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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내 손은 네게 닿지 않는다
게시물ID : lovestory_9187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통통볼
추천 : 4
조회수 : 316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1/05/23 20:49:21

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Vaq7rZxJW-k

 

 

 

 

1.jpg

 

윤동주, 흰 그림자




황혼이 짙어지는 길모금에서

하루 종일 시들은 귀를 가만히 기울이면

땅거미 옮겨지는 발자취 소리


발자취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나는 총명했던가요


이제 어리석게도 모든 것을 깨달은 다음

오래 마음 깊은 속에

괴로워하던 수많은 나를

하나, 둘 제 고향으로 돌려보내면

거리모퉁이 어둠 속으로

소리 없이 사라지는 흰 그림자


흰 그림자들

연연히 사랑하던 흰 그림자들


내 모든 것을 돌려보낸 뒤

허전히 뒷골목을 돌아

황혼처럼 물드는 내 방으로 돌아오면


신념이 깊은 의젓한 양처럼

하루 종일 시름없이 풀포기나 뜯자

 

 

 

 

 

 

2.jpg

 

최승자, 돌아와 이제




새들은 항상 낮게 가라앉고

산발한 그리움은 밖에서

밖에서만 날 부르고


쉬임 없는 파문과 파문 사이에서

나는 너무 오랫동안 춤추었다


이젠 너를 떠나야 하리


어화 어화 우리 슬픔

여기까지 노 저어 왔었나


내 너를 큰물 가운데에 두고

이제 차마 떠나야 하리


오래 전에 내 눈 속 깊이 가라앉았던 별

다시 떠오르는 별

오래 갈구해온 나의 땅에

다시 피가 돌고

돌아와 이제 내 울타리를 고치느니


허술함이여 허술함이여

버려진 잡초들이

이미 내 키를 넘었구나

 

 

 

 

 

 

3.jpg

 

이형기, 등




나는 알고 있다

네가 거기

바로 거기 있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팔을 뻗어도

내 손은 네게 닿지 않는다

무슨 대단한 보물인가 어디

겨우 두세 번 긁어대면 그만인

가려움의 벌레 한 마리

꼬물대는 그것조차

어쩌지 못하는 아득한 거리여


그래도 사람들은 너와 내가 한 몸이라 하는구나

그래그래 한 몸

앞뒤가 어울려 짝이 된 한 몸


뒤돌아보면

이미 나의 등 뒤에 숨어 버린 나

대면할 길 없는 타자(他者)가

한 몸이 되어 함께 살고 있다

이승과 저승처럼

 

 

 

 

 

 

4.jpg

 

강성은, 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




잠든 사이 붉은 가로등이 켜졌다

붉은 가로등이 켜지는 사이 달에 눈이 내렸다

달에 눈이 내리는 사이 까마귀가 울었다

까마귀가 우는 사이 내 몸의 가지들은 몸속으로만 뻗어갔다

몸속에 가지들이 자라는 사이 말들은 썩어 버려졌다

말들이 썩어 버려지는 사이 나는 구두 위에 구두를 또 신었다

구두를 신는 사이 겨울이 지나고 여름이 왔다

여름이 오는 사이 도시의 모든 지붕들이 날아갔다

도시의 지붕들이 날아가는 사이 길들도 사라졌다

길들이 사라지는 사이 지붕을 찾으러 떠났던 사람들은 집을 잃었다

그사이 빛나던 여름이 죽었다

여름이 죽는 사이 내 몸속에선 검은 꽃들이 피어났다

검은 꽃이 피는 사이 나는 흰 구름을 읽었다

흰 구름을 읽는 사이 투명한 얼음의 냄새가 번져갔다

얼음 냄새가 번지는 사이 나는 구두 위에 구두를 또 신었다

열두 켤레의 구두를 더 시는 사이 계절은 바뀌지 않았다

구두의 계절이 계속되는 사이

나는 구두의 수를 세지 않았다

구두 속에서 나오지도 않았다

 

 

 

 

 

 

5.jpg

 

신동집, 포스터 속의 비둘기




포스터 속에 들어앉아

비둘기는 자꾸만 곁눈질을 하고 있다

포스터 속에 오래 들어앉아 있으면

비둘기의 습성(習性)도 웬만치는 변한다

비둘기가 노디던 한 때의 지붕마루를

나는 알고 있는데

정말이지 알고 있는데

지금은 비어버린 집통만

비바람에 털럭이며 삭고 있을 뿐이다

포스터 속에는

비둘기가 날아 볼 하늘이 없다

마셔 볼 공기(空氣)가 없다

답답하면 주리도 틀어 보지만

그저 열없는 일

그의 몸을 짓구겨

누가 찢어 보아도

피 한 방울 나지 않는다

불 속에 던져 살라 보아도

잿가루 하나 남지 않는다

그는 찍어낸 포스터

수많은 복사(複寫) 속에

다친 데 하나 없이 들어앉아 있으니

차라리 죽지 못해 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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