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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나는 벌써 죽었거나 망해버렸다
게시물ID : lovestory_9198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통통볼
추천 : 3
조회수 : 487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1/06/11 15:05:52

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Vaq7rZxJW-k

 

 

 

 

1.jpg

 

유병록, 밤의 고양이




자, 걷자

밤의 일원이 된 걸 자축하는 의미로

까만 구두를 신고

정오의 세계를 경멸하는 표정으로

지붕 위를 걷자

불빛을 걷어차면서

빛이란 얼마나 오래된 생선인가

친절한 어둠은 질문이 없고

발자국은 남지 않을 테니

활보하자

밤의 일원이 된 걸 자책하는 의미로

까만 구두를 신고

이 세계를 조문하는 기분으로

 

 

 

 

 

 

2.jpg

 

이재무, 나는 벌써




삼십 대 초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살았다

오십 대가 되면 일에서 벗어나 오로지 나 자신만을 위해 살겠다

사십 대가 되었을 때 나는 기획을 수정하였다

육십 대가 되면 일 따위는 걷어차 버리고 애오라지 먹고 노는 삶에 충실하겠다

올해 예순이 되었다

칠십까지 일하고 여생은 꽃이나 뒤적이고 나뭇가지나 희롱하는 바람으로 살아야겠다


나는 벌써 죽었거나 망해버렸다

 

 

 

 

 

 

3.jpg

 

오세영, 어제 반짝이던 별들이




잊으려 하는 것은

잊지 않으려 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더니라


작년에 지던 감꽃이 올해 또 시나브로 지듯

어제 반짝이던 별들이 오늘밤

또 반짝이듯

세월은 아주 가지 않는 법


아침나절 내리던 썰물이

저녁에 또 내리듯

잊으려 하는 것은

잊지 않으려 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더니라

 

 

 

 

 

 

4.jpg

 

홍윤숙, 가을 집 짓기




돌아가야지

전나무 그늘이 한 겹씩 엷어지고

국화꽃 한두 송이 바람을 물들이면

흩어졌던 영혼의 양떼 모아

떠나온 집으로 돌아가야지

가서 한 생애 버려뒀던 빈 집을 고쳐야지

수십 년 누적된 병인을 찾아

무너진 담을 쌓고 창을 바르고

상한 가지 다독여 등불 앞에 앉히면

만월처럼 따뜻한 밤이 오고

네 생애 망가진 부분들이

수묵으로 떠오른다

단비처럼 그 위에 내리는 쓸쓸한 평화

한때는 부서지는 열기로 날을 지새고

이제는 수리하는 노고로 밤을 밝히는

가을은 꿈도 없이 깊은 잠의

평안으로 온다

따뜻하게 손을 잡는 이별로 온다

 

 

 

 

 

 

5.jpg

 

정희성, 꽃자리




촉촉히 비 내리던 봄날

부드러운 그대 입술에

처음 내 입술이 떨며 닿던

그날 그 꽃자리

글썽이듯 글썽이듯

꽃잎은 지고

그 상처 위에 다시 돋는 봄

그날 그 꽃자리

그날 그 아픈 꽃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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