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설탕과 오렌지 2
게시물ID : readers_3561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낮에나온달
추천 : 1
조회수 : 209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21/04/12 23:27:44
옵션
  • 창작글
"너까지는 오늘도 설탕산에서 설탕을 나른다. 
나머지는 전부 오렌지에 도전한다."

나는 속으로 만세를 불렀다. 
오렌지 조가 된 우리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어두웠고 
이미 자신이 죽을 예감을 했는지 유언을 남기는 우리도 있었다. 

그런 그들 앞에서 겉으로 좋아하는 기색을 내기엔 
너무 염치없는 짓이었기에 나는 속으로만 좋아했다.

뭣 모르고 이제 성인이 된 우리는 처음 하는 작업에 신나하고 있었지만 
나는 속으로 안타까움을 표했다.
인간이 자신의 오렌지를 노리는 우리들을 가만 놔둘 리 없었다.

오렌지 작업조는 저녁때를 위해 마지막 휴식을 가지러 해산했고
나와 같은 설탕 작업조는 굴 밖으로 나가 설탕산으로 향했다.

목숨을 걸지 않은 건 다행이지만 설탕을 나르는 것도 나름 고된 작업이었다.
속된 작업으로 이미 많이 줄어들은 설탕산은 이제 며칠만 있으면 없어질 정도였고
어제 보고를 들은 감독관도 그 점을 염려하고 있었다.

설탕 한 조각을 등에 짊어지는데 갑자기 머리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벌써 몇 달째 겪은 일이지만 나는 이 그림자가 드리울 때마다 두려움을 느꼈다.

세상에 저리 큰 생물이 존재한다니 
가끔 굴에 있는 애벌레까지 다 합치면 어떨까 생각도 해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저 인간의 무릎에도 못 닿을 거 같다.
그 정도로 인간이란 정말 어마 무시한 크기의 생물이었다.

인간의 표정은 우울해 보였다. 
그리고 인간의 표정은 늘 이랬다.
입꼬리는 늘 축 늘어져 있고 
눈은 마치 우리가 아닌 허공 속 어딘가를 보는 거 같았다. 

물끄러미 우리를 보던 인간의 손이 기울어졌고 
공중에서 하얀 가루가 한 알갱이 한 알갱이 비 되어 내리기 시작했다.
다시 설탕산이 원래의 크기만큼 쌓이자 그제서야 인간도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고된 하루의 노동이 끝났다. 
설탕산이 채워졌다는 고무적인 소식을 들었지만 오늘도 감독관의 표정은 침울했다.
오렌지 작업조는 전멸했으며 오렌지는 단 한 알갱이조차 얻지 못했을 게 분명했다.

히스테리가 극심해진 여왕님은 새로운 감독관을 뽑아버리고 
지금 감독관을 내일 오렌지 작업조에 보내버릴지도 모른다. 
물론 나도 끌려갈지 모르지만... 

어쨌든 나는 내가 운이 좋은 우리이길 바랐다.

그렇게 시간은 매일 단조롭게 흘러갔다. 
나는 운이 좋은 우리였고 3개월 동안 설탕 나르는 작업만 반복했다.

그동안 감독관은 셀 수 없이 바뀌었고
오렌지 작업조가 너무 많이 죽어버려 잠시 작업을 멈춘 적도 있었지만
우리의 오렌지에 대한 도전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오렌지는 단 한 알갱이조차 얻지 못했다.

그러던 인간의 단조로운 패턴에 변화가 생겼다.  
그날은 특이하게도 아침에 나간 인간이 저녁이 될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한밤중이 되어서야 돌아온 인간은 정찰병의 보고에 의하면 술이 만취된 채 
침대에 쓰러져 자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인간의 패턴은 변했다. 
그는 일어나면 나가버렸고 밤이 되면 만취되어 돌아왔다.

설탕산이 점점 줄어가고 있었기에 우리들의 걱정은 계속되었지만 
인간은 채워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인간이 낮부터 나가는 일이 매일 반복되며 설탕산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다행인 건 여왕님의 히스테리가 줄어든 것이었다.
며칠 동안 오렌지는 구경도 할 수 없었고 아무리 여왕님이라도
없는 걸 구해오라 할 순 없었는지 체념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일주일 후 점점 고갈돼가던 설탕산이 드디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우리는 인간이 채워줄 거란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안일했던 것이다.

