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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끼리의 갈등 - 비관적 이상주의를 경계하라!
게시물ID : sisa_116219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둥글이8
추천 : 1
조회수 : 384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20/09/04 22:09:50

 

- 원고 -

[ 진보끼리의 갈등 - 비관적 이상주의를 경계하라! ] ‘새로운 세상의 꿈’에 부풀어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미래의 희망’을 얘기하는 이들이 있습다. ‘진보적 이상’을 목 놓아 외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 중 상당수는 가짜이기에 속아 넘어가서는 안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회의주의자입니다. 미래의 희망이 없다고 여깁니다. 지구기후변화로 인류는 종말을 고할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를 해결할 방법이 없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저는 비록 우울한 회의주의자 이지만, 어떻게든 사람들 다둑여서 더 나은 길로 함께 갈 수 있을지 고민하고, 웃음과 긍정을 심어주려고 노력하고 다양한 시도를 해왔습니다. 그런데, 미래의 희망을 꿈꾸는 이들이 늘상 얼굴에 오만 인상을 다 쓰고 주변에 어둠을 토해 내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이들은 다수가 아니라 소수이지만, 목소리가 크고 이슈와 헤게모니를 선점하고 있으니 문제입니다. 그들은 특정 계층, 분파, 진영, 인권의 증진을 위해서 나선다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희망’을 꿈꾼다는 구호를 내걸고 나서면서, 입으로는 끊임없이 절망과 갈등과 분열과 증오를 퍼트리고 있습니다. 어제까지 친구였던 이들과도 조금 비위가 상하면 적으로 규정하는 것을 서슴치 않고, 짜증과 분노와 비난을 쏟아내는 것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사려 깊은 이해와 다둑임을 통해 뭔가를 변화시키려는 의지는 전혀 없고, 자신과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을 봤을 때는 다짜고짜 분노하며 경기를 할 뿐입니다. 타율과 강압으로 사람들을 강제로 바꿔내려 합니다. 심지어 ‘다양한 문화 차이와 해석의 문제’에 대해서 까지 다짜고짜 ‘정의의 심판’을 합니다. ‘인간은 동물에 대한 학대를 멈춰야 한다.’면서 맥없는 정육점 앞에 가서 ‘동물학대 금지’ 피켓을 들고 있는 ‘가열 찬 채식주의자’들의 과오를 상당수의 진보가 답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아직 법으로 정해져 있지 않고, 문화의 차이, 해석의 문제인 상황이라면 끈질긴 설득과 사려 깊은 조정을 통해서 변화를 유도해야 합니다. 상대를 모욕하고, 비난하고, 강제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동물학대 금지’ 피켓을 손에 든 채식주의자들 역시, 또 다른 ‘환경 근본주의자’들로 부터 자동차, 냉장과 세탁기, 에어컨을 쓰고 있는 것에 대해, 신랄한 규탄의 대상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다양한 문화적 차이와 해석의 문제에 대해 함부로 신랄한 심판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민주-진보 진영에 이러한 병폐가 만연해 있습니다. 하지만, 약자가 ‘정의’이고, 약자가 ‘선’ 인줄 알아, 약자의 주장은 뭐든지 옳다고 여기는 ‘약자 제일주의’의 함정에 빠진 민주-진보들은 이런 고민을 전혀 하지 않습니다. ‘상대에 대한 사려 깊은 이해’, ‘다둑임’은 없고, 자신과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을 견디지 못하고, 적으로 규정하고, 타율과 강압으로 상대를 바꿔내려 하는 일방주의가 만연해 있을 뿐입니다. 이들은 이러한 자신들의 활동을 ‘희망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고 얘기함에 주저함이 없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그들이 말하는 희망을 따르려하지 않습니다. 자기들끼리만 어울려서 웅성거립니다. 그들이 말하는 희망은 자기 패거리들 끼리 비를 피하는 처마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입으로 끊임없이 희망을 논하는 이들 주위에 사람들이 모이지 않고, 극단의 갈등과 분열만 빚어지는 이유는 그 때문입니다. 아마 그것은 그들이 겉으로만 ‘희망’을 얘기하고 있을 뿐, 실은 ‘절망’에 빠지고 어둠에 덮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기실은 그들은 극단적인 회의주의자들 보다 훨씬 더 회의적입니다못해, 허무주의에 빠진 이들인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가치와 이상을 줄기차게 떠벌리지만, 실은 스스로도 그것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하여 세상이 캄캄하기 때문에 주변의 모든 것이 적대적으로 여겨지고, 어제까지의 친구였던 이의 작은 이해차이도 견디지 못하여 끊임없이 갈등과 분열을 거듭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들이 ‘희망’을 얘기하면서, ‘신세계’의 구축을 위해 망치를 휘두르고 있으니 미래가 더욱 암울해 지는 것입니다. 절망에서 빠져나올 개인적 궁리부터 해야 할 이들이 세상에 희망을 전하겠다고 포교하고 돌아다니니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 세상을 걱정하기 보다 스스로를 먼저 돌아봐야할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스스로도 가늠하지 못하는 선의는 세상에 악의로 돌아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도 추스르지 못하는 사회운동은 세상을 나락으로 떨어트릴 것은 자명합니다. 스스로도 믿지 않는 희망을 떠벌리면서 그 희망을 성취하기 위해 걸림돌이 되는 사람들을 심판하고 짓밟는 행태를 중단해야 합니다. 차라리 절망적인 세상을 수습하기 위해 주변을 사려 깊게 살피는 것이 세상에는 훨씬 좋습니다. 즉, 비관적 이상주의자보다는, 낙관적 회의주의자가 더 낫다. 자신의 이상이 실현 안된다는 조바심으로 주변을 온통 들 쑤셔 놓고 분열과 갈등으로 몰고 가며 다른 사람을 끊임없이 강압하는 그러한 비관적 이상주의 보다, 인생은 절망적인 것이라고 전제하고 그 절망 속에서 긍정하며, 변화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하나씩 찾아내서 사람들에게 권하는 행태. 낙관적 회의주의자가 되어야 합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로 다른 사람을 강제로 잡아 끌지 말고, 내 행동을 다른 사람이 보고 자연스럽게 따를 수 있게 길을 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에 맹목하는 것보다, 스스로의 앎을 ‘회의’하는 삶이 상대방과 세상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도 좋습니다.
간략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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