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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극의 날
게시물ID : readers_3636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에이오스
추천 : 1
조회수 : 274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1/11/02 19:4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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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각국에는 수많은 용병과 자경단이 있지만 공권력을 인정받은 국제 결사단체는 단 세 곳 뿐, 미국을 중심으로 전 세계에 지분을 두고 있는 NAVO 즉 나보, 중화권을 비롯한 동아시아에 지분을 두고 있는 신수대, 그리고 한국과 일본에 지분을 두고 있는 피스메이커즈가 3대 대표 결사단체로 인정받는 추세였다. 국제 결사단체에 약간의 상납금을 지불하면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었는데 휴전 국가인 한국은 특수한 능력을 가진 이능력 단체 신수대를 대통령 친위대로 고용한 참이었다.

 

 동양의 절을 방불케하는 멋들어진 검은색 기왓장이 촘촘히 세워져있었다. 한중일의 가옥 양식을 합친 듯한 목조 건물, 정문에는 도리이가 설치되어있었고 ㅁ 모양의 넓직한 궁전처럼 보이기도 했다. 바닥은 돌멩이 하나 없이 깔끔하게 정리된 단단한 땅이었다.

 신수대에 입대하고 싶어하는 학생들이 반드시 거쳐야한다는 신수학교. 한명의 선생이 네다섯명의 제자를 맡아 양성하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그 중 가장 월등반인 차신단은 신수학교의 여러 운동장 중 하나를 통째로 이용할 수 있는 권리가 생긴다.

 가시와 대혁이 겨루기를 하던 참이었다. 가시는 태생적으로 체구가 작았는데 가시의 외모와 체구만 보고 사형제들이 그녀를 우습게 보곤 했었다. 그녀는 만나는 상대마다 스스로 자신의 힘을 증명해야했다.

사제, 한 수 부탁할게.”

그러시죠. 사저.”

 가시는 차신단에서 가장 맏이였고 육체와는 별개로 각종 무술에 뛰어났다. 특히 작은 체구와 여성의 신체적 특징을 이용한 빠르고 정교한 기술들을 선보였는데 적의 점혈을 집중적으로 노리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사제였던 대혁의 점혈은 미쳐 공격하지 못하고 가시의 주먹과 손날은 대혁의 얼굴을 노렸다. 대혁은 남성으로서의 유리점인 견고한 힘으로 가시의 공격을 막아냈지만 가시의 날렵한 기술을 일일이 막아내 반격할 기회도 없이 점점 힘이 딸리고 있었다. 대혁이 점점 지쳐 행동이 느려지자 가시는 뒤돌려차기로 대혁을 밀어내 자빠지게 만들었다.

 가시는 겨루기를 지켜보고 있던 스승 사성에게 고개 숙여 인사한 뒤 넘어진 대혁에게 손을 건넸다.

역시 사저의 무공은 따라잡을 자가 없습니다.”

 대혁은 양손으로 가시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대혁, 너는 적의 공격을 막아낼 때 힘에 너무 의존하는 경향이 있어. 적의 공격을 흘러내리는 법을 터득해야만 지치지 않고 방어를 이을 수 있다.”

 사성이 말하자 대혁은 코로 작은 한숨을 쉰 채 고개를 연신 숙였다.

하지만 자기자신을 훈련시켜 고도의 육체를 만들어낸 점은 칭찬하겠다. 더 연습하면 가시처럼 뛰어난 무공을 익힐 수 있게 될 거야.”

감사합니다.”

 사성의 칭찬에 기분이 나아진 대혁은 웃으면서 격투장을 내려왔다.

 체구가 작은 가시가 대혁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무공이 뛰어난 것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그녀는 기각을 다루는 능력이 뛰어나 그 어떤 상대도 지치거나 당황하지 않고 싸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각은 중국에선 기공, 한국에선 한얼, 일본에선 혼백, 서양에선 마나, 인도에선 만트라라고 다양하게 불렸으며 현재 한자권에선 기각이란 단어로 통일되었다. 기는 살아있는 육체에서 나오는 존재감 그 자체를 의미하며 잘 사용하면 인간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는 기술이었고 각은 영혼과 정신을 수호하는 힘, 각을 통달하면 오욕과 칠정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된다고 전해진다.

