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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하거나 뻔한 이야기(33) / 방파제
게시물ID : readers_3470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철수와영이
추천 : 1
조회수 : 327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0/04/04 21:3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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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멀리 석양빛이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조금씩 긴 그림자를 지우고 있었다. 맥주 한 잔을 비우는 동안 해는 완전히 바다 밑으로 가라앉아 하루 동안의 피곤을 씻어내고 있었다
이때쯤이면 바다가 온통 붉은 빛으로 가득할 것이다. 그리고 이내 그곳에 어둠이 내릴 것이다. 밤바다. 남자는 문득 그런 바다를 보고 싶었다. 밀물이 가득 밀려든 밤바다. 멀리 해안선을 따라 불빛이 가득하고 발아래 포구엔 밤을 찾아든 고깃배들이 일렁이며 잠을 청하는 그 바다를 보고 싶었다.
 
잔바람이 있었지 아마. 배 터로 가는 비탈길엔 때늦게 포구로 들어온 고깃배에서는 바다에서 갓 잡아 올린 생선들을 부산하게 내리고 있었다. 어둠이 낮게 깔려 있음에도 어부들의 손놀림은 언제나 정확하고 신속했다. 언젠가 여자가 바닷물이 일렁이는 그 끝에서 오들거리며 남자에게 매달리던 때가 생각이 났다.
남자가 맥주를 한 모금 마시다가 여자에게 물었다. 바닷바람 쐬러갈까?
-바닷바람? 흐흥, 좋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여자는 음료수 잔을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바깥은 어둠이 조금씩 깔리기 시작하더니 금방 어두워졌다.
5월의 밤바다는 한낮의 따사로움과는 달리 다소 싸늘해서 냉기마저 돌았다. 바닷물이 너른 바다 저 멀리에서부터 발아래 방파제를 향해 거친 소리를 내며 맹렬하게 몰려들고 있었다. 밀려드는 바닷물을 따라 바람도 함께 컴컴하고도 육지로 밀려들고 있었다.
방파제를 걷다가 여자가 몸을 오들거리며 말했다.
-, 추워.
 
방파제 위로 가로등이 길게 도열해 있었다. 그 끝 해안선엔 밤하늘의 별들을 모두 모였다. 그래봐야 한 움큼일 것 같은 별들. 어린 시절 그 많던 별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도시의 휘황한 불빛은 별들을 사라지게 했다. 어린 시절 밤하늘에는 언제나 별들이 무수히 떠 있었다. 특히 가을 하늘은 언제나 은하수가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밤새 멍석 위에 누워 그 별을 헤아리다 잠이 들곤 했었다. 별을 헤아리다보면 가끔씩 별들 사이로 별똥별이 길게 꼬리를 그리며 어디론가 달려가기도 했었다. 할머니는 아침에 일어나자 말자 간밤에 본 별똥별 이야기를 하면 머리가 좋아진다고 했다. 그 말을 이해한 것은 한참이 지난 후였다. 간밤의 일을 기억한다는 것은 아마도 기억력이 좋은 것이고 그런 사람이 머리도 좋을 것이라는 믿음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리라. 그래서 정말 당신의 손자가 아침에 눈을 뜨자말자 별똥별 이야기를 할머니 턱밑에서 하기를 기대하셨을 것이다.
 
-그래, 아직도 밤바람이 차지?
남자는 여자를 깊이 안았다. 마치 작은 새가 하루 비행을 마치고 둥지를 찾아들 듯이 여자의 작은 몸이 남자의 가슴으로 기어들었다. 남자의 가슴은 넉넉했고 여자는 그런 남자의 품속에서 평화로웠다. 여자의 농익은 살 냄새가 남자의 코끝으로 전해왔다. 달콤하고도 가벼운 입맞춤. 하늘이 조금씩 빙글거리며 두 사람 곁으로 내려앉았다. 물새가 한 마리쯤 날았으면 했었지. 그러나 밤인걸. 여자는 눈을 감고 있었다. 비린 바다 냄새가 발끝을 타고 올라왔다. 어린 시절에는 늘 바다 저 끝이 궁금했었지. 그런 까닭에 무엇이 있는지도 알지 못하고 그 끝을 동경하기까지 했었지. 그리고 그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저 막연하게 틀림없이 아무도 모르는 무엇인가가 있을 거라고 믿었지. 아무도 모르는 무엇. 남자는 그게 늘 궁금했지만 그 궁금증은 궁금증인 채로 늘 가슴 속에 매달려 있었다. 여자가 조그마한 몸을 남자의 품에서 빼내었다.
 
-아제 가, 우리.
-그래, 가자.
남자는 여자의 손을 잡고 조심해서 방파제를 내려왔다. 아직도 공사 중이라 주변은 황량했고, 도로는 정비되지 않은 채였다. 여자는 남자에 의지해서 가로등 밑을 조금 더 걸었다.
-참 좋아. 특히 아무도 없는 길을 둘이서 걷는다는 것이 더 없이 좋아.
여자는 남자의 품에서 웅얼거렸다. 여자는 중년의 나이답지 않게 젊음을 유지하고 있었다.
-비결이 뭐지?
언젠가 남자가 물었다.
-세상을 긍정하는 것?
 
여자가 큭큭 웃으며 말했다. 남자도 그 말에 동의했다. 세상을 긍정하는 것. 하기는 남자는 지금을 긍정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지금을 부정한다면? 그건 말도 안 돼. 남자는 여자를 한 팔로 감싸 안았다.
세상에 대한 긍정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의 긍정이다. 관계의 긍정은 밝음이다. 밝음은 어두움과 대립한다. 그게 젊음이다. 그건 나이로 가늠되는 것이 아니야. 생물학적 표현이 아니라는 말이지. 우리는 젊다. 그래, 정말이지 아직도 우리는 젊어. 덥다는 느낌이 관념에 의한 것이듯 젊음을 유지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일 테니까. 바다 바람이 기분 좋게 볼을 스쳤다. 바다는 언제나 깊은 향수를 품고 있다
 
여자는 다소 들뜬 표정으로 하얗게 웃고 있었다. 남자는 그런 여자가 한없이 사랑스러워 보였다. 언제고 어느 때고 여자를 안아주고 싶었다. 둘은 함께 있으면 철부지 아이들이었다. 두 사람은 승용차로 돌아왔다. 차안은 바깥과 달리 참으로 따뜻했다. 차에 오르자 남자는 여자를 깊이 안았다. 컴컴하고도 너른 하늘이 승용차 안으로 몰려들었다.
-, 있지. 그냥 당신을 보고 있기만 해도 좋아. 참 신기하지?
-그래? 나는 당신을 보고 있기만 한 건 싫은데?
 
남자가 웃으며 여자의 입술을 찾았다. 남자가 언제나 먼저 여자의 입술을 찾지만 그 이후는 여자가 늘 더욱 적극적이었다. 그리고 감미로웠다.
둘은 방파제 끝 가로등이 없는 곳으로 차를 몰아갔다. 차를 세우자 방파제 너머로 바닷물이 가르릉 거리며 밀려드는 소리가 들렸다. 바닷물은 저 멀리에서 보고 들은 어부들의 이야기, 연인들의 이야기 같은 수많은 이야기를 두 사람에게 들려주려는 듯 했다. 바다는 이제 이곳에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몰래 듣고 내일 너른 바다로 나가 가르릉 대며 다른 곳에 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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