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우리 부모님 세대 직장 이야기
게시물ID : freeboard_197939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미술관소녀
추천 : 4
조회수 : 593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21/12/18 02:47:42

늦여름 쯤엔가, 어떤 밥 모임으로 24살 여자애가 나왔다. 갓 취직을 한 것 같았는데,

몇번의 이직을 거쳤다고는 하지만,

요즈음 취업이 힘들고, 옛날에는 취직이 쉽지 않았느냐며 내 세대를 가리켰다. 곧이어 자기는 취직 되게 힘들게 했다는 말과 함께..

(그 아이는 기본급 없는 보험회사 직원이었다. 미디어 무슨 과를 졸업하고, 직장 여러군데를 거쳐 지금 하고 있는 일은 보험업..)

(물론 이 아이에게는, 이야기하다가 내가 대학생활 때의 이야기를 해 주니 점점 조용해 지기 시작하긴 했었다.)

 

요즈음 90년 후반 생들은, 지금의 35세 이후의 대리-과장 사이의 세대들이 꿀빨고 취직한 줄로 아는데,

그건 90년대에 대학교 졸업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요즈음 90년대후반생들은, 인터넷에서 보고 배운 옛날 이야기가, 생각보다 훨씬 이전 옛날 이야기라는 것을 잘 모르는 것 같다.

 

진짜 힘들었던 세대는, 우리 아버지 세대였던 것 같다.

 

옛날에는 반차를 쓰면 근무일수에서 2일을 깠다.

아버지가, 자기 아버지가 시골에서 올라와서 터미널로 데리러 가야 해서 오후 반차를 쓰는데도,

봉급에서 2일을 제하고 준다더란다.

 

아버지는 이 일을 얘기하며, 한참 지난 아버지 총각 시절 이야기인데도 그때 당시를 회상하면 황당해 했다. '세상에 아버지가 올라와서 가야 한다는데도,' 라는 뉘앙스셨다.

 

어머니는 거기에, "맞아." 라며 씁쓸하게 웃으셨지만, 말 안 해도 옛날의 근무 환경이 어땠는지, 어머니, 아버지 이야기 들으면 짐작이 간다.

 

 

그리고 내가 시험을 합격하고, 원래의 꿈이었던 직장에 들어오게 되었을 때,

이곳의 공기만큼은 80년대에 머물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직도 늙은 청소부가 젊은 아가씨의 남색 H라인 스커트와 검정 구두를 신은 나를 보고, 90도로 고개 숙여 인사하고 지나가는 곳이었다.

다른 모든 청소부들이 신입 직원인 나를 보고, 명찰을 목에 건 나를 보고 90도로 인사하고 갔다.

 

우리 부서는 더했다.

다들 법대 출신으로 자신이 한가닥 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얼굴에서, 자세에서 그 고압적인 분위기가 풍겨났다.

사람들을 돕겠다던 나의 꿈과 달리,

직장의 분위기는 호승심과 자만심, 낄낄거림으로 가득 차서,

옛날 화이트칼라를 적대시하던 블루컬러들이 왜 공부한 사람들에 대해 막연한 적개심을 가지는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이건 상상으로 만든 공부한 사람에 대한 적개심이 아니라,

진짜로 화이트컬러 직장인인 (특히 공무원인) 사람에게 무시를 받아서 그 분야 직종의 사람들에 대한 적개심이 생긴 거였구나,

이제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그전까지는, 자기가 못 가진 것에 대해서, 공부한 사람에 대해서 무작정 비난하고 싶어하는 건 줄 알았는데,

나보다 더 할아버지 세대 사람들은, 노룩패스 그 분같은 성격의 사람들이 많았고, 차라리 그분은 쿨하기라도 하지,

낄낄대며 즐기기도 좋아한다는 것을 보고, 인성에 혐오감을 느껴 혼란이 오기도 했었다.

 

나에게 매일 아침 90도로 인사하는 늙은 청소부는,

내가 너무 부담이 되어, 인사를 모른 척 했다.

 

사실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 정말 더 어른이라면, 아이구, 안녕하세요, 라고 웃으며 인사해주면 되는 것이었는 것을,

나는 그 아버지뻘의 청소직원이 명찰 멘 나를 보고 90도로 인사하는 게 너무 싫었다. 그래서 모른 척 했다.

 

여자화장실에서, 아침11시30분쯤 되자, 화장실 세면대에서 나물을 씻는 청소부 아주머니가 있었다.