정말 대단해요 사저!, 저도 빨리 사저처럼 되고 싶어요.”

 아리는 사저가 보여준 뛰어난 무공에 감탄하여 찬양을 아끼지 않았다.

칭찬은 그만하렴, 교만은 모든 실패의 원인이다.”

 말은 그렇게 하고 있었지만 가시는 기분 좋은 미소를 보이고 있었다. 아리가 온갖 호들갑을 떨며 가시에게 아양을 떨고 있는 동안 성주는 겨루기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끝난 이후까지 얼굴하나 변하지 않고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서있었다.

그런데, 성주. 오늘 따라 더 말이 없네? 무슨 일 있어?‘

 가시가 성주의 어깨를 붙잡고 물었다.

희미하지만 훈련소 공기의 각이 흐트러졌습니다. 불길한 예감이 듭니다.”

 성주는 얼굴 한 번 변하지 않고 말했다.

 벽에 뚫린, 훈련장으로 들어오는 문이 열리고 가죽자켓과 청바지를 입은 남자가 들어왔다. 남자는 멧돼지 털인지 사자털인지 모를 명치까지 내려오는 기다란 줄기들이 남자가 쓴 복면의 뒤에 붙어있었다.

아이고, 손님이 왔는데 반응이 왜 이래요?”

 남자는 너스레를 떠는 평소의 대혁보다도 능글맞게 물었다. 양손을 주머니에 넣고 짝다리를 짚은 채 고개를 살짝 비스듬하게 하고 있었다.

너는 누구냐?, 훈련 중에 무단으로 들어오다니 예의를 상실했구나.”

 사성이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흰 도복 사이로 스승을 의미하는 금박 용무늬가 드러났다.

정말 우습군요. 여러분들은 체조를 훈련이라고 부르나봐요?”

입 닥쳐라. 싸가지.”

 가시는 남자를 향해 손가락을 겨눴다.

남녀 할 거 없이 같은 운동장에 넣고 싸우게 하다니, 비효율적이군요.”

 남자는 복면 뒤로 난 긴 줄기들을 쓸어내리며 코웃음 쳤다. 복면을 쓰고 있지만 그 안의 표정은 분명 비웃음이었다.

칼과 무공은 남녀를 가리지 않는다.”

 사성이 말했다. 사성은 화가 머리 끝까지 났는지 눈매가 일그러졌다.

아줌마가 이 사람들 보호자인가 보네. 만나서 반갑수다. 나는 피스메이커즈 소속 그리마라고 합니다.”

 그리마가 말했다.

피스메이커즈라면 신수대와 경쟁하고 있는 단체입니다.”

 성주가 말했다.

그냥 놀러 온 건데 손님 대접이 영 시원찮네. 볼일 다 봤으니 가겠수다.”

 그리마는 뒤돌아섰다.

기다려라, 그리마.”

 대혁이 말했다. 그리마는 다시 돌아서 차신단을 마주보았다.

우리의 수련장에 무단침입해 스승님께 무례를 범한 점을 사과하고 가라.”

 대혁은 장난끼가 싹 가신 당장이라도 그리마를 찢어죽일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 참, 어이가 없네. 그냥 들어와서 인사만 하고 나가는 건데 갑자기 사과를 하라고?”

 그리마는 어깨를 으쓱하며 그들을 비웃었다.

당장 사과하지 않는다면 너의 뼈 마디마디를 모두 부러뜨려 평생 누워서 살게 해줄 것이다!”

 대혁이 말하자 넷은 모두 무공 자세를 취하고 그리마를 노려보았다. 그리마는 상황 파악이 안 된다는 듯이 양손을 펼쳐보이며 스승과 제자들을 희롱했다.

그럼 이렇게 할래? 너희들 중 한명이라도 나를 항복시킨다면 머리를 땅에 붙이고 너희 스승이 원하는 대로 하겠다. 대신 너희들 모두가 나에 의해 쓰러진다면 그 땐 너희 스승이 내게 발을 햝아야한다.”

 그리마가 말했다.

그렇게 지껄이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

 가시가 말하자 사성이 말을 끊었다.

받아들인다.”

스승님?”

 넷은 벙찐 표정으로 사성을 바라보았다.

