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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너무 오래 되었다
게시물ID : lovestory_9293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통통볼
추천 : 2
조회수 : 320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2/02/17 22:06:27

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Vaq7rZxJW-k

 

 

 

 

1.jpg

 

이장욱, 우리 모두의 초능력




오래전에 우리는 순서대로 태어났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뒷모습을 볼 수 있고

흘러간 시간을 정확하게 헤아릴 수 있다

수많은 사건들을 창조하자 스르르 얼굴이 변하고

누구나 문득

살인자의 밤을 맞을 수 있다


우리는 서로의 먼 곳에서 잠든 채

새로운 과거를 생산했다

어제보다 나쁜 자화상을 발명한 뒤에는

지난해의 잡담을 반복하고

희미한 손바닥으로

새벽에 내리는 눈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이제 더 이상 할 말이 없다고 느낄 때에는

아침 뉴스의 화면을 향해