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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하거나 뻔한 이야기(36) / 가지 않은 길
게시물ID : readers_3476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철수와영이
추천 : 1
조회수 : 294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0/04/29 21: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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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여자로 인해 남자는 때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또한 때때로 여자를 향한 안쓰러움에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했다. 여자는 늘 일거리 속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나 혼자 이겨내야 할 일이므로 더는 어쩌지 못하고 그냥 먼발치에서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 여자를 바라볼 때마다 발그레한 여자의 얼굴에서 남자는 늘 안온함을 느꼈다. 이제는 여자가 남자의 삶의 한 부분이 되었다. 그런 남자의 감정은 특히 달리기를 할 때 절정을 맞곤 했다.
 
남자는 틈나는 대로 마라톤을 즐기는데 한 달에 한 두 번은 마라톤 대회를 나갔다. 대체로 하프코스를 달리는데 기록도 상당했다. 달리는 일은 참으로 고독한 일이고 단조로운 일인데도 마라톤을 즐기는 사람들은 해마다 늘어나는 것 같다. 남자는 늘 혼자 달렸다. 공설운동장이며 해변이며 시간 틈틈이 달리는 탓에 늘 남자는 승용차 트렁크에 언제든 마라톤을 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하고 다녔다. 달리는 일은 참으로 고독한 일일 텐데도 남자는 쉼 없이 달릴 때 참으로 마음이 평온하다고 했다. 그 평온 속에 여자가 자리를 잡았다.
 
그 후로 남자는 달리기를 하면서 늘 여자를 떠올리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랑해요. 여자가 말했다. 남자는 여자의 투명한 눈동자에 감탄하고, 여자의 환한 미소에 즐거워했다. 남자는 여자의 환한 미소에 지칠 줄 모르고 달린다. 기록은 점점 줄어 거의 세미프로 수준이었다. 그런 기록에 남자는 자랑스러워했고 여자는 놀라워했다.
-그게 다 당신 덕분이야.
-그래? 내가 뭘.
-당신이 마음속에 있는 것만으로도 즐겁거든. 당신을 떠올리면 달리는 단조로운 일조차 즐거워. 한없이. 특히 당신의 아주 간단하고도 명료한 응원 한 마디가 나를 무한 에너자이저로 만들어.
남자의 이런 감정에 대해 여자 역시 마찬가지라고 했다. 서로가 얼굴을 마주하면 그것만으로도 행복감이 밀려들었다.
 
여자가 말했다.
-<가지 않은 길>이란 시를 학창시절 무척이나 좋아했어. 시가 다 기억되지는 않지만 언제나 일상 속에서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이 생길 때마다 떠올리며 가슴이 저리고 아림을 느꼈던 것 같아. 아니 어쩌면 갈 수 없는 길이란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도 했었지. 삶의 갈림길에서 가지 않은 그 길 혹은 갈 수 없는 길을 바라보며 못내 아쉬워하곤 했었지. 가지 않은 그 길에는 용기와 대담함이 더 많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당신과 가지 않은 그 길을 가 보았지. 가지 않은 그 길에는 미지의 아름다움과 경이로움과 또 다른 행복이 있었다는 걸 알았어. 가지 않은 그 길을 당신과 함께하고 있음에 편안함이 느껴지기도 했던 거야. 그런 당신이기에 내게 더없이 소중하다고 느껴졌어. 그럴 때마다 당신이 보고 싶어져. 그런 당신이 참 고마워. 그런데 때로는 가지 않은 그 길은 가지 않은 길로 남아 있을 때 신비로움이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혼돈스러울 때가 있는 것도 사실이야. 어쨌든 가지 않은 그 길을 당신과 갈 수 있는 것 자체만으로 행복하고 감사한 일이야.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가지 않은 낯선 길의 안내자! 당신이 바로 그런 사람이라는 사실에 나는 지금 숨이 막히게 행복해.
 
여자의 눈동자는 밤하늘의 별이 되었다. 그 맑은 눈동자가 남자의 가슴 속으로 깊이 스며들었다. 여자가 남자에게 기대어왔다. 별빛보다 더한 빛이 가슴에 가득했다. 남자는 여자를 깊이 안았다.
-가지 않은 길은 가지 말아야 하는 길은 아닐 거야. 가지 않은 길은 언젠가는 가려고 남겨 둔 마음속의 동화 같은 길이 아닐까? 숲길이 돌아가는 그 끝 너머로 감추어진 가지 않은 길은 미완의 길이고 여백의 길이야. 그런 탓에 가지 않은 길은 가지 말아야 할 길이 아니야. 길이 길로 통하는 세상인 탓에 그 길 꼬불꼬불한 오솔길 어디쯤에 발자국도 찍히지 않은 채 우리들 가슴 속에는 가지 않은 길이 있는 것이야.
 
그 길. 꼬불꼬불한 오솔길 어디쯤에 당신이 있었던 것이지. 숲 속을 비집고 맑은 햇살이 비추일 때 당신은 그 자연이 주는 신비로움에 놀랐고, 그걸 당신은 행복이라 했었고 편안함이라 했었지. 그 길에서 만난 당신을 그런 탓에 사랑하는 것이야.-
남자와 여자는 서로를 부둥키고 한참을 숨죽이고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여자는 남자의 품에 안겨 있는 동안에는 참으로 편하다고 했다. 바다가 그 끝에서 출렁이고 있었다. 여자에게서 나는 체취는 언제나 향긋했다. 때로 상큼한 사과향이기도 하고, 풋풋한 딸기향이기도 했다.
남자는 여자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몸속 구석구석을 모두 기억하겠다는 듯이 쓸어내렸다. 여자는 남자의 손끝에서 머리카락을 찰랑이는가 하면 가는 허리를 뒤틀며 까르르 거리기도 했다. 남자의 손이 여자의 발끝에 이르자 여자는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이 남자의 품으로 기어들었다. 남자는 여자를 오래도록 깊이 안고 있었다.
 
모텔 창문 너머로 길게 별똥별이 스쳐 지났다. 아직도 밤하늘엔 별들이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멀리 바다 끝으로 도시를 밝혀주는 불빛이 가득했다. 늘 도시의 별들은 하늘에 있지 못하고 땅으로 내려와 길거리를 배회하고 있다. 그때부터 별과 함께 반딧불이가 없어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문득 별똥별이라니. 남자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두컴컴한 하늘에 겨우 서너 개 별이 깜빡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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