난 너희들이 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너희들이 나의 진정한 제자라면.”

 사성은 웃고 있었다.

, 한 명씩 덤빌래 아니면 한꺼번에 덤빌래? 나는 상관없다.”

 그리마가 말했다.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자식, 너 같은 건 나 혼자서도 충분하다!”

 대혁은 외쳤다. 사마귀가 먹잇감에게 달려드는 것처럼 발이 보이지도 않는 뜀박질로 그리마에게 달려들었다. 팔을 구부려 빠르고 둔탁한 일격을 날리려는 순간 공중에 떠있는 대혁의 명치를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하게 가격했다. 족히 열 길 넘게 날아간 대혁은 일어날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배를 부여잡고 고통에 몸부림쳤다.

뭐지? 저 사람 기각의 달인이라던가 그런 건가?”

 아리가 물었다.

아닙니다. 작은 사저. 저건 그냥 순수 인간의 완력으로 공격한 겁니다.”

 성주가 설명했다.

기각도 쓸 줄 모르는 잔챙이 주제에 우리에게 덤비는 거냐?”

 가시는 그의 앞까지 가 양가슴과 목을 주목과 손날을 이용해 연달아 쳤다. 큰 소리가 날 정도로 자신의 모든 힘을 쏟아낸 공격이었지만 그리마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고 처음 그 자리에 굳건하게 서있었다.

 그리마는 칼로 단정하게 자른 듯한 가시의 단발머리를 움켜쥐고 그대로 자신의 무릎에 갖다대었다. 니킥이었다.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가시의 얼굴은 코피로 흥건해졌고 가시는 그 자리에서 의식이 혼미해졌다.

 그리마는 숨쉴 시간도 주지 않은 채 아리에게 플라잉 니킥을 쓰려고 했지만 성주가 팔로 아리의 얼굴을 방어해주었다. 성주는 팔의 통증 때문에 잠시 주춤했고 아리는 그리마의 어깨를 붙잡고 다리로 목을 감싼 채 그대로 고꾸라트리기를 시도했다. 다리로 그리마의 목을 완전히 감싸고 집어던지기 직전까지 갔으나 차신단 중 가장 체구가 작았던 아리는 인간병기라 불리는 그리마를 움직이게 할 수는 없었고 그리마는 자신의 몸에 감겨져 있는 아리를 그대로 들고 바닥에 집어던졌다. 그리고 주저앉아있는 성주에게 그대로 니킥을 해 완전히 전투불능 상태로 만들었다.

 넷은 모두 전투불능 상태, 그리마의 완전승리라고 밖에 볼 수 없었다. 넷은 분한 표정으로 그리마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저 너희들의 얼굴만 보고 가려고 했다. 하지만 너희들은 먹지도 못하는 예절과 자존심을 붙들고 있었지 그게 너희가 굴욕을 당한 이유다.”

 사성은 무표정으로 그리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천천히 그에게 다가왔다.

스승님, 안 됩니다. 절대 저 녀석한테 고개를 숙이시면 안 돼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가시가 외쳤다.

선생, 혹시 협객이라는 자가 한 입 가지고 두 말하진 않겠지?”

 그리마가 도발했다.

이 사단은 제자들을 잘 훈련시키지 못한 내 책임이다.”

 사성은 모든 것을 받아드리고 혀를 그리마의 발에 가져다대려고 했다. 그런데 누군가가 번개와 함께 나타나더니 그리마를 밀쳐내고 사성의 앞에 섰다.

그리마, 너의 이모뻘은 되는 분에게 무슨 짓이냐?”

 남자가 말했다. 유럽 중세 기사를 연상시키는 검은 색 갑옷을 입은 사내였다. 머리카락이 눈을 가릴 정도로 길었고. 등에는 제 몸만한 검은 날개가 붙어있었다. 그리마를 밀쳐낸 그는 사성 쪽으로 몸을 돌린 뒤 한 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직각으로 숙였다.

저의 동료가 마음의 병이 있어 피해를 입혔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남자는 말하면서 그녀를 일으켜세웠다.

저는 피스메이커즈의 은빈이라고 합니다. 대화할 것이 있어 급히 찾아온 무례를 용서하여주십시오.”

 은빈은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 은빈이라는 사내는 예의가 뭔지 아는 구나!”

