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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 애마, 미니쿠퍼에 멋지게 올라탔다.
학교 선배한테 중고로 싸게 업어온, 극강의 연식을 자랑하는 3도어 초창기 모델.
아무래도 차가 오래되다 보니 운전석 가죽 시트 색깔이 많이 벗겨지고, 언덕을 올라갈 땐
가끔 목구멍에 가래가 낀 듯한 거슬리는 엔진소리도 들리지만 난, 내차를, 나 만큼이나 참 좋아한다.
이제 막 200일이 지난 여자친구를 시내에서 만나기 위해 미니 로고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
동그란 키를 데시보드 옆에, 아래 구멍에 집어 넣고 미니쿠퍼의 시동을 걸었다.
'붕붕~ 부우웅~~~~~'
오늘따라 유난스레, 더욱 더 경쾌하게 시동이 걸리는 것 같았다.
내가 오늘 여자친구를 만나는 걸 혹시 내 애마도 알고 있나?
떨리는 내 마음이 차에게 까지 전해진것 같았다. 그녀는 만나기 위해
약속 두시간 전부터 그녀의 마음에 들어할 머리 스타일 구성 부터 얼굴 구석, 구석을 때 빼고, 광 내기.
큰맘 먹고 할부로 구입한 유명 메이커 의상으로 트렌디하게 위, 아래 깔맞춤까지...
완벽하게 코디를 마쳤다.
마지막으로 사이드 미러를 보며 '씩'. 입을 벌려 크게 웃었다.
마침 스피커에서 나오는 신나는 댄스 음악에 콧노래를 부르며
나는 힘차게 엑셀을 밟았다.
그녀를 만날 생각에 기분이 막 날아갈 것 같았다. 원래 오늘은
오랜만에 좌석과 바닥 시트까지 완전히 들어내고 차량 내부 청소를 할 생각이었는데.
허긴... 그깟 청소 좀 다음으로 미루면 어떠랴~
뭐, 내가 갑자기 어디 멀리 떠나거나 어느 날 갑자기 죽는 것도 아닌데.
한창 진도를 잘 빼고 있는 여자친구 먼저 만나는 것이 당연 일 순위지!
쿠퍼야 미안! 한번만 봐줘! 다음주에는 꼭 때 빼고, 광 내고, 속에까지 시원하게 해줄께. 알찌? 헤헤.
***
집 앞에서 출발하여 신나게 달리던 미니쿠퍼가 시내로 진입하는 사거리 초입 신호등에 걸려
하얀색 정지선에 정차를 하게되었다. 계속 음악을 들으며 고개를 까닥 하던 나는
오래 전 운전석 시트 밑에 떨어져 색깔이 누렇게 변해버린 세차 할인권 영수증을 우연히 발견했다.
아차차~ 저녁까지 이어지는 데이트를 하고 나서, 혹시나 그녀를 미니 쿠퍼에 태워 집에 데려다 줄 수도 있는데
차 안이 지저분 하다는 인상을 심어주어서는 절대 안되지!
신호등 색이 아직 빨강이라는 것을 인지한 나는, 핸들에서 손을 떼고 몸을 약간 낮추며 오른손을 브레이크를
밟고있는 내 발쪽으로 쭉~ 뻗었다.
그때, 나는 무언가를 보게 되었다.
조금 더 자세하게 말하면 무언가의 몸통... 이었다.
몸을 좀더 숙여 제대로 관찰을 해보니 그 무언가의 몸통이 그럴듯한 상반신과 하반신의 형상으로
내 갈색 구두 주변을 막 기어다니고 있었다.
순간, 소름이 돋았다.
지금 나는 바퀴벌레를 보고있다.
검은색과 갈색이 조화롭게 석여있으며 몸통이 오통통하고,
머리 위로 더듬이가 시원스레 뻗어나온 게,
꼭 예전 유튜브에서 보았었던 놈인것 같다.
이름이 독... 뭐드라.... 아~ 맞다.
그때 엄청나게 큰 뿔테안경을 쓰고나온 유튜버가 '독일바퀴' 라고 이름을 불렀다.
따뜻하면서, (물론) 기름지고, 지져분한 곳만을 찾아 무리들과 항상 떼를 지어다닌다는 바로 그 '독일바퀴'
그 때 그 친절한 설명대로 라면, 내가 지금 차 안에서 본 게, 꼭 한 마리가 아닐수도 있다. 아~ 씨~
마침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바뀌었고, 멈짓하고 있는 사이,
내 차 뒤의 차들이 나에게 마구 크략숀을 울려대고 있었다.
나는 어찌할바를 몰라, 벌벌 떨며 다시 내 발 밑을 내려다 보았다.
방금 전 보았던 것이 다행히 브레이크를 밟고 있는 내 왼쪽 구두를 지나 맨 오른쪽 엑셀레버쪽으로
스멀, 스멀 기어오르게 시작했다.
