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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하거나 뻔한 이야기(31) / 절묘한 타이밍
게시물ID : readers_3467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철수와영이
추천 : 1
조회수 : 329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0/03/26 23:48:13
 
둘만의 공간으로 들어오자 남자와 여자는 대담해졌다.
-당신은 아주 가까이에서 이렇게 볼 때가 제일 예뻐. 사랑해. 아주 많이.
남자는 여자의 얼굴을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
-아이 신나. 여자는 남자에게서 그런 말을 늘 듣고 싶어한다구. 사랑한다는 말. 당신에게서 그 말을 자주 듣고 싶어. 그래 줄 거지. ? ?
사랑한다는 말. 생각해 보니 참 낯선 말 같기도 했다. 남자는 여자를 그윽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여자의 작은 몸이 그런 남자의 품으로 어린 아이처럼 파고들었다.
-사랑한다는 말은 젊은이들만이 하는 말인 줄 알았어. 참 낯간지러운 말 같았거든. 나이 든 사람들은 그저 표정으로 몸짓으로 그 말을 대신하는 줄 알았지.
-아냐, 여자는 나이를 아무리 먹어도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한테 그 말을 듣고 싶은 거야.
협의실 창밖 도로로 빠르게 지나는 자동차가 소리에 남자가 그쪽으로 눈을 돌렸다. 가로수에서 연록 색 여린 이파리들이 햇살에 반짝거리고 있었다. 여자도 남자의 시선을 좇았다.
-참 예쁘지?
-저 여린 잎들을 보고 있으면 때로 생명의 경이로움이 느껴져.
 
남자는 여자를 안고 창밖 가로수들의 연록 색 잎을 바라보았다. 따사로운 오후 햇살을 받아 참으로 곱고도 예쁘게 반짝거렸다. 가끔씩 불어오는 바람으로 인해 연록의 잎은 제 각각 몸을 잘게 흔들어댔다.
-그래. 맞아. 겨우 내 바싹 말라있던 나무는 제 몸을 비움으로써 추운 겨울을 난 거지. 그래도 제 몸 어디에선가는 생명의 끈을 꼭 붙잡고 있었지. 한 계절 내내 마른 채로 지냈으므로 자칫 잊을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도 나무는 봄을 잘도 기억하고 물을 찾는 거야. 새로운 시작. 그렇지. 나무는 봄에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거야. 그러고 보면 봄은 분명 무엇인가를 새로 시작하는 계절인지도 몰라. 우리도 말이지. 우리는 서로에게 생명의 끈 같은 것인지도 모르지. 아니면 서로에게 필요한 생명수인지도 모르고.
 
여자가 남자의 아래로 손을 가져갔다. 남자는 여자가 하는 대로 몸을 맡겼다. 기분 좋은 쾌감이 아래로부터 조금씩 위로 올라왔다.
-생명수가 필요한 모양이군.
-크하하하. 그런가? 그런지도 모르지. 사실 당신을 만나기 전에는 그 생명수를 언제쯤 구경했는지 가물가물해.
-그러니까 오랫동안 가뭄이 지속되었던 거로구나.
-그런 셈이지. 그런데 그걸 당신이 해결해 준 셈이지.
후후 웃으며 남자는 여자의 가슴을 더듬었다. 작고 아담한 젖가슴이 남자의 손으로 빨려들었다. 그러자 여자는 남자의 입술을 찾았다. 거친 호흡이 좁은 협의실 공간으로 펴져갔다. 남자는 여자의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여자의 귓불 안쪽에는 무사마귀가 하나 돋아 있었다. 어린 시절 손끝 같은 곳에서 흔히 보던 그런 것이 여자의 귓불 안쪽에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체중이 한 곳으로 몰렸나?
 
