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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油花)
게시물ID : readers_3496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챠챠브
추천 : 2
조회수 : 277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20/08/18 21:4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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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노인은 캔버스에 물을 부었다.

컵에서부터 쏟아지는 물줄기가 경사면을 타고 이젤 아래로까지 흘러내렸다. 노인은 캔버스 화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기름 물감으로 거칠게 그려진 꽃이 물기를 뚝뚝 떨어트리고 있었다.


집에 불이 났었다. 노인 입장에서 얼마 안 된 사건이었는데, 약 3년쯤 전이었다.


한밤중에 소란으로 잠이 깼더랬다. 낡은 나무 현관문 너머로 시뻘건 그림자가 일렁이는 것을 본 노인은 황급히 방안 가득한 화분들을 둘러보았다. 단 하나라도 잃어선 안될 소중한 창작의 재료들이었다 - 짧지 않은 기간 동안 그 아이들을 그린 그림으로 마법 같은 명성을 얻어냈으니. 그리고 그만큼 정성을 다해 키운 아이들이었다. 그림 그리는 시간보다 아이들을 돌보는 시간이 훨씬 길었대도 과언이 아니었다.


때마침 남자 한 명이 들이닥쳤다. 생존자를 확인한 그는 다짜고짜 무어라고 소리치면서 그를 잡으려고 했다. 노인은 재빨리 그에게 화분 몇 개를 집어 건넸다. 당연히 늙어빠진 노인네보다 방에 있는 아이들부터 내보내야 할 터였다.

그러나 남자는 잔악하게도 받아 들은 화분들을 내팽개치고 노인의 손을 잡아끌었다.


화재는 오래 지나지 않아서 진압되었다. 그러나 이미 불길이 지나간 곳은 어쩔 도리가 없는 노릇이었다. 워낙 밤중이어서 신고가 늦은 탓이었는지, 낡은 목조건물은 성한 곳이 거의 없었다. 노인은 아직 위험하다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시커먼 잿더미와 깨진 화분들만이 즐비했다.


사고로 죽은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노인은 공터 한 구석에서 홀로 장례식을 치렀다. 해마다 한 번씩.

사람들은 꽃에 미쳐서 노망 났다고 했지만, 노인은 아무 말도 듣지 않았다.


노인은 다시 수돗물을 틀어 컵에 받았다.

 

아직도 물을 줘야 할 그림들이 방 안에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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