나는 어머님들에게 살갑게 말걸기를 잘하는데,

"이게 뭐예요~?"^^ 라는 질문을 시작으로, 어머니는 나에게, 아기가 집에서 엄마 보고 싶다고 울고 보채도, 놓고 나와야 했던 심정을 이야기했다.

그러면서도, 내가 혹시 듣기 싫어할까봐 내 눈치를 보고 적당히 이야기를 끊었다.

나는 잘 리액션을 해주었고, 그 뒤로도 아침에 화장실에서 만날 때마다, 아주머니는 나에게 반갑게 자기 이야기를 하면서도, 

적당히 이야기를 끊어주셨다.

 

나는 그 나이가 역전된, 직급을 보고 나에게 고개를 숙이는 그 분위기가 싫었다.

다 내 어머니 나이이고, 아버지 나이인데, 청 내에 블루컬러 직종을 가진 분들이 알아서 그렇게 사무직 직종을 보고 고개를 조아리는 이 풍경이,

너무 불쾌했다. 거부감이 들었다. 

 

나에게 인사를 안 하길 바랐다. 

 

이 곳은 아직도 80년대 강압적인 분위기가 있는 곳이었고,

그렇다고 아직 과학적으로 일하지도 않았다. 차라리 이과 쪽으로 일을 하면 조금 더 명료하고 딱 떨어지는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도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나는 알았다. 나는 명예에 정말로 관심이 없다는 것을. 이 사람들에 비하면 나는 그냥 내 개인의 행복만 추구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리고, 직장 밖의 다른 사람들은 나의 직장을 부러워했지만, 소득 수준이 우리 부모님에 비해선 평생 이 월급을 모아도 부모님의 절반도 안 될 거라는 것을...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처럼 평화나, 사회공헌을 위해 직장을 구하는 사람은 1도 없고, 경제력이 1위였구나 ㄱ- 라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내가 배부른 자식으로 태어나서 '돈보다 사회에 봉사하고 싶어요.' 라고 했던 생각이 겁나 진짜 배부른 소리였다는 것을

맨날 똑같은 식사 먹으면서 깨달았다.

뭐, 열등감 없이 태어나서 뭘 먹든 , 남이 뭐하고 살든 그런 거에 불행감을 느끼고 그러진 않아서 상관은 없는데,

내가 모자란 것 없이 살아서 이렇게 '돈 같은 건 상관없어요!' 라고 철없는 생각을 했었구나 라는 걸 알았다;

역시 돈은 많을수록 좋은 것이야... 맛있는 것도 많이 먹구... 같은 노력으로 왜 난 이걸 했을까... 더 돈 많이 벌고 더 편한 일 많은데...

이 노력으로 다른 걸 할걸... 이 노력으로 이 월급이라니... 물론 이것도 못 받는 사람들은 이 직업 가지고 싶어하겠지만..

난 더 선택의 기회가 많았는데... ㄱ- 하는 생각. ㅋㅋ

 

어쨌든, 내 직장은 그랬었고,

나도 힘들게 들어가긴 했지만, 우리 부모님 세대는,

직장생활이 정말 지금보다 더 힘들었던 것 같다.

 

 

생각해보니 내가 예전에 들어갈 때에는, 블라인드 이력서 같은 것도 없어서,

부모님 관계란에 부모님 직업, 재산까지도 적어야 했다. 당연히 직장 들어가면 상사들과 직원들이 우리 부모님 직업, 연봉, 재산 모두 다 알고 시작하는 것이다.

 

이것도 웃긴 게, 부모가 돈이 많으면 신입직원이라도, '얘는 그만둬도 아쉬울 게 없는 애.' 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더 가난한 집의 직원일수록 더 편하게 갈구는 직장 상사를 보았다. 얜 갈궈도 어디 못 가니까....

 

아무튼, 내 이야기보다는...

우리 부모님 세대가 정말 ㅈ같았고, 그 ~같은 직장생활을 나는 그나마 덜 겪은 세대라고 생각한다.

물론 지금은 괴롭힘 금지법도 생겨나서, 훨씬 나보다 살기 좋아졌고,

나는 예전 세대의 유물을 조금은 잔재가 남아있는 것들을 겪고 지낸 세대이다.

 

우리 부모님 생각이 새벽에 나는구나.

굉장히 엿같았을 것 같다.

꼬릿말 보기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