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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두순이 교도소에서 바뀌지 않은 이유.
게시물ID : sisa_116604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둥글이8
추천 : 4
조회수 : 1174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0/12/08 10:40:09
2015년 대구 구치소 생활을 할 당시. 피검사 받으러 의료실에서 대기 하고 있는데, 옆에 앉아 있던 성폭행범 한 명이 땅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쉬며 내게 자문을 구해오는 것이었다.
“정말 앞으로 교도소 생활 어떻게 해야 한데요?”
몇 년이나 살아야 하냐고 물으니 7년 살아야 한단다. 과실치사도 5년 형 이내인데 7년 형이라면 그 범죄의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도 없다.
그의 걱정의 요지는 이런 것이다. 밤에 자리 깔고 누우면 어깨가 서로 부딪칠 정도로 비좁은 공간에 예닐곱 명의 사람들이 함께 생활하면서, 반찬 양 배분하는 것 가지고 싸우고, 화장실 때문에 싸우고, 물품 많이 쓴다고 싸우고, 영치금도 없으면서 먹기만 한다면서 구박받아야 하는 생활을 어떻게 견디냐는 것이다.
한 방에 한 명씩 ‘군기’ 잡으라고 배정되는 조폭에게 기가 죽어 눈치나 보면서 추위와 더위를 버티며 1년 365일 내내 비좁은 감방 안에서 지내야 하는 생활을 어떻게 견뎌야 하냐는 물음이었다. 저지른 죄에 대한 참회와 반성보다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고민만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다. 이런 재소자가 수감 생활을 통해 재활·갱생의 의지를 불태워 인간성을 회복하고 사회에 제대로 복귀할 수 있을까.
교도소를 가보지 않은 이들은, 죄지은 사람 교도소 보내면 새사람 되어 나오는 줄 안다. 범죄자들을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는 ‘구속’ 결정이 내려지면 그간 시달린 문제를 일단락하고 상대를 응징했다는 안도감과 일종의 통쾌감을 느낀다. “드디어 정의가 세워졌구나! 교도소 가서 정신 차려라!” 하고 말이다. 그것은 안타깝게도 피해자의 희망일 따름이다. 가해자인 수감자의 입장에서는 교도소 들어가면서 더더욱 심한 정신적 피폐를 겪고 잠재적 범죄가능성을 오히려 높이게 된다. 교도소는 어둠에 잠식된 이들이 한 자리에 모여 그 어두움을 나누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그러한 이들일수록 주변에 돌봐줄 사람이 없어 옥바라지는커녕 영치금도 들어올 일이 없다. 1,400원짜리 밥을 먹고 난 후 허기가 진 상태가 이어지고 이 허기가 울화로 번져 사소한 문제에도 다툼이 일어난다. 김치 한 조각, 밥 한 숟가락 때문에 수시로 싸움이 일어난다. 그렇게 갈등을 빚어 원수가 된 사람들과도 비좁은 공간에서 살을 부비며 잠을 청해야 한다. 1인당 할당 된 의료비는 1년에 36만 원 정도, 불치병 걸려 치료도 못 받고 쓸쓸히 감방에서 죽어 간 이들이 부지기수다.
마음은 더욱 닫히고, 열등과 상실, 히스테리, 피해의식이 심화된다. 지금의 대한민국 교도소가 재활·갱생의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말은 현직 교도관들이 하는 소리다. 이처럼 인간의 존엄이 짓밟히는 극도의 소외와 상실의 장에서, 나에게 자문을 구하던 그 남성은 수감기간 내내 자기 처신에만 몰입하고 인격은 뒤틀리게 될 것이다. 더더욱 편협하고 조잡한 자아상과 기괴한 성욕만 키워 출소하게 될 것은 뻔한 일이다.
그렇기에 어떤 사건에 대한 무턱댄 ‘응징주의’는 우리 사회를 더욱 어둡게 만들어내는 역할을 함을 알아야 한다. 성폭력에 관대하자는 것도 아니고, 성폭력범을 동정하는 얘기도 아니다. 범죄자를 처벌하는 것과 현실을 이해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특히 사회의 구조적 약자인 여성의 성을 유린하고 착취하는 성폭력범에 대한 처벌은 강화해야 한다. 하지만 그들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재활·갱생시켜 지역사회로 돌려보낼 수 있는 기회를 늘려야 한다. 이것이 어쩌면 피해자를 위한 가장 현명한 보호 대책이다.
다행히 10년 전부터 성폭력 사범을 대상으로 사회복귀를 돕기 위해 여러 곳의 교도소에서 성폭력범에 대한 심리치료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가석방자들을 대상으로 보호관찰 교육도 벌이고 있다. 세금과 인력의 투입에 힘입어 지난 10년 동안 성폭행 재범률이 급격히 떨어졌다. 하지만 한 해 3만 건이 넘는 성폭력 범죄와 재범률을 더욱 줄이기 위해 더 큰 이해와 관심이 필요한 상황이다.
하지만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는 범죄자를 이해하려고 하면 두둔하는 자로 매도당하기 십상이다. 선악의 이분법이 다양한 논의 구조를 막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냉정하게 판단해야 한다. 그 작은 실마리와 리듬을 놓친 결과는 나비효과로 전체 사회에 부정적 파동을 일으킬 수 있다.
(중략)
이상은 작년에 나온 ‘둥글이 싸움의 철학’에서 일부 발췌한 부분이다.