 대혁이 외쳤다. 갑자기 나타나 차신단을 때려눕힌 그리마에겐 단단히 화가 났지만 은빈이라는 사내에게 아첨이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 분위기가 험악해 질 거 같았다. 그리마는 못마땅하여 욕짓거리를 내뱉고 싶은 표정이었으나 은빈이라는 사내의 말을 잘 들었다. 은빈의 모습을 보아하니 이 곳까지 날개로 날아온 모양이었다.

은빈 도령 정말 신통방통한 모습을 하고 있네요. 등에 달린 거 날개 맞나요?”

 아리가 물었다. 대뜸 보게 된, 날개가 달린 모습을 한 기이한 남자에게 호기심이 든 터였다.

그렇습니다, 나는 본디 인간이었으나 대의를 이루기 위해 아자젤이라는 서방의 요괴와 계약을 맺어 몸을 같이 쓰게 되었습니다.”

 은빈이 말했다.

혹시 소녀, 도령의 날개를 만져봐도 되겠사와요?”

 아리는 호기심에 어안이 되어 아자젤에게 무례한 부탁을 하고 말았다.

사매!, 어리광을 부리는 버릇이 다시 도졌구나. 어찌 외간 남자에게 몸을 만지게 해달라는 무례한 부탁을 하는 게냐!”

 가시가 아리의 응석에 화가 나 쏘아붙였다.

아뇨, 아뇨. 괜찮습니다. 나이가 어떻든 한창 어리광부릴 수 있는 나이가 될 수 있지요. 자 원하는 만큼 만지세요.”

 은빈은 싫은 내색 없이 날개를 펼쳐 아리에게 내밀었다. 아리는 난생 처음보는 거대한 검은 날개를 쓸어내렸다. 날개는 단언 비단처럼, 담비의 털처럼 부드러워 그 누구든 만지기만 하면 현혹될 수 있는 촉감이었다.

 아리는 체면이라는 것을 잃고 아기가 되어 어머니의 품에 돌아온 것처럼 날개에 파묻혔다.

 스승과 사형들이 인색하며 아리를 말리려고 했지만 은빈은 손을 들어 괜찮다는 신호를 보내었다.

 제자들과 스승, 은빈과 그리마 일곱은 사랑으로 자리를 옮겼다. 사랑에는 녹색 다다미가 깔려있었고 정중앙엔 나무로 만든 작은 상이 놓여져있었다.

아리, 손님들께 차를 내놓아라.”

 사성이 말했다. 은빈은 무릎을 꿇고, 그리마는 양반다리를 한 채 사성과 상을 사이로 둔 채 마주앉았다. 차를 가지러 간 아리를 제외하고 나머지 세 제자는 정자세로 손님을 맞는 스승 앞에 서있었다. 가시와 대혁은 여스승 앞에서 가랑이를 벌리는 그리마의 무례함에 욕을 쏟아내고 싶었으나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리가 차를 내놓자 그리마는 뜨겁지도 않은 지 한 손으로 잔을 들어 벌컥벌컥 마셨다. 그에 반해 은빈은 두 손으로 한 손은 잔을 잡고 한 손으로는 잔을 받힌 채 천천히 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손님들이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찾아왔다고 하셨지요?, 무슨 일인지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사성이 말했다. 은빈은 말하기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이은비, 백월, 전예린이 지하감옥에서 탈주하였습니다.”

 사성의 날카로웠던 눈매가 동그랗게 번쩍 뜨였고 차렷자세를 유지하던 네 제자들도 서로를 바라보며 어리둥절했다.

아니 분명 삼대악괴는 반기석으로 만든 구속구를 차고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어떤 방도로 탈주하였다 말입니까?”

 사성이 물었다.

악괴들의 실력으로 봤을 때 구속구의 단 하나의 틈이라도 있다면 손쉽게 풀 수 있습니다. 어떻게 틈이 생겼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얼마 전 일어난 지진으로 지하의 맥이 변화가 생기면서 반기석의 힘이 약해진 걸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은빈이 말했다.

악괴들은 모두 죽은 것이 아니었어요?”

 아리가 물었다.

아아, 너희들은 모르겠구나. 원래 비밀로 하려고 했는데, 사실 악괴들은 죽지 않았다.”

