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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폐의 역사를 청산하는 것은 시대의 뜻이외다.
게시물ID : sisa_116223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DireK
추천 : 1
조회수 : 674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20/09/05 19:01:02
현한국에서 적폐라고 하는 것들은 소싯적에 고려건국으로부터해서 조선과 개성에서 천도할 때부터 한성주민이던 소수의 명문가들 출신으로 대다수의 국민들이 한갖 무지렁뱅이 농민이던 시절에 고려와 조선 도합 천년동안 한국의 요직은 싸그리 돌려 쳐 먹던 서울의 오랜 거주민들입니다.

 

그런데, 정작 그들은 그들의 실정으로 한국전쟁을 초래해서는 한동안 부산에 피난을 갔기 때문에 정작 20세기 중반 이후의 서울거주의 좃보로 치자면 여느 한국인들과 똑같은 연혁을 지니는 것들에 불과합니다.

그렇지만 학연, 지연, 혈연을 총 동원해서 그들이 한국의 기득권입쇼 요 지랄카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들은 소싯적 붓산바닥 광복동의 댄스홀 새끼덜의 후예다 이 말쌈입니다.

 

전쟁통에 다 뒤져가는 와중에도 남녀가 부둥켜안고는 페로몬 쭉쭉 뽑아내고, 옥시토신 뽕 맞으려고 서로가 둔부와 뱃돼지를 맞대고 뭐 그러다가 꼴리면 보지, 자지 교잡하러 가던 종자들 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여기서 한국사에 대해서 조금은 아는 자들은 알겠지만 애초에 한국은 친일지주정당세력이 이승만을 등에 엎고 정권창출을 했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친일지주라는 것들은 실상 서울거주인 경우가 태반이었습니다. 뭐 좃만한 지주들 말고 진짜 대지주들이라면 말입니다. 유명한 종자들은 공주의 대지주였다는 김갑순이나 옥천, 영동의 갑부 육종관 이런 종자들이었는데, 요즘으로 치면 주소만 공주나 옥천이고, 실상은 서울에 위치한 총독부를 뺀질나게 들락날락거리던 서울에도 사가가 있던 종자들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제주의 고영희 그런 놈들도 있었습니다.

 

https://namu.wiki/w/%ED%83%9C%EC%A1%B0(%EA%B3%A0%EB%A0%A4)?from=%EC%99%95%EA%B1%B4

하지만 흔히 이들 김선평, 권행, 장정필이 이렇게 엄청난 공을 세웠다고 이야기가 되나 고려사에는 이들의 독립된 열전이 전혀 없고[44]다만 고려사 지의 경상도 안동부의 설명에서 고려 태조 왕건이 견훤을 고창에서 패배시켰을 때 이들이 전공을 세워서 김선평(金宣平)을 대광(大匡)으로 권행(權行)과 장길(張吉)을 대상(大相)으로 삼았다는 내용이 있을 뿐이다. 게다가 왕건의 경우 유금필, 홍유, 배현경, 복지겸, 신숭겸, 최응 등의 중앙 조정에서 일하는 자신의 관리들보다 지방의 호족들에게 더 쉽게 높은 벼슬을 내리고 상부로 부르는 면이 많았다. 일례로 왕건은 몽웅역 전투에서 그 지방의 아전인 한씨 성을 가진 사람의 도움에 힘입어 승리했다는 그 한 가지의 이유로 그 사람에게 대광의 벼슬을 내린 반면 박수경의 경우 고려 건국 초창기에 왕건의 명으로 견훤의 침략으로부터 신라를 지키는데 파견되어 견훤의 군대로부터 계속 승리를 거두었고 조물성 전투에서는 다른 장군들과 다르게 유일하게 승리를 거두어 이후 유금필이 왕건을 구원하러 도착할때까지 왕건군이 버틸 수 있는 결정적인 발판을 마련했고 이후 발성 전투에서는 왕건이 견훤군에게 포위를 당해 위기에 처하자 사력을 다해 싸워 왕건을 구하고 이후 일리천 전투에 투입되어 후백제 멸망에 공을 세워 한씨에 비해 비교가 되지 않는 많은 공을 세웠는데도 불구하고 왕건 생전에 대광으로 승진한 적이 없다.

