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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하거나 뻔한 이야기(30) / 우연이 아니라 운명
게시물ID : readers_3465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철수와영이
추천 : 1
조회수 : 305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0/03/25 12:3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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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남자는 메일을 주고받는 것을 매우 즐겼다. 남자는 특정한 사람에게 해야 할 업무뿐만 아니라 간단한 인사조차 메일을 활용했다. 사람들은 그걸 좋아했다. 일부러 지시를 받으러 그의 사무실까지 갈 필요가 없었다. 남자는 언제나 아침에 출근하면 바로 컴퓨터를 켜고 그날 아침 기분을 전 직원들에게 짤막한 글로 적어 보냈다. 겨우 서너 문장이었고 대체로 안부와 오늘 하루를 즐겁게 근무할 것을 당부하는 상투적인 글이 전부였지만 직원들은 그의 메일을 매우 좋아했다.
한주가 시작되는 첫날 남자는 직원들에게 다음과 같은 메모를 남겼다.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면 지금에 꼭 맞는 때라고도 합니다. 새롭게 한 주가 시작됩니다. 아직도 망설이던 무엇인가가 있다면 지금이 꼭 맞는 때일 겁니다. 더구나 시작은 늘 새로운 기대감으로 설레게 합니다. 그 무엇인가를 해야 함과 설렘이 함께 하는 한 주가 되시기 바랍니다.
 

이제 막 시작된 프로젝트에 직원들이 신경이 곤두서 있던 때였다. 무엇인가를 새롭게 시작한다는 것은 의욕을 불러오기도 하지만 새로운 일에 대한 일말의 두려움도 있는 법이다. 그런 때 남자의 다독임은 직원들에게 커다란 위로가 되었고 힘이 되었다. 많은 직원들이 그의 메모에 화답을 했다. 감사하다는 말, 업무에 의욕이 생긴다는 말, 늘 배려해 주어서 감사하가는 말, 멋진 한 주를 시작할 수 있어서 힘이 된다는 말들이 남자의 컴퓨터로 전송이 되어왔다. 남자는 그 모든 쪽지에 다시 일일이 답장을 보내주었다.
남자는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컴퓨터 자판을 두드렸다. 아마도 글의 양으로 보면 여느 소설가 정도는 될 듯싶었다. 사실 그 동안 남자는 업무와 관련해서 세 권 책을 집필하기도 했었다.
 

여자에게도 남자는 하루도 빠짐없이 메일을 보냈다. 때로는 격려를 보내기도 했고, 때로는 꼭 챙겨보아야 할 다양한 자료를 보내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업무에 관한 것까지 세세하게 챙기기도 했다. 남자는 언제나 정확했다. 여자는 점차 남자에게 많은 부분을 의지하게 되었고, 마침내 여자는 남자의 방식대로 하면 모든 일이 아주 순조롭게 이루어진다고 믿게 되었다. 여자의 눈에 비친 남자는 매사가 정확했다. 늘 확신에 차 있었고, 무슨 일이든 주저함이 없었다. 생소한 일을 오히려 즐기는 것도 같았다. 마침내 여자는 그런 남자와의 만남이 우연한 것이 아니라 운명적이라 생각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결국 여자는 메일을 통해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라 운명이라고 남자에게 고백하고 말았다. 그때부터 여자와 남자의 만남은 우연이 아닌 운명이 되어 버렸다.
남자는 여전히 컴퓨터에 온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가 컴퓨터에 매달려 있을 때는 마치 수도승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원고를 쓸 때는 그야말로 누가 옆에 다가가도 모를 정도였다. 여자가 한참을 턱을 괴고 그런 남자를 건네다 보다가 메일을 보냈다.
 

-오늘은 유난히 스트레스가 심하네. 불안감이 자꾸 밀려들어. 그래도 당신이 안아주고 위로해 주어서 기분전환이 많이 되었어. 옆에서 힘이 되어주셔서 고마워. 내가 당신한테 가장 크게 힘을 얻을 수 있는 게 뭔지 당신 알아? 모르지? 당신은 약간 바보스러운 데가 있으니까 잘 모를 거야. 내가 알려줄게.
"당신 사랑해!"
이 말 한마디야.
조금은 아이 같지? 그런데 사실 당신을 보고 있으면 내가 아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사실 여자들은 모두가 그래. 잘 기억해 둬. 그러면 바보 같은 어리석음에서 좀 지혜로워 질 수 있을 거야. 알겠지?
 

여자의 다소 엉뚱해 보이는 메일에 남자는 미소를 얼굴 한가득 머금고 컴퓨터 너머로 여자를 건네다 보았다. 중년의 여자에게 마치 열 대여섯의 소녀 같은 감성을 느꼈다. 컴퓨터 너머에서 여자가 발그레한 얼굴로 같이 미소 짓고 있었다. 남자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컴퓨터 모니터로 시선을 옮겼다.
-원고 쓰시는 중?
여자의 애정 어린 메일에도 남자는 묵묵부답이었다.
-힘들면 내가 안아줄까?
 
여자가 메일을 보내자 남자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사무실 바깥으로 나갔다. 여자가 뒷문으로 따라 나섰다. 남자는 사무실 맞은편의 협의실로 향했고 여자는 그런 남자를 따라 갔다.
협의실로 들어서자 남자는 문을 안으로 걸어 잠그고 여자를 힘껏 안았다.
-이제 거의 원고를 완성해 가.
-무슨 원고인데.
-잡지사에서 원고를 달라고 해서. 오늘까지 보내주기로 했거든.
남자는 여자의 입술을 찾았고, 여자는 남자가 참으로 많은 말을 뱉어낸 곳의 근원을 찾기라도 하듯 남자 안에서 날렵하게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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