조두순 출소 상황을 보며 모든 문제를 ‘응징주의’의 관점에서만 바라보는 세태에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이들은 특별법을 만들어 조두순을 감옥에 더 가둬야 한다고 하고, 어떤 이들은 조두순이 나오자 마자 응징을 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고, 언론에서는 이미 조두순의 몽타주를 그려 ‘공공의 이익’이라는 명목으로 공개한 터이다. 조두순에 대한 불안과 공포가 쓰나미가 되어 전국을 강타하고 있고, ‘그런 짐승같은 놈’은 ‘저 세상으로 보내야 한다’는 국민적 결의가 마치 정의의 구현 인 듯 이곳 저곳에서 경쟁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물론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얼마나 흉악한 짓을 저질렀으면 아직까지 사람들의 뇌리 속에 그 충격이 가시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앞서 거론한 것처럼, 그러한 맹렬한 응징의 결의는 문제의 다른 쪽을 못 보게 가리는 역할을 할 수 있음도 고려해야 한다. ‘조두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그런 류의 범죄자들에 대한 대응 방식이 다각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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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사형에 처한다고 해서 범죄율이 줄어드는 것이 아님은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 세계 각국에서 사형 제도를 없애는 이유는, 사형제 자체가 반윤리적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형으로 범죄율이 줄어들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과거에는 누군가 잘못하면 ‘범죄 응징론’으로 엄벌에 처하는 방식을 취했다. 그럼에도 재범률이 늘어나는 것이다. 하여 심리학자들과 문화인류학자, 범죄문제 전문가들이 모여서 다른 길을 찾기 시작했다. 범죄를 저지른 개개인의 정신위생을 고려하는 ‘개인 치료론’이 대두되었다. 개인의 정신을 분석해 들어가 보면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환경과 상처를 발견할 수 있었고, 그것을 응징하는 것보다는 치료해 주는 것에 초점이 맞춰졌다. 선진국의 교정당국은 이 원리를 1970년대부터 교도소에 적용하기 시작했다. 수감자들의 처우를 대폭 향상시켰고, 심리상담 등의 치료도 병행하며 자존감을 향상시킬 방법을 모색했다.
한국의 교도소 수감자들에게 제공되는 식사는 한 끼 1,400원 남짓, 그야말로 입에 풀칠할 수준이다. 그 밖의 처우 역시 형편없다. 이에 비해, 선진국들의 교도소는 한 끼 4,000원이 넘는 식사와 한국에 비하면 호텔 같은 교도소 생활을 제공한다. 개인 TV, 노트북, 휴대전화를 허용하는 나라도 있고, 승마, 낚시, 스키도 즐길 수 있게 편의시설을 제공하며,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한 개방형 교도소를 운영하는 나라가 여러 곳 있다. 수감자의 상처를 이해하고 다독이며 자존감을 높여준 결과 재범률이 뚜렷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이를 임파워먼트(권리강화)라 한다.
이에 반해 한국의 교도소는 재소자들의 권리감을 박탈하고, 치욕을 주며, 자아에 상처를 내서 더 흉악한 괴물을 만들어 출소시킨다. 한국 사회의 ‘응징문화’의 기반 하에 교도소가 세워진 때문이다. 그 교도소에서 출소한 범죄자들이 지 버릇 개 줄리 만무하고, 이를 대하는 한국인들이 거듭 ‘응징 결의’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이러한 악순환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이해’와 ‘사랑’이다.
상실과 분노, 불안과 공포가 이끄는데로 반응하지 않고 한발 물러나 여유를 가져야 한다. 지구력과 집중력을 가지고 눈앞에 놓인 상황을 직시하다 보면 다른 길이 열릴 수 있다. 지금까지의 방법으로는 문제의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기에 새로운 시야로 세상을 봐야한다는 것이다.
그리하면 조두순을 쳐 죽이고 싶은 결의보다는, 조두순 같은 이를 있게 만드는 세상의 변화를 위해 각자가 할 수 있는 ‘일상의 작은 실천꺼리’들이 더욱 관심이 갈 수 있다.
● 참고로 어떤 범죄자의 인성이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인가? ‘환경’적 요소인가에 대한 학자들의 논의와 연구가 수세기에 걸쳐 이어졌다. 전적으로 ‘선천적’으로 타고 난 것이라면, 온전히 그 범죄는 그 당사자의 책임의 문제가 될 것이고, 주변 ‘환경적’요인이 크다면, 이 사회를 살아가는 각자의 구성원들도 책임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현재는 그 두 가지 요소가 접목된 모델이 주로 사용되고 있다. 다만 비중의 차이만 구분할 따름이다. 사람에 따라 ‘선천적’ 요인을 더 강하게 받은 이들이 있고, ‘환경’에 밀접한 영향을 받는 사람이 있다는 식으로.
더군다나 ‘조두순이 선천적으로 100% 악마의 유전인자를 받고 태어났기에 짐승 대하듯 해야한다’고 규정할 수도 없는 것이 그에는 ‘인종주의’의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 악마성을 100% 유전 받았다면, 스스로 결정권이 없는 이에게 그 결과의 책임이 전가하는 것에도 철학적 판단의 문제가 따른다. 결국 조두순을 비난은 하더라도 그런 인물을 있게 만들어내는데 우리 각자의 삶이 한 몫 하지 않았는지 우리 삶의 환경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범죄가 발생된 것에는 공동체의 책임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딱히 조두순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 땅의 모든 범죄, 분노, 시기, 질투, 분쟁, 강압, 착취, 폭력의 문제는 우리 각자의 욕망이 분출되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 중에 극단적으로 심한 인물이 조두순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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