 

위의 나무위키 왕건 항목에 나오는 안동 김씨, 안동 권씨, 안동 장씨, 유씨, 홍씨, 배씨, 복씨, 신씨, 최씨 죄다 한국사에서는 한가닥 해 먹었던 가문들입니다.

 

오늘날의 한국인들은 창씨개명의 결과로 모두 성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에 자신이 양반가문 출신이었던 것으로 착각한다거나 혹은 조선이나 고려조의 기득권들에 대해서 그닥 반감을 가지지 않게 되었지만 창씨개명이라는 것은 일본식 이름으로 바꾼다는 개명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이 없는 자는 성을 만들어서 쓰게 한다는 창씨 또한 포함되어 있던 것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창씨개명 이전만 하더라도 한국인들의 다수집단들은 성을 쓰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거꾸로 성을 쓰는 새끼덜은 모로지 어떤 식으로던 적폐로 행사하려는 뜻을 지닌 구체제 앙시앵레짐이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한국인들과 인종적으로 같은 민족인 퉁구스인들과 혹은 문명화 이후에 가장 큰 영향을 준 허황후로 대표되는 동남아집단들은 성을 쓰지 않습니다.

 

https://ko.wikipedia.org/wiki/%EB%A7%8C%EC%A3%BC_%EC%9D%B4%EB%A6%84

 

만주 이름은 만주족의 성명 문화인데, 만주족에게는 일상에서 성을 사용하지 않는 관행과 이름의 첫 음을 마치 성처럼 사용하는 독특한 관행이 있었다. 예컨대 청 중기의 관원인 나단주(那丹珠, Nadanju)는 사람들로부터 나대인(那大人)이라고 불렸다. ‘나대인’이라는 호칭을 보면 그의 성이 ‘나’인 것 같지만, 사실 그의 성은 ‘교르차(만주어ᡤᡳᡠᡵᡮᠠ Giorca)’였다. 마찬가지로 동치 연간의 고관이었던 뇨후루씨(鈕祜祿氏, 만주어ᠨᡳᠣᡥᡠᡵᡠ
ᡥᠠᠯᠠ
 Niohuru Hala)의 자라풍아(扎拉豐阿, 만주어ᠵᠠᠯᠠᡶᡠᠩᡤᠠ Jalafungga)는 자대야(扎大爺)로 불렸다. 이름의 첫 음인 ‘자’가 ‘대야(大爺)’라는 존칭의 앞에 붙어 마치 성처럼 쓰였던 것이다. 청 제국의 마지막 군주 푸이(溥儀, 만주어ᡦᡠ ᡳ Pu-I의 동생인 푸계(溥傑, 만주어ᡦᡠ ᡤᡳᠶᡝ Pu-Giye)는 말년에 주위 사람들로부터 푸 라오(溥老, Pǔ lǎo)라고 불렸다.

 

 

위의 문장에서 보듯이 만주족들은 성을 쓰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중국식으로 성씨를 써야 될 상황이 오니까 그냥 이름의 첫자를 대애충 둘러댔다는 것입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Thai_name

 

The modern Thai name is a 20th century innovation. For centuries, inhabitants of Siam, now Thailand, did not have surnames. Thais identified themselves by referring to their parents given names or the place they resided. The Siamese government started recording data on Siamese citizens during the reign of King Rama V (1868–1910). The data recorded was minimal: birth date, date of death, household members. It was difficult to distinguish between the king's subjects as many shared the same name. In 1912, two years after the Western-educated Rama VI ascended to the throne, he declared that a birth, death, and marriage registration system would be instituted in Siam. Everyone had to bear a surname to identify themselves properly. In 1913, the first Surname Act was promulgated.[1]

 

태국인들도 20세기전까지는 성을 쓰지 않았습다. 그러다가 라마 5세 때의 개혁으로 없던 성도 만들어 쓰도록 강제했을 뿐입니다. 마치 한국의 창씨개명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소싯적에 한국에 영향을 줬다는 허황후는 당시에 동남아의 패권국가였던 캄보디아계의 부남왕조사람이었지만 이후에 캄보디아는 쇠퇴하면서 태국과 베트남이 오늘날 동남아에서는 패권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전자 조사를 해보면 시베리아 동굴인에 베트남인들을 섞은 것이 한국인이라고 나오는 것은 고대에는 캄보디아계들이 동남아의 패권을 차지했던 것과 연관이 있는 것입니다.