 사성이 말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가시가 되물었다.

 사성에 말에 의하면 대통령 친위대로 고용되었던 신수대는 한 명의 원수와 네 명의 대장이 있었다. 원수 제세현, 청룡 이은비, 백호 백월, 현무 배태수, 주작 전예린이었다. 백월을 제외한 넷은 기각에 매우 능해 비를 내리게 하는가 하면 사자의 울음소리를 방불케하는 음파가 입에서 나오고 태산만한 바위를 번쩍 들어올려 테러리스트와 시위대의 사기를 떨어트렸다. 친위대의 결성에 의기양양해진 대통령 박일화는 무리하게 대통령 임기를 5년 단임제에서 4년 중임제로 무리하게 바꿔버리고 이를 반대하는 세력들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시민들의 분노가 폭발해버린 사건이 있었는데 신수대 대장 전예린이 1인 평화시위를 하던 여성을 총으로 살해하고 적으로 오인했다.’ 라는 핑계로 아무 처벌도 받지 않은 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반정부 정서는 극에 다다르게 되고 일부 언론인들에 의해서 정부가 저질렀던 부패가 드러나게 되었다. 결국 박일화는 탄핵되었고 부패에 가담했던 이은비, 백월, 전예린과 박일화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 후 박일화 퇴진운동에 앞장섰던 제세현, 배태수, 사민영 중 한명이 대통령이 될 거라고 예상했지만 의외로 대통령으로 당선된 자는 언론기업인 출신 윤이솔이었다.

그럼 왜 그들을 사형시키지 않고 살려뒀던 건가요?”

아리가 물었다.

배태수와 제세현은 삼대악괴와 문경지교의 관계였다. 그들과 몇몇 사람들은 차마 악괴들을 죽이지 못하고 사형을 집행하지 말아달라고 탄원했는데 그게 받아들여진 거지. 그리고 나도 탄원을 한 사람 중 한명이었다.”

사성은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그들은 나라를 멸망시킬 뻔 했습니다. 배태수와 제세현은 인정이라도 있으니 그렇다쳐도 왜 스승님이 그들의 편에 서선 겁니까?”

 가시는 거의 처음으로 스승에게 화를 냈다. 가시의 버릇없는 행동에도 아무도 항의할 수 없었다. 정적이 흐르고 사성은 입을 열었다.

백월은 나의 남편이다.”

 

***

 

 사씨 가문의 사저에서 사현은 사성을 불러 그녀와 동거동락하고 있는 백월이란 사내에 대해 물었다. 사성은 고개를 숙이고 아버지에게 예를 표하고 있었다.

딸아, 백월 같은 미물과 같이 다니는 이유가 무엇이냐. 설마 그와 혼인하려는 건 아니겠지?”

 사현이 물었다. 사현은 백월이 영 못마땅하였다. 고등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여 검정고시를 아슬아슬하게 겨우 합격한 인간. 한국에서도 손꼽히는 명문 가문인 사씨 집안에 경력도 학식도 직업도 없는 자가 사위로 들어오는 것은 극구 반대였다.

물론 백월은 학식이 부족하고 기개도 그저 그런 자일 뿐입니다. 하지만 상류층 남자를 신수대의 영웅으로 삼는다면 우리는 빈부격차와 신분제도를 긍정하는 꼴이 날 것입니다. 백월 같은 서민을 영웅으로 성장시켜 신수대를 선전한다면 우리들의 명성은 끝을 모르고 하늘로 치솟을 것입니다. 이미 백월 님께 정분이 든 데다가 저에게는 백월을 영웅으로 만들 비책이 차고 넘칩니다.”

 사성이 고개를 들고 말하였다. 사현은 영 떨떠름했지만 딸의 고집을 막을 수 없다고 직감하였다. 사현은 약간의 밑천을 주고 사성이 백월과 동거하는 것을 허락할 수 밖에 없었다.

 

 뜬금없이 사성과 동거를 하게 된 백월에게 사성은 제 키만한 책들을 쌓아올렸다.

만약 당신이 사회의 하층에서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삶을 살고 싶다면 이 곳을 떠나도 좋습니다. 허나 세상에 앞장서 모두에게 인정 받는 영웅이 되고 싶다면 첫 책을 집으시지요.”

