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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단편) 바닥 없는 절벽
게시물ID : mystery_931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xlros0000
추천 : 5
조회수 : 2417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20/09/25 15: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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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난 지금 떨어지고 있다. 자살하려고 절벽에서 뛰어 내렸는 데 바닥에 닿지 않는다. 지금 약 30분째 추락만 하고 있는 거 같다. 뭐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게 확실하다. 이렇게 바닥에 충돌하지 않고 떨어지기만 하면 난 어떻게 죽을까? 아사 밖에 없다. 굶어죽는 건 최악이다. 난 바닥에 머리를 부딫쳐 뇌수가 터지면서 즉사하고 싶다. 고통도 없이 한번에 죽고 싶었다. 이 죽음을 위해서 난 매일 새벽 동네 수영장 점프대에서 머리 부터 입수하는 연습을 했다. 같이 수영을 하던 강습생들은 날로 발전하는 내 다이빙 실력을 보고 박수를 쳐줬다. 그 사람들은 내가 제대로 자살하기 위해서 이 짓을 하고 있는지 꿈에도 모른다. 이만하면 됐다 싶을 때 난 이 절벽을 올라 뛰어 내린거다. 하지만 아직까지 난 추락만 하고 있다.

추락만 하고 있는지 하루가 지난 거 같았다. 예전에 번지점프 할 때 바닥까지 닿는 데 2.5초의 시간이 걸렸다.번지점프가 짜릿한 이유는 높은 데서 뛰어내려서가 아니다. 뛰어내리는 순간이 매우 짧기 때문이다. 난 지금 약 24시간 동안 추락하면서 그 사실을 깨달았다. 추락하고 있다는 건 별로 짜릿하지 않다. 하루 동안 추락만 하고 있으니 추락이라는 게 굉장히 지루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폰이라도 손에 쥐고 뛰어 내릴 걸 후회스럽다.

대한민국에서 뛰어내려서 끝없이 아래로만 추락한다면 지구 반대편에 닿는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궁금해졌다. 대한민국의 반대편에 있는 나라는 우루과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우루과이는 한번도 가보지 못한 나라다. 딱히 가고 싶다는 생각한적도 없다. 내가 알고 있는 우루과이는 축구를 꽤 하는 나라라는 정도다. 루이스 수아레스가 우루과이 출신이라지. 이 참에 우루과이에 떨어져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한다. 우루과이에서 축구를 배워 손흥민을 뛰어넘는 제 2의 인생을 사는 거다. 돈과 명예를 얻는 삶은 모두가 바라지 않는가.

이런 저런 잡생각을 하다보니 1주일째 추락 중이다. 1주일 째 추락 이라는 문장은 그리 낯설지 않다. 내가 산 주식은 늘 1주일을 넘게 추락만 했기 때문이다. 그 주식은 1주일 동안 추락만 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처럼 이런 저런 생각을 했을까. 1주일 동안 추락만 하면서 잠을 한숨도 자지 못했는 데 이제 잠이 오기 시작한다. 밤하늘을 바라봤다. 밤하늘의 별은 모양도 크기도 그대로였다. 이렇게 추락만 하고 있는데도 별의 크기가 그대로라는 사실이 신기했다. 점점 멀어질수록 더 작아져야 정상이 아닌가? 

빗물이 나의 단잠을 깨운다. 1주일 넘게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난 빗물을 허겁지겁 받아 먹었다. 죽겠다는 놈이 빗물을 받아 먹는 꼴이 우스웠다. 누워서 급하게 빗물을 마시다 보니 사레가 걸려 콜록거렸다. 사레 걸려 사람이 죽기도 하는가 라는 생각을 잠시 했다. 하지만 사레 걸려서 죽는건 죽기 보다 싫었다. 

보름 가까이 추락하면서 먹은 거라고는 빗물 뿐이다. 살이 점점 빠지는게 느껴진다. 추락하는 속도가 예전 같지가 않다. 살이 빠져 옷은 바람에 더욱 나풀거렸다. 바람에 펄럭거리는 옷가지 소리가 꽤 듣기 좋다. 이 펄럭거림이 아직 내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거 같았다. 

육안으로 보기에도 살이 굉장히 많이 빠져 이제 뼈 밖에 남지 않은 거 같다. 내가 이대로 굶어죽는다면 시체는 어떻게 되는 걸까? 끝없이 추락만 계속한다면 내 썩어 빠진 육신은 바람에 이리저리 찧겨서 공중 분해가 될까. 풍장이다. 그래 풍장. 땅 속에 묻히지 않고 바람에 내 살과 뼈가 나부끼며 세상을 떠돌다가 어딘가에 안착하는 거다. 머리카락은 유럽에 다리는 아프리카에 팔은 태평양에 갈비뼈는 남미에 떨어지면 죽어서야 내 육신은 온 세계를 여행하는 거나 다름없다. 살아생전에 해보지 못한 세계여행을 죽어서 하는 거다. 답답한 땅 속에 묻히는 것 보다 훨씬 다이나믹하지 않는가.

이제 추락만 하고 있는지 한달이 다 된거 같다. 정신이 몽롱해지고 아득해진다. 이렇게 계속 떨어지고 있다보니 추락하고 있다는 감각이 무뎌진다. 그냥 에어베드 위에 계속 누워 있는 듯한 기분이다. 내 몸이 추락하는 지 떠오르고 있는지 구분이 안된다. 마치 시속 300km로 달리는 기차 안에서 달리고 있으면 내가 앞으로 가고 있는지 뒤로 가고 있는지 아득해지는 것과 같다. 나의 감각이 이 세상의 물리법칙을 거르고 있는 느낌이다.

그래. 난 사실 떨어지고 있지만 날고 있는 거나 다름없다. 바닥에 닿지 않는 이상 난 지금 계속 하늘을 떠있는 거다. 날고 있다는 게 별거 아니다. 바닥을 치지만 않는다면 난 하늘을 날고 있는 거다. 어렸을 적 부터 난 하늘을 날고 싶었다. 하지만 중력의 법칙이 나를 땅에 뿌리 박게 했다. 하지만 지금 하늘 위에 있다. 영원히 땅에 떨어지지 않는 하늘. 거기에 내가 있다. 난 아마 머지 않아 죽을 것이다. 내 육신이 바람에 찢겨 날려도 이곳에서는 내 육신도 바닥에 닿지 못할 것이다. 바닥이 없는 기이한 절벽. 난 죽어서도 영원히 허공을 떠돌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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