 

어쨌건 오늘날의 베트남인은 중국의 월족들이 남하한 것이기 때문에 성씨를 쓰지만 본디의 동남아문명인들을 성을 쓰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한국인들 또한 20세기 초까지도 다수층은 성을 쓰지 않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당시에 성을 쓴다는 것은 그들은 지배하는 관료층이라는 뜻이었으며, 그러한 세족을 이룬 집단은 대체로 그렇게 세족을 이룰 수 있게 한 권한 자체를 고려조의 왕으로부터 승인받은 경우가 태반이었습니다.

 

즉, 고려조의 적폐들이 20세기까지 꾸준하게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었으며, 명목상의 반정과 같은 것과는 다르게 실상은 정권은 그들의 손아귀내에서 돌고 돌았던 셈입니다.

 

다시 말해서 억지로 강요되었던 창씨개명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한국인들을 누가 구체제 기득권인 적폐의 앙시앵레짐이고, 누구는 그렇지 앟은지 더욱 쉽게 구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창씨개명을 강요해서 적폐와 일반인들을 구분할 수 없도록 섞어놓은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은 민주화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서 이러한 성이 없던 자들이 정권을 창출하는 사회가 되는 것은 당연한 변화입니다. 그러나, 민주주의라는 껍데기만 쓰고서는 실상은 그들의 천년 가문의 원리에 맞게 민주주의를 장악하려는 자들이 친일파 적폐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그러한 작자들이 한국사를 주도하게 된 것은 현대사내에서 그러한 적폐가문을 대표하는 윤보선과 박정희가 야합해서 한국의 정치를 장악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윤보선이라는 놈이야 뭐 윤석열과 같은 아주 오랜 서울의 적폐 가문이던 파평 윤씨 가문이었고, 박정희라는 놈은 그의 친자는 별볼일 없는 한문도 아니고 뭐 실상은 인동 장씨 집안 밑에서 소작이나 하던 성씨 없던 집안이었지만 당시에 군국주의가 대일본제국의 주류담론이던 시절에 군바리를 해 먹었고, 그의 마눌은 친일지주이자 고려-조선계 명문적폐이던 육씨집안이었습니다.

 

 

적어도 이승만 때에는 비록 친일지주정당이던 한민당이었지만 한민당 내에서 지역구를 통해서 올라온 의원들은 한민족의 기득권이 고려계 개성한성적폐들의 나라가 되어야 된다고까지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가 민주당 구파와 신파로 나뉘어진 것입니다.

 

심지어 서울의 오래된 명문가들 중에서도 특권층 위주로 된 나라가 성립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생각한 자들이 신파에 존재했습니다.

반면에 구파라는 것은 특권층 중에서도 더욱 지방엘리트들조차도 배타적으로 몰아내고 그들만의 천하를 주장하던 구체제 한성권력이던 서인과 외척세도세력들이 근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파평 윤씨는 마지막 한국왕 순종의 외척가문이기도 했으므로 당연히 윤보선이 구파의 거두로 추대되었던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한국의 적폐세력은 실상은 왕당파들로부터 근간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부분에서 그들이 윤석열을 추대하려고 드는 것 역시도 그 존재자체가 갸들의 아젠다에 맞기 때문입니다.

 

즉, 윤석열이 현대 당대의 항렬의 윤씨 중에서 가장 위신이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겨우 정치인의 대선주자를 선출한다는 것이 중세 프랑크족의 살릭 법과 같은 그러한 것입니다.

 

 

살릭-법

게르만 족 가운데 프랑크 부족에 속하는 살리 지족의 법. 이 법의 민법에 딸은 토지를 상속받을 수 없다는 규정이 있었는데 이것이 딸의 왕위 계승을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확대되어 백 년 전쟁과 같은 전쟁을 유발하기도 하였다. ⇒규범 표기는 미확정이다.

