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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하거나 뻔한 이야기(28) / 의욕의 근원
게시물ID : readers_3462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철수와영이
추천 : 2
조회수 : 289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0/03/13 22: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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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언제부터인가 남자와 여자는 하루걸러 한 번씩 만남을 이어갈 정도로 서로에 대한 생각이 가득했다. 마치 갓 스무 살을 넘긴 아이들처럼 여자는 남자를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을 지경이라고 했다. 여자는 직장에서는 일부러 무엇인가 곤란한 문제를 만들어 남자에게 조언을 구했고, 남자는 그런 여자의 조언을 즐겁게 여겼을 뿐만 아니라 최선을 다 해 해결 방안을 제시해 주거나 함께 해결하기도 했다. 주변에서는 그런 남자와 여자에 대해 뜨악하게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그 이상의 별다른 의심을 하지는 않았다.
 
여자가 공문을 뒤적이다가 책상 위에서 손으로 턱을 받치고는 남자를 건네다 보았다. 남자는 컴퓨터 모니터를 뚫어지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럴 때면 남자는 대체로 청탁 받은 원고나 강의 원고를 쓰고 있는 중이었다. 남자에게는 자기 전공 분야에 대해서는 확실한 자기 주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전국의 많은 곳에서 강의나 원고 청탁을 해왔다. 덕분에 남자는 거의 매일 글을 쓰다시피 했다.
 
-어디서 그런 의욕이 솟아나는지 궁금해요.
-당신이 바로 근원이지.
남자는 원고에서는 눈도 떼지 않고 그렇게 말했었다. 여자는 남자의 그런 대답이 그저 하는 소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오호, 그래요? 기분 좋은 말인데. 특별히 커피 한 잔을 서비스해도 될까요?
-마침 입이 심심했는데 잘 됐네.
오후의 봄 햇살이 기분 좋게 창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햇살 뒤쪽으로 가로수가 싱그러운 잎을 가볍게 흔들고 있었다.
-어제 강의는 정말 대단했어요. 반응이 상당하던데.
-, 내가 그런 칭찬에는 잘 적응이 안 된다우.
-아니야, 정말 대단했어요. 그런데 어디서 그런 말이 쏟아져 나오는지 모르겠어요. 당신은 아무리 생각해도 참으로 신기하기도 하고 어떨 때는 신비롭기도 해서 내 연구대상이에요.
-저런, 오늘부터 광신도가 한 명 생겼구만. 신도가 되심을 환영합니다.
-크크크. 농담이 아니에요.
 
여자가 커피 잔을 내려놓으며 주변을 둘러보더니 남자의 얼굴을 귀여운 아이 얼굴 감싸듯이 살그머니 감싸 쥐었다. 그리고는 귀여워죽겠다는 듯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당신은 정말 대단해요.
-지난번 보고서 일은 잘 되었어?
남자가 여자의 손을 얼굴에서 내려놓으며 물었다.
-당신이 있는데 잘 안 될 리가 있나요?.
-이거, 큰일이군.
-이제 당신은 꼼짝 못해요. 유행가 가사에 있잖아. 밧줄로 꽁꽁 묶인 거라구요.
-밧줄로 꽁꽁. 밧줄로 꽁꽁.
남자가 가사를 웅얼거리며 웃었다.
여자는 그런 남자를 가까이에서 보는 것만으로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를 지경이었다. 마치 중년의 나이가 어느 날 갑자기 스무 살 옛적으로 되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중년의 나이라는 것은 그저 숫자에 불과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하고 아이 낳고 직장 생활에 쫓기다보니 언제 나이가 중년에 이르렀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삶이란 늘 녹록치 않은 것이라 생각했고 또 사실이 그랬다. 늘 무엇에 쫓기는 것 같았고, 늘 나만 뒤로 처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 남자를 만나고부터 세상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남자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고 무슨 일을 하든 즐거웠다. 여자는 남자의 일거수일투족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늘 가까이에 있고 싶었다. 특히 여자가 남자를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은 남자의 자기 확신이었다.
 
남자는 자기 주관이 뚜렷했다. 매사에 분명한 것을 좋아했다. 특히 업무와 관련해서는 더욱 그랬다. 해박한 업무지식은 사람들을 주눅이 들게 할 정도였다. 그래선지 업무와 관련해서 한번 말을 시작하면 끝이 없는 듯했다. 어디서 그 많은 만들어지는지 신기할 정도라고 여자는 늘 느꼈다. 그런 남자의 말들 중에서 여자가 생각하기에 열 가지 중 일곱 가지 정도는 자기 자랑을 곁들이는 것 같기도 했다. 말하자면 은연중에 자기의 능력을 과시하는 것 같았다. 여자는 그런 남자의 수많은 말들에 처음에는 다소 실망스럽기도 하고 적응하기가 부담스럽기도 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여자는 점차 남자의 그런 저 잘난 이야기에 별 거부감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그게 관심일지, 아니면 그보다 더 각별한 마음일지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니 오히려 그 이상일 것이다.
 
때때로 농이 오고갈 정도로 분위기가 조성된 자리에서 잘난 척 하지 말라고 넌지시 한마디 하면 남자는 잘난 척이 아니라 자기는 정말 잘났다고 이야기할 정도로 일에 대한 확신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여자가 생각해도 그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남자를 만나기 전까지는 당연히 서로 다른 환경 속에서 생활했으므로 때로 의견 대립이 생기기도 했다. 그러나 전문적인 식견이 풍부한 남자에게 여자는 언제나 완패를 당했다. 남자가 하는 말은 대체로 합리적이었으며 타당한 듯해서 마땅히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결국 언제부터인가 남자가 하는 말에 대해 여자는 아예 대응을 포기하고 그저 듣기만 했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여자는 남자의 말에 때로 푹 빠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놀라워하기도 했다.
 
남자의 목소리 톤은 언제나 낮았다. 경상도 억양이 다소 가미된 중저음. 여자는 그것이 남자의 최고의 매력이라고 생각했다. 여자가 남자의 말에 빠져드는 것이 완벽해 보이는 논리 때문인지 특유의 중저음 톤 때문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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