 수려하고 기백적인 신부가 이렇게 말하는데 돌연 뒤돌아설 남자가 어디있겠는가. 백월은 겁이 났지만 첫 책을 집어 읽기 시작했다. 검정고시 이후로 글을 읽어본 적이 없는 백월은 단어 하나하나를 어려워하자 사성은 국어사전을 건넸다. 사전을 읽어도 이해가 되지 않는 내용은 사성이 붙잡고 하나하나 설명해주어야했다.

박색은 수치가 아니나 무식은 수치이다.”

 신수학교 입학시험은 필기와 실기 모두 어렵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일단 시험에 붙으려면 대학교 수준의 군사학, 정치학, 역사학, 외교학에 방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했고 고강도의 훈련을 받지 못하면 실기시험에서도 붙을 수 없었다. 특히 백월은 기각에 소질이 없어 특별전형 같은 건 꿈도 꾸지 못했다.

 일단 처음 한 훈련은 달리기였다. 자신이 얼마나 달린 지도 모를 만큼 달려야했다. 숨이 차거나 구역질이 나도 조금만 쉬고 다시 달려야했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사성은 절대 봐주지 않았다. 백월과 같이 달리면서 끊임없이 그를 감독했다.

 팔굽혀펴기, 윗몸 일으키기 같은 기본적인 체력 테스트는 물론이고 고강도의 근력 운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아무리 구역질이 나고 입맛이 없어도 식사 시간마다 족히 10000kcal 정도 되는 양의 음식을 위에 쑤셔넣어야했다. 도저히 못 먹겠다 싶으면 갈거나 찧어서 입에 쑤셔넣었다. 훈련을 시작한 지 몇 개월 만에 눈에 띄는 근육질이 되었고 책을 읽거나 문제를 푸는 속도가 빨라졌다.

 그 해 신수학교 입학시험이 있던 날 감독관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의 시험결과는 교장에게 보고되었을 정도였다. 교장은 대사부라고도 불렸는데 사성의 아버지가 대사부로 있었다.

아니 어찌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있는 것인가. 정말 단 하나의 거짓도 착오도 없단 말인가?”

 사현은 어안이 벙벙하여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그 어떤 수재도 80점을 넘지 못했던 필기시험에 만점을 받았고 체력시험도 전부 1순위였다. 이후 인적사항을 뚫어져라 보다가 자신의 사위라는 점을 알게 되고 심장이 멈출 뻔한 충격을 받았다.

 사현은 백월을 불러 월반과 임관과정이수를 추천했고 당연히 좋은 성적을 낸 백월은 대장의 자리까지도 오른 것이었다.

 

***

 

지금 이러실 때가 아닙니다. 목격담에 의하면 백월이 탈주하기 직전 사성 님을 찾아가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고 합니다.”

 은빈이 말하자 사랑방의 문이 벌컥 열렸다. 사현의 은퇴 이후 부임하게 된 임언이라는 대사부였다.

안녕하십니까 대사부님!”

 사성과 차신단의 네 제자들은 황급히 왼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아자젤은 사랑방 마루에서 내려와 열중쉬어를 했다. 피스메이커즈식 경례였다.

그리마, 뭐하고 있어. 너도 경례해야지.”

 그리마는 늦장을 부리고 겨우 경례를 했다. 차신단은 그리마를 한 대 치고 싶었지만 대사부의 앞이라서 참았다.

지금 경례가 중요한 게 아니다. 피스메이커즈에서 연락 온 거 받았다. 백월이 여기를 찾아오겠다고 했다고?”

 임언은 부슬거리는 수염이 난 50대 남자였다. 얼굴 자체는 호감형이었지만 독특한 수염과 덥수룩한 머리 때문에 험상궂어보이기도 했다.

, 선생님, 비록 신수대와 피스메이커즈는 경쟁관계지만 이번에는 힘을 합쳐야 된다고 생각해 직접 방문했습니다.”

 은빈이 말했다.

나도 동의하네, 이렇게 직접 찾아와줘서 정말 고맙네. 안 그래도 경비를 강화하라고 일러둔 터였다네.”

 그의 얼굴이 은빈에서 사성으로 향하는 순간 눈빛이 엄하고 무서워졌다.