남자의 장난스런 말에 여자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나도 모르겠어. 언제부터인가 그런 게 생겼는데 그냥 내버려 둔 거야.
-아직도 어린 애인 모양이지?
-마음은 늘 그래. 어린 애. 그래, 난 아직 어린 애야. 이제 조금씩 어른이 되어가는 중이지. 그러니 당신이 잘 이끌어 봐. 그래야 쓸모 있는 어른이 될 거 아냐.
-그렇군. 쓸모 있는 어른. 그런데 누구에게 쓸모가 있다는 거지?
-크하하하. 당신이지.
여자가 아주 즐거울 때 자주 내는 특유의 웃음소리가 협의실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그렇지?
 
남자는 여자를 힘껏 안으며 돌려세웠다. 여자는 남자를 맞아들이며 입술을 물었다. 협의실 좁은 공간은 여자의 입술 사이로 비집고 나오는 소리로 가득했다. 두 사람은 함께 일렁이며 이내 너른 하늘을 날아올랐다. 북극성은 북쪽 하늘 위에서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두 사람은 언제나처럼 카시오페아를 지나 그곳을 돌아내렸다. 북극성을 돌아내리는 동안 여자는 때로 혼자 너른 하늘을 날아오르다 곤두박질치기를 반복했다. 그때마다 여자는 몸을 심하게 틀었고 홍조가 가득한 얼굴은 더욱 달아올랐다.
-사랑해.
격렬한 시간이 지나자 남자가 여자를 안으며 말했다. 남자는 사랑한다는 말이 이렇게 쉽게 자기 입에서 나오리라고는 예상 못했던 것처럼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협의실 창문으로 햇살이 가득 쏟아져 들어왔다. 도로 건너편 건물 창에 부딪친 햇살이 협의실로 쏟아져 들어온 것이다.
-어머, 이리로 햇살이 들어오네. 이건 분명히 축복이야.
 
여자는 옷매무새를 고치고는 빠른 손놀림으로 테이블 위의 자료며 서류들을 주섬주섬 챙겼다. 그리고는 물을 끓이고 녹차 티백을 넣고는 남자의 맞은편에 앉았다.
-난 말이지. 당신이 옆에 있는 게 얼마나 든든한지 몰라. 당신이 오기 전에는 무슨 일이 생기면 덜컥 겁이 나는 때도 있었거든. 잘 해야 한다는 그런, 뭐랄까 강박관념이랄까? 뭐 그런 게 있었던 것 같아. 그런데 지금은 그런 게 없어졌어. 언제든 당신에게 매달릴 수가 있어서 그런가봐.
-나를 적절히 활용하시겠다?
남자가 녹차를 홀짝거리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아니 활용이라기보다 도움을 받는 거지.
-그게 그 말 아닌가?
-아무려면 어때. 난 당신이 옆에 있다는 게 중요하다는 말이야. 늘 지금처럼 그렇게 옆에 있으면 좋겠어.
그때 협의실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자 젊은 여직원들이 들어왔다.
-어머, 두 분 여기 계셨어요?
-, 자료를 정리하고 잠깐 쉬는 시간에 커피 한 잔 하는 거야. 차 한 잔 생각 있어? 아직 더운 물이 남아있는데. 커피도 가능하고.
 
여자가 커피포트를 가리키며 물었다.
-괜찮아요. 그런데 두 분만 이 좁은 협의실에 계시니까 조금 야시시해 보여요.
-그래?
-아니, 농담이에요.
-좀 그래 봤으면 좋겠는데, 농담이라니 실망인데.
-어머, 그래요?
젊은 여직원들은 웃으며 자기들이 들고 온 자료를 테이블 위에 잔뜩 풀어놓으며 둘러앉았다.
-저희들이 조금 시끄럽더라도 두 분 이해해 주세요.
-아니, 괜찮아요. 우린 일을 다 하고 지금 차 한 잔 마시는 겁니다. 바로 일어날 거니까 염려들 마시고 일 하세요.
그러면서 남자가 일어섰고, 여자는 그런 남자를 따라 서류철을 챙겨 들었다.
복도를 나서면서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며 웃었다.
-참 절묘한 타이밍이네.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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