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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하거나 뻔한 이야기(29) / 해바라기
게시물ID : readers_3463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철수와영이
추천 : 1
조회수 : 276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0/03/18 22:0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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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당신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참 재미있어. 그리고 대단해.
-그럴 리가 있나? 늘 딱딱한 이야기뿐인 것 같은데.
-아니야. 당신 이야기는 귀를 기울이게 하는 신기한 힘이 있는 것 같아.
-당신만 그럴 것 같은데?
-그런가? 그럴지도 모르지. 그러나 난 그게 더 놓은 것 같은데.
여자는 남자의 말을 듣는 것을 좋아했다. 여자는 남자의 말은 언제나 논리적이라고 생각했다. 남자는 일부러 어려운 단어를 사용해서 말하는 법도 없었다. 그런데도 남자의 말은 매우 설득력이 있었다. 어떨 때는 그런 남자가 여자에게는 신기하기조차 했다.
남자의 이야기는 언제나 여자에게 강한 흡인력으로 작용했다. 여자는 그런 남자를 마주 대할 때마다 묘한 행복감을 느꼈다. 어느새 남자는 여자에게 커다란 울타리가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여자는 일상의 관련해서는 자연스레 남자에게 의존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에게 의견을 구하면 언제나 답답했던 마음이 가라앉고 일은 순조롭게 풀려나가는 것 같았다. 여자는 언제부터인가 그저 남자를 빤히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언제 이런 기분을 가져봤던가 기억이 가물거린다. 중년의 나이에도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그저 신기할 지경이었다. 사실 중년의 나이란 세월의 무게만큼 둔중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여자는 남자로 인해 새로운 에너지를 얻는 것 같았다. 행복했다.
 

봄이 점점 더 익어가자 세상이 온통 나른해졌다. 가로수는 싱그러운 연록 색 잎을 무성하게 매달고 바람을 맞이하고 있었다. 사무실에서 내다보이는 아파트 입구에는 철쭉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여자가 턱을 괴고 창 너머 세상을 물끄러미 내다보던 시선을 돌려 남자를 건네다 보았다. 남자는 윗도리를 벗어 의자 등받이에 걸어놓고 와이셔츠 팔을 걷어 올린 채 컴퓨터를 뚫어지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손은 컴퓨터 자판 위에서 일정한 리듬을 타고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이런 멋진 봄에 사무실에만 앉아있어야 한다는 것은 좀 잔인한 것 같지 않아요?
여자가 창밖을 내다보다 서류철을 한쪽으로 밀어놓으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뭐가 잘 안 되는 모양이지?
-아니, 날이 너무 좋으니까 그런 생각이 드네.
-내가 좀 봐도 될까?
여자는 남자의 그런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책상 위에 잔뜩 벌려놓았던 계획서를 남자에게 건넸다. 남자가 한참 계획서를 살피다가 여자를 보며 대단하다는 듯 엄지를 치켜세웠다.
-대단하네.
-정말이야? 그걸 하느라 온통 신경을 썼더니 머리가 다 지끈거리네.
여자는 남자의 칭찬에 날아갈 듯 기분이 좋았다.
 

남자가 여자 곁으로 온 이후부터 여자는 전에 없이 바빠졌다. 남자는 이것저것 끝도 없이 업무 지시를 했다. 그의 업무 스타일은 기존의 업무를 답습하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 한 해 전의 업무 계획이 지금도 통용된다면 그것은 발전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아예 퇴보하고 있는 것이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했다.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여자에게는 사실 감당하기 힘든 말이었다. 그의 말대로 하자면 매번 참신한 아이디어가 샘솟듯 솟아나야한다. 그런데 여자는 지금까지 그런 경험이 한 번도 없었다. 그저 계획서든 보고서든 과거의 것을 조금 수정하는 것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사람들은 그걸 업무 요령이라고 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남자의 업무 스타일은 요령이 전혀 없는 꽉 막힌 사람 같아 보였다. 적어도 지금까지의 여자의 업무 상식으로 보면 말이다. 때로 남자가 자기에게 왜 그러는지 의아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여자는 도대체 이 남자가 나를 좋아하는 건가 아니면 일부러 골탕을 먹이려는 간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할 정도였다
 
그런 와중에도 남자는 남에게 뒤처지지 않으려면 공부만이 정답이라며 다양한 자료들을 챙겨주기도 했다. 그런데 묘하게도 여자는 남자의 그런 주문이 힘에 부치기는 했지만 그런 남자가 싫기는커녕 오히려 감사했다. 남자와 함께 일을 하다 보니 전체적으로 업무가 보다 명확해졌다. 여자만 그렇게 느끼는 것이 아니라 직장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업무 때문에 서로 티격태격하는 일도 없었다. 동일한 일을 반복하는 일도 없어졌다. 늘 남자 앞에 가면 모든 일들이 실타래 풀리듯이 풀리고 정리가 되었다. 남자가 마치 무슨 마법이라도 부리는 것처럼. 직원들은 그 동안 왜 그런 생각을 못했는지를 자책하면서 남자에 대해 경외심을 갖기도 할 정도였다. 다른 하나는 남자의 강요로 한 공부이기는 하지만 그 덕분에 여자는 난생처음으로 외부에서 강의를 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걍의 의뢰를 받았다는 것은 그의 실력이 객관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자는 그것이 모두 남자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해보지 않던 일이라 강의 원고를 쓰는 일도 힘에 버거웠다. 강의 준비도 만만치 않아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럴 때마다 남자는 여자에게 알게 모르게 많은 도움을 주었고 그 때문에 힘든 과정을 잘 이겨낼 수 있었다. 이제 여자는 남자가 한시라도 옆에 없으면 불안할 지경이었다. 반면에 특별한 부탁을 하지 않더라도 남자가 옆에 있으면 마음이 편안했다. 여자는 남자를 향한 해바라기가 되었다.
-당신의 강요로 내가 생고생을 하고 있다는 걸 아시는지?
-그래? 그런데 그걸 강요라고 말하면 내가 섭섭하지 않을까?
-하여튼 머릿속이 복잡해 죽겠어. 당신이 사서 고생을 시키는 일이니 당신이 도와줘야 해.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창틀에 기대어 서서 바깥을 내다보았다. 봄 햇살이 창틀 끝에 정겹게 매달려 있었다. 등에 따사로운 햇살이 가득 꽂혔다. 여자는 턱을 괴고 흐뭇한 표정으로 남자의 시선을 좇았다. 여자는 남자의 등 뒤에서 아지랑이가 물씬 피어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곳이 공개된 장소가 아니라면 얼른 달려가 남자의 등 뒤에서 껴안고 싶었다. 그때 요란하게 전화벨이 울렸다. 여자가 화들짝 놀라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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