사성, 너는 결국 호랑이새끼를 키웠구나.”

 임언이 꾸짖었다.

면목없습니다.”

 사성은 말하면서 울상이 되었다.

차신단은 잘 들어라!, 지금부터 백월을 잡을 때까지 아리와 가시는 사성과 같은 침대에서 자고 사내들은 침대를 둘러싸고 번갈아가며 보초를 서라!”

 임언이 외쳤다. 차신단은 배에 힘을 주어 대답했다.

네 사조님!”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사성은 주머니에서 황급히 전화를 꺼내었다.

너희들도 전화기가 있구나?”

 그리마가 말했다.

우린 원시인이 아니다.”

 사성은 그렇게 말하고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공중전화 번호였다. 임언은 사성에게 전화를 스피커폰으로 틀라고 했다.

내 전화 받을 줄 몰랐네.”

 전화를 받자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백월 이 녀석! 탈옥을 하다니 간이 배밖으로 튀어나왔구나. 키워준 은혜를 져버리다니 너는 사나이도 아니다!”

 임언은 화가 단단히 났는 지 백월이 말하기 무섭게 대꾸했다.

본디 들짐승으로 태어나 사나이는 커녕 사람 대접 한 번 받아본 적 없는 이에게 잘도 지껄이는구나. 내 반드시 나의 아내 사성을 내 눈으로 보고 말 것이다.”

 백월은 말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 날 사성과 가시, 아리는 같은 목욕탕에서 씻기로 하였다. 사성은 단 한 시라도 혼자 있을 수 없었다. 셋은 너나 할 거 없이 욕조에 뜨거운 물을 끊임없이 퍼다 피부에 발랐지만 서늘한 기운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목욕을 끝낸 후 샤워가운을 입고 목욕탕 옆의 숙실로 들어갔다. 숙실 안에는 대혁, 성주, 은빈, 그리마가 대기하고 있었는데 원채 목석이었던 성주를 제외한 다른 남정네들은 브래지어도 없이 볼록한 가슴골이 드러나는 얇은 가운만을 입고 있는 미녀들을 보고 민망해했다.

사저와 사매, 스승의 가슴을 보고 욕정하다니 나는 윤리를 저버렸구나.’

 대혁은 아주 잠깐이지만 속으로 생각하며 죄책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은빈은 자신이 가져온 커다란 자루를 내려놓았다.

은빈 오라버니, 이게 무엇입니까?”

 아리는 대뜸 가져온 거대한 자루를 보며 궁금해했다.

이건 아까 전, 제가 직접 공수한 무기입니다. 세 분이 씻는 동안 차로 제 집에 다녀오면서 가져왔습니다.”

 은빈은 말하면서 자루에 든 무기를 꺼내보였다. 붉은 색 무늬가 있는 검, 무쇠와 목봉으로 만든 크고 투박한 한 쪽은 망치인 도끼, 반짝이는 은색 창 그리고 양 쪽 끝에 각각 칼날과 갈고리가 달려있는 길다란 사슬이었다.

기술이 좋은 가시 양에게는 이 염검을, 힘이 좋은 대혁은 토부작, 몸이 날렵하고 기술이 좋은 아리에게는 수창, 조용히 싸우는 것을 좋아하는 성주에게는 이 공성추를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저의 제자들을 이렇게 챙겨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허나 무기가 워낙 비싸고 좋아보이는데 정말 저희한테 주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사성은 한 손으로 가슴에 손을 올린 채 물었다.

물론입니다. 그리고 저희는 오전에 댁의 제자들을 해한 업이 있잖습니까? 사과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은빈도 말하면서 사성처럼 한 손을 가슴에 올린 채 고개를 살짝 숙였다.

솔직히 그건 인정해야 돼요.”

 예쁘고 품질이 좋은 창을 얻게 된 아리는 신이 나 농담을 하였다. 은빈은 어린 아리가 귀여웠는지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여자들은 무기를 머리맡에 두고 자고 사내들은 이 무기를 들고 보초를 서도록 하세요. 무기를 들고 있으면 백월을 상대하기도 쉬울 겁니다.”

 은빈이 말했다.