 

이게 퓨덜리즘이지 뭔 민주주의입니까? 퓨덜리즘식으로 선출된 자에게 수권만 민주주의식으로 받으면 된다는 것이죠. 수권은 다수표결로 완성되니까 조까고 그 형식만 충족시키자는 것입니다.

 

뭐 쉽게 말하면 김정은이도 북한 주민의 100프로의 지지율로 투표를 통해서 수권을 받았으니까 민주적인 방식으로 선출된 선출권력이지 세습권력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혹은 뭐 이런 수준입니다.

 

http://www.smedaily.co.kr/news/articleView.html?idxno=87038

 

[곽영완의 세계窓] 중세의 ‘살릭법’을 연상시키는 일본 우익의 보수성

위의 아티클을 읽어봅시다. 일본 역시도 명목상의 절차만 민주주의일 뿐 일상의 권력은 살릭법으로 군림하던 중세혈연주의집단과도 같은 배타성이 진짜 권력창출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메이지유신의 주역이던 사쓰마, 도사, 조슈, 히젠 출신만 지금까지 해 먹고 있는 중세잽랜드라고 하는 것입니다.

 

참고로 고이즈미는 사쓰마, 아베는 조슈 출신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에 따라서 고이즈미 쥬니어도 앞으로 언젠가는 해 먹을 것이라고 하는데, 정작 마눌을 일본녀가 아니라 외국인 혼혈새끼로 들인 것이 조금 흡집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가독의 승계문제가 조금 고려되었는데, 크리스텔이라는 이 여자가 42살의 고령이라서 승계자를 낳을 가능성이 낮다는 점이 핸디캡이었는데, 마침 임신을 했기 때문에 결혼을 승낙해줫다 뭐 그런 지경입니다.

 

여기서 일본정치의 권력투쟁의 관건은 실상은 가독의 계승이자 출계자를 재생산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크리스텔이라는 여자가 임신을 하고서야 겨우 결혼이 승락되었다고 봐도 무방한 것입니다. 어쩌면 그들은 태아성별감별까지도 했을 수도 있지만 일본의 풍습상으로는 여자만 낳아도 사위를 양자로 들여서 계승하는 것도 인정하기 때문에 태아감별은 굳이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봅니다.

 

2020년 1월 17일에 무사히 장남 고이즈미 미치노스케(小泉道之助)를 출산하였고, 28일 인스타를 통해 근황을 알렸다. '미치노스케'라는 이름은 신지로의 첫째 고모 미치코(道子)의 이름에서 道를 따와서 지은 것이다. 양친의 이혼 이후 자신과 을 길러주신 고모를 생각하며 신지로가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뭐 아들 낳았다니까 요절하지만 않으면 여자입장으로는 신분상승이네요. 유럽에서 하빨인 것보다 일본의 지배계층의 승계자를 낳았으니 크리스텔 신분상승했네요.

뭐 여기서 일본의 투표시스템 그딴 거는 그냥 모양새라는게 각 나오잖아. 미치노스케라는 한국나이로 1살인 놈은 아직 공천도 안 받았지만 실상 이미 지배층이라는 거다.

 

 

그리고, 윤석열은 물론 자녀는 없지만 일본만큼 노골적인 혈연주의 사회는 아니더라도 조선조 역시도 붕당을 통해서 가문들이 결탁하긴 했습니다.

다만 일본과 다른 점은 고이즈미 손자면 자동문이던 것과는 달라서 붕당내에서 탑이 되려면 그 것 내에서는 실력과 인망이 있어야지 도당의 원로나 실세가 될 수 있다는 것 정도.

 

그러나 이 것도 충분히 중세적입니다. 그리고, 한국의 보수는 이러한 자들의 도당임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물론 주호영이마냥 바닥에서 올라온 엘리트들도 있지만 홍x표 이름을 쓰는 당홍계 34세들 홍씨나 민경욱의 민씨는 그런 놈들이라고 간주하여야 합니다.

 

물론 민주당내에서도 그러한 파트리키들은 존재하기 합니다.

