 골머리를 앓고 있던 상황에서
얼마 지나지않아 20대 여성이 세번째 희생자가 또 발생합니다.
살해방법은 앞의 두 사건과 같았고 이번에도 복부가 훼손되어 있고
간의 일부가 흉기에 의해 잘려져 있었습니다.  
 
3명이 칼에 난자당해 사망하고 배를 갈라 2명의 간이 사라진 사건의 소문은
인근 마을을 비롯해 신포시를 넘어 인근 도시에 이르기까지 삽시간에 퍼졌고
이후로도 배가 갈린채 간이 사라지는 사건은 멈추지않기에  
인근 주민들은 공포에 휩싸였고 자신들도 화를 입을까봐 두려워
해가 떨어지면 길에 아무도 다니지 않았다고 합니다.
 
잇단 피해자가 계속 나오자 신포시의 보안당국(우리의 경찰서)에서 직접나서
범인색출에 총력을 기울이지만 별다른 성과는 얻지 못합니다.
 
엽기적인 연쇄살인이 사건이 계속되자 사건은 북한중앙당에까지 보고가 되었고
중앙당에서는 신포시의 당 책임비서(우리의 시장급)와 보안국 최고책임자(우리의 경찰서장)를
경질하고 새로 임명하는 초강수를 두었지만 별다른 소득은 없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1990년 10월 어느날 박명식은 추수동원을 나온
10대 청소년을 13번째 희생자로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범행중 피해학생을 완벽하게 제압하지 못하는 실수를 하게 됩니다.
완강하게 저항하던 피해학생은 그틈을 놓치지않고 도주하며 
큰 소리로 주변에 있던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당시 범인을 잡기위해 당에서도 주민들도 혈안이 되어 있던터라
범행에 실패하고 도망치는 박명식을 본 사람들은
그가  연쇄살인범이라고 확신하고선 근처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몰려와 도망치는 박명식을 붙잡는데 성공합니다.
 
사람들은 그를 잡았다는 기쁨도 잠시 허탈해합니다.
악명높던 연쇄 살인범을 잡았지만 13명을 죽이고 배를갈라 간을 빼먹은
사람이라고 보기에는 보기에는 초췌한 모습의 평범한 사람이었으니까요
 
박명식은 체포 이후 경찰의 조사에서 자신의 범행일체를 순순히 인정했고
검찰에서도 그는 모든 혐의를 인정하면서 검찰측에서는 사형을 구형합니다.
1990년 10월 인민재판소에 넘겨져 재판이 진행되었는데
(북한은 검사의 권한이 절대적이라고 법원에서는 사건에 대한 
법리적 다툼없이 검찰의 구형이 거의 확정이라고 합니다.)
검찰에서 구형한 사형을 확정하고 며칠뒤 그의 공개총살형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이번 사건의 출발점인 무당도 살인교사 혐의가 인정되어
15년의 노동교화형이 선고되어 복역후 다른 지역으로 추방되었고
이후의 행방은 알 수 없다고 합니다.
그는 조사과정과 재판에서 사람의 간을 먹어야 된다고 말한건 맞지만
산사람의 간을 먹으라고 한적은 없다고 자신의 살인교사 혐의를 부인했지만
인정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우리의 일반적인 상식으로 이해하기 힘든 사건이지만
한편으로는 맹목적 믿음이 얼마나 큰 불행을 가져다주는지
설명할 수 있는 대표적인 사건이 아닐까 합니다.....
 
이후 2000년이 이후 북한에서도 범죄데이터를 보관하는
인트라넷이 생겨 범죄자를 검거하는데 사용된다고 합니다...
이 사건 말고도 흥미로운 사건이 많이 있는데 
기회가 된다면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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