 사성은 침대의 가운데에 누웠고 가시와 아리는 사성의 양 옆에 나란히 누웠다. 다행히 침대는 작지 않았다.

여자들만 재우고 남자들은 계속 깨어있으니 이거 영 미안한데?”

 사성이 말했다.

만약 여자들을 지키지 못한다면 그는 사나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주무시는 스승님과 사저, 사매의 몸을 계속 지켜봐야하는 무례를 양해해주십시오.”

 대혁이 말했다.

허허, 내가 아가씨도 아니고 남자가 자는 모습을 본다고 뭐가 창피하겠는가.”

 사성이 말했다.

맞습니다 사형, 우리는 형제자매와 다를 바가 없는데 어찌 자는 것을 보이는 게 창피하겠어요?”

 아리가 말했다.

불 끌까요?”

 은빈이 말했다. 그리마와 함께 침소를 나가려고 하는 중이었다.

, 불을 꺼도 괜찮을까?”

 대혁이 말했다.

저는 불이 꺼져도 기각을 느낄 수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성주가 말했다. 그리마와 은빈은 불을 끄고 침소 밖으로 나갔다. 둘은 사랑방에서 묵는다고 했다.

일찍 자봐야 좋을 것도 없는데 담소를 조금 나눈 뒤에 자는 것이 어떠니?”

 불이 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성이 말했다.

좋아요!, 좋아요!”

 아리가 말했다.

저 머리가 긴 은빈이라는 사내와 짐승가죽을 뒤집어 쓴 그리마라는 놈이 성격이 쌍극이더군요. 그리마는 대체 여기에 왜 온 걸까요?”

 대혁이 불만을 털어놓았다.

은빈 도령은 군자라 하여금 손색이 없소, 그런데 그리마라는 이름도 이상한 그 놈은 덕이 모자라서 탈이오.”

 가시가 말했다.

사제, 모처럼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는 순간인데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해봐.”

 아리가 말했다. 성주한테 한 말이었다.

이 세상에는 많이 담을수록 부족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 놀음, 색정 그리고 잡담입니다.”

 성주가 순순히 입을 열자 나머지 넷은 놀랐다.

 끼이익하는 소리와 함께 침소의 문이 열렸다. 넷은 반사적으로 무기를 꺼내들어 문을 열고 들어온 자에게 향하게 했다. 그는 그리마였다.

아니, 잠이 안 오길래 교대라도 해주려고 온 건데.”

 그리마가 말했다. 넷은 안도의 한숨을 쉬고 무기를 거두었다. 그리마는 침대 옆에 있는 의자를 끌어오더니 풀썩 앉았다.

너희들도 앉고 있지 왜 그러고 있냐?”

 그리마가 물었다.

우린 서 있는게 편하다.”

 대혁이 말했다.

사실 교대도 교대지만 너희들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그리마가 말했다.

뭐지?”

 가시가 물었다.

오전에 너희들을 패고 너희 스승을 욕보인거, 사과하는 것을 깜빡했다.”

 그리마는 한숨을 한 번 쉰 후에 말했다.

정말 빨리 깨닫는구나. 그런데 왜 굳이 너까지 이곳에 온 건지 물어봐도 되나?”

 가시가 말했다.

내가 여기 온 목적은 백월을 때려눕히기 위해서다.”

 그리마가 말했다.

백월?, 그 인간이 너와 무슨 상관이지?”

 사성이 물었다.

백월, 그 사람은 제가 정식으로 격투가가 된 이후 처음으로 저를 패배시킨 존재이기 때문이죠.”

 그리마는 계속 설명을 이어나갔다. 원래 본인은 격투기 선수였는데 사람들을 구하고 싶은 마음에 자경단에 들어오게 된 것이었다. 자신이 상대하는 적들이 워낙 독종이라 얼굴을 가리고 활동하는 거라고 덧붙였다.

 그 후 지하감옥 관리자 일손이 부족하다하여 잠깐 도울까하고 갔는데 하필 그날 삼대악괴가 탈옥한 날이었다는 것이었다. 은빈이 이은비와 전예린을 상대하고 그리마가 직접 백월과 격투를 벌였는데 자신의 힘을 너무 자만한 나머지 패배했다고 실토했다.
출처 https://blog.munpia.com/mnn3432/novel/29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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