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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냄새와 마음.
게시물ID : humordata_188040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현장노동자
추천 : 9
조회수 : 2127회
댓글수 : 8개
등록시간 : 2020/10/07 00:46:07


오래된 골목을 걸으면 골목냄새가 난다.
골목냄새는 어디든 비슷하다. 하수구냄새. 빛바랜 이끼냄새.
골목 구석에서 썩어가는 쓰레기냄새. 지하실에서부터 올라오는
습기냄새. 온통 끝과 우울함 적막함과 낡은것들의 냄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식냄새와 어느집 특유의 냄새들이 뒤섞여
아직은 부정적인 것들 사이에 사는것이 있소 하는것이 골목냄새다.


골목냄새에는 세월도 담겨져 있다.
그건, 골목 담벼락 낙서하던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동네 어귀 곰팡이 슨 냄새 나는 구멍가게와 파마약 냄새 사이로
까르르대던 아줌마 할머니들을 떠오르게 한다. 골목 한켠
평상에 앉아 사이다 김이 다 빠질때까지 기다렸다 마시는
할아버지를 떠오르게 한다.

또 골목은 어린시절 집을 떠올리게 한다.
괘종시계 울던 가을밤 자개장 벽 틈새로 사라지던 바퀴벌레를
떠올리게 한다. 골드스타 냉장고와 이름모를 석유 스토브를
떠올리게 한다. 겨울날 오후 네시 나절에 얼어터져 못쓰게 된
수돗가 수도꼭지를 떠올리게 한다. 귀신이 나올것같이 무섭던
재래식 화장실에 담배 하나 들고 무심히 걸어갔던 아버지를
떠올리게 한다. 술취해 고성방가하던 옆집 공장다니던 아저씨를
떠올리게 한다.


떠오르는 생각들은 빨리 사그라든다.
골목냄새가 진해질수록 내가 알던 떠올림들과 이 골목의 냄새는
다른 종류의 것임을 깨닫는다. 골목의 냄새는 옛날 기억을
떠올리는 동시에 이질적인 현대의 것들로 채워져 있어 완전히
옛날것이 아님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가령 과거 스텔라가 서있던
골목초입에는 앞자리 세개의 번호판이 달린 자동차가 있고
신성슈퍼가 있을 자리에는 젊은이들이 만든 카페가 있다.
대승문방구가 있던 자리에는 파리바게트가 
천재와둔재 오락실 지하는 피씨방이 있다.


그래서 내가 살던 골목의 냄새를 떠올리면서도 이질적인 것들에
의문을 느끼는 순간 그것은 옛 냄새가 아닌 것이다.


욕심이다. 옛 정취를 느끼면 예전에 그랬지 하고 팔짱을 끼면
되는 일을 여기엔 예전냄새를 현대의 것들이 덮고있다며 불평한다.
그것은 아주 되먹지 못한 투정이다. 발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투정부리는건 감성이란 이름으로 포장된
애잔한 현재의 내 현실이 과거를 그리워하는 까닭일테다.

오후 다섯시 나는 면식도 없는 6호선 무슨역 모처 골목 카페에 앉아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카마라조프의 딸들을 읽다
"옘병 여긴 재개발도 안되나." 하고 중얼거린 채 읽던책을 덮고
그윽하게 계속 골목만을 바라보다 우연한 생각들이 떠올랐던 것을
 이렇게 글로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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