그날 밤 여왕님 굴에선 몇몇 책임자들과 함께 긴급회의가 열렸다.
이제 설탕이 없으므로 모든 우리가 먹을 식량은 이틀 치 뿐이었고
떠나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결정할 때였다.

그 순간 정찰병의 보고가 들어왔다. 
인간이 들어왔고 손에 오렌지를 들고 있다는 보고였다.
정찰병의 보고에 우리는 야간에 긴급 소집되었다.

"이제 우리들은 먹을게 거의 다 떨어져 여길 떠나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오렌지 단 한 알갱이조차 얻질 못했다.
이제 마지막으로 여왕님을 위해 목숨을 걸고 오렌지 한 알갱이라도 가져와야 한다!"

감독관의 말에 우리들은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떠밀리듯이 밖으로 나갔다.
우리를 애타게 했던 주황빛 매혹적이고 동그란 자태의 오렌지가
두 조각 정도 빈 채로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술이 거나하게 취한 인간은 오렌지를 먹다 잠든 것인지 침대에 가만히 누워있었다.

발걸음 소리조차 죽이며 우리는 오렌지에게 다가갔다.
조심스레 책상 다리를 타고 올라 우리는 그토록 꿈에 그리던 오렌지에 다가가는데 성공했다.

혹시나 인간이 깰까 조심스레 오렌지를 분해한 우리는 한 알갱이씩 옮기기 시작했다.
말은 할 수 없었지만 우리들의 얼굴은 이미 승자의 얼굴이었다.
발걸음은 가벼웠고 몇몇은 콧노래를 부르고 싶은 걸 억지로 참는듯했다.
몇 개월에 걸친 도전이 드디어 빛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문득 나는 인간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몇 개월간의 사투 끝에 승리한 우리와 다르게 패배한 그의 표정은 어떨까? 
호기심에 못이겨 고개를 돌리니 창백한 얼굴의 인간이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패배한 걸 모르는 걸까? 
이상하다 생각은 들었지만 나는 오렌지를 나르는데 집중했다. 
만약 인간이 지금 깨어나기라도 한다면 우리는 전부 죽을게 틀림없었다.
드디어 처음 우리가 입구에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굴에선 환호가 울려 퍼졌다. 

드디어 오렌지를 가져오는데 성공했고 그날 밤 굴에는 뒤늦은 오렌지 파티가 열렸다. 
오렌지를 가져오는데 성공했다는 보고에 여왕님이 기뻐하며 
모든 우리들에게 오렌지를 나누어 준 것이다.

조그만 오렌지 알갱이를 든 채 나는 왠지 인간을 떠올렸다.

그의 패턴은 왜 변했을까?
왜 설탕산을 채워주지 않는 걸까?
그는 우리가 가지러 올 걸 알면서도 왜 오렌지를 다 먹지 않았을까?
여러 생각들이 머릿속에 교차하는 동안 
여왕님을 미치게 했던 향긋한 오렌지 냄새가 나의 후각을 유혹했다.

더 참기 힘들어진 나는 오렌지 조금을 입에 넣었고 
새콤하고 단맛이 나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내 평생 이렇게 맛있는 음식은 처음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물론 평생 먹어본 거라곤 설탕밖에 없는 입이긴 했지만...
이 맛은 아마 평생 가도 잊지 못할 것이다.

어찌나 맛있는지 조금씩이라도 줄어드는 오렌지가 아까울 정도였고
그렇다고 먹고 있는 입을 멈출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 순간 내 앞에 있던 우리가 갑자기 더듬이를 늘어트린 채 바닥에 쓰러졌다.

"무 무슨 일..."

그에게 다가가려던 내 다리가 허물어졌다. 
나는 더듬이를 움직이려 했지만 그것 역시 땅에 늘어졌다.
그리고 내 희미해져 가는 시야로 모든 우리가 나처럼 허물어져 가는 광경이 보였다.
흐려져가는 의식 속 나는 인간의 희미한 웃음을 떠올렸다.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