 

홍준표라는 사람도 뭐 창녕출신이라고는 하지만 그 스스로가 애초에 그 집단이 TK의 성골은 아니지만 진골은 된다고 언급했으니까 진정한 촌동네 출신 농어촌전형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로마 공화정 사회 초기에는 원로원 의원과 각 공직은 혈통 귀족인 파트리키가 독점하고 있었지만, 세력을 늘린 플레브스도 신분 투쟁을 거쳐 이러한 지위에 취임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도 로마 사회에서는 모든 성인 남성에게 원로원 의원의 길이 열려 있었다고는 말하기 어려웠고, 실질적으로는 기존의 파트리키 이외에 부유한 상층 플레브스만 원로원을 구성했다. 이러한 원로원을 구성하는 파트리키와 상층 플레브스가 일체화 된 것이 노빌레스라고 하였으며 공화정 중기 이후 노빌레스 가문 출신이 아닌 사람이 로마의 지배 계층에 참가하는 것은 어려워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 어려움을 극복하고 노빌레스 가문 출신 이외의 지배 계층에 참가한 자, 구체적으로는 최고위 공직인 집정관이 된 사람을 ‘노부스 호모’라고 부른다.

노부스 호모의 정의는 노빌레스의 정의에 따라 달라지게 된다. 어느 시대까지 지배 계층에 참여한 사람이 노빌레스에 포함되었는지, 어느 시대 이후 노빌레스에 포함되지 않고 노부스 호모로 취급되는 지에 대해 명확한 구분은 어렵다. 그러나 대개 조상 중에 집정관급 공직자를 배출한 적이 플레브스 계열의 가문 출신이 노부스 호모로 정의된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가 꼽힌다.

 

신인들은 공직자 선거 등에서는 노빌레스 후보에게 불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로마 제국의 제정기로 접어들면서 황제를 중심으로 한 지배 구조 안에서 신분의 유동화도 볼 수 있었고, 공화정 기간만큼 특별한 존재가 없어졌다.

 

https://ko.wikipedia.org/wiki/%EB%85%B8%EB%B6%80%EC%8A%A4_%ED%98%B8%EB%AA%A8

 

한국 사회도 민주정 초기에는 왕정 시절의 전통에 따라서 혈통 귀족인 파트리키가 의회를 독점하고 있었고, 서울대도 소싯적에는 개나 소나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본고사만 있던 시절에는 연이 있어서 서울대 출신의 교수나 조교로부터 과외라도 받지 않는 종자들은 그 근처도 갈 수 없었습니다.

실상 파트리키 명문가문 종자들만 서울대에 갈 수 있었고, 당시에 부산고나 경북고에서 조금 간다고 했지만 그들은 실상 동란 때문에 내려와있던 종자들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전두환이라는 놈이 학력고사를 성립시키고 나서야 파트리키들의 입시특권이 사라졌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전두환의 쿠데타 동지들은 파트리키는 아니었기 때문에 2세들은 그 축에 들지 못하는 종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전대갈이라는 놈이 개혁을 한 것입니다.

 

즉 오늘날의 50년대 비평준화 시대 세대들은 고교입시 결과에 따라서 이미 고등학교 때에 얼추 신분이 정해져서 16세 때에 이 바닥에서는 아무리 공부해도 절대로 서울대나 연고대는 못 간다는 것이 정해져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러하던 시대에 기울어진 축구장에서 명분대를 응당가던 맥시코의 상류층 같은 놈들이 80년대 이전 학번세대들인 것입니다. 물론 80년대 이후라고 해서 그 기득권이 해소되었던 것도 아니며, 그 이후에도 특목고 따위로 꼼수를 부려왔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에 이르면 교육에 아낌없이 돈을 투자할 수 있게 된 사업가 출신의 로마로 치자면 플레브스들이 대두하게 되면서 한국의 정치지형내에서 더 이상 파트리키들이 독주하는 체제만은 아니다라고 바뀌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거꾸로 말하면 90년대 이후에는 유전명문 무전지잡 의 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한국의 지금까지의 주자들에 대해서 평하자면 윤석열 따위가 노미네이트 되는 부분은 아직도 정가에서는 파트리키가 먹어준다는 미개한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반면에 민주당은 각계각층 인사들이 골고루 올라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 쪽 진영은 적폐라는 말을 쳐 들으면서도 아직도 바꾸려고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게 적폐의 수준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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