뒤에서 계속 울려대는 크략숀 소리에 귀가 멍멍하고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오른쪽 옆 차선에서 나와 비슷한 위치에 정차하고 있던 흰색 그랜저 차량 운전자가 자기쪽 윈도를 내리더니
나한테 마구 욕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지금 가야하는데. ......신호등 바뀌기 전에 얼른 출발해야 하는데. ........빨리 이 사거리에서 도망가야 하는데.
여기저기서 쌍으로 계속 울려대는 크략숀 소리와 흰색 그랜저 차량 운전자의 쌍욕의 콜라보는 나의 이성을
마비시키기 충분했다. 입이 바짝바짝 마르고, 심장이 터져나올 듯이 마구 박동하기 시작했다. 눈가에서 웬일로
눈물이 다 났다.
무서웠다. 발 밑을 또 쳐다보기가 정말로 무서웠다. 안된다. 안된다. 이래서는 안된다!
나는 심호흡을 되풀이하며 마음이 찬찬히 가라앉히고, 한쪽 눈을 감고 한쪽 눈만 뜬 상태로 내 발 밑을 다시 보았다.
보였다. 그 놈이 더듬이를 양쪽으로 흔들며, 엑셀레버 위에 가만이 있는 것이 보였다.
여기저기서 쌍으로 계속 울려대는 크략숀 소리와 흰색 그랜저 차량 운전자의 쌍욕의 콜라보는 나의 이성을
마침내 마비시켰다.
나는 감고있던 나머지 한 쪽눈은 뜨고 말았다. 그리고 그동안 어찌할바를 모르며 좌석뒤로 최대한 빼고 있던
오른발을 들어 그 놈이 놓여있는 엑셀레버를 있는 힘껏 밟으며, 목이 터져라 외쳤다.
"죽어!! 죽어!! 아주 납작하게 눌려서 그만 돼져버리라고!!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기어들어와!! 몸통이 으깨져서 노란 짓물이 질질 흐를때까지 죽어!! 죽어!! 제발 흔적도 없이 죽어서 내 눈앞에서 사라져 버리라고!!!!!!!!!!!"
빠직! 무엇인가 몸통 같은 것이 으깨지는 느낌이 오른쪽 구두 밑창에서 기분 나쁘게 전해져 왔다.
그 순간, 나의 오래된 미니쿠퍼가 사거리 중앙에 그려진 비상주차 선 쪽으로 튕겨져 나가더니
거기서 교통정리를 하던 순경을 '툭' 소리를 내며 허벅지부터 복부, 가슴, 머리까지 역순으로 묵직하게 깔아뭉개고,
맞은 편에서 빠른 속도로 달려오던 3.5톤 탱크로리 유조차량과 그대로 충돌 하고 말았다.
*
차량 충돌로 엄청난 충격을 받고 내가 잠시 정신을 잃었었나? 그렇지? 천천히 눈을 떴다.
차안에서 고장난 안전벨트에 묶여버린 내가 불타고 있었다.
온몸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너무 뜨거워 눈을 다시 감으려고 했는데 눈꺼플이 내 맘대로 안움직였다.
그렇게 뜬눈으로 시커먼 연기를 감싸며 온몸이 지글지글 타들어가는 와중에... 나를 보고 있던
도... 독... 독일밬... 위... 가 내 모... 목구멍으로 퀙퀙!!!!!! 기... 기어 드...들어갔...
***
"어이 김순경. 차량 사고 사진은 다 찍었어? 전소 차량 끌고갈 렉카차는 언제 쯤 도착한다고 하데?"
사고 지점인 사거리 교통사고 관할서에서 김순경과 이형사가 차량 충돌로 인한 화재로 피부가 엉겨붙도록 까맣게 타버린 운전자의 시신과 완전히 전소되어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인 미니쿠퍼 차량을 요리조리 살펴보고 있었다.
"이 형사님. 이번 차량 사고의 직접적인 원인이 뭘까요? 아무리봐도 단순한 운전자 부주위는 아닌것 같은데 아니면 음주운전이나과다 약물복용? 아이 참... 또 계장님에게 한소리 듣게 생겼네요? 하필 도로교통 특별단속기간 중에, 그것도 이렇게 차량이 많이 다니는 사거리 교차로에서 벌건 대낮에 이런 어쳐구니 없는 교통사건이 일어나다니..."
"야~ 김 순경아, 어린애 같이 그만 칭얼대고 순찰차에서 전자담배나 좀 꺼내와라. 한 대만 빨고 어떻게 사고 조서를 꾸밀지 생각 좀 해보게..."
괜히 핀잔을 들은 김 순경이 입을 쑥 내밀며 타고온 순찰차로 달려가 운전석 도어를 열고 대쉬보드 아래, 중앙 컵 홀더에 끼워 놓은 전자담배에 손을 뻗쳤다. 그때 전소된 미니쿠퍼 차량 밑에서 비실비실 기어나온 독일바퀴 한마리가, 김 순경이 달려가 순찰자의 운전석 도어를 '활짝' 열였을 때, 운전석 발판 시트 밑으로 '쏙' 들어가더니 맨 오른쪽 엑셀레버 위에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거기서 무사히, 수백 개의 알을 낳았다.
순찰자 운전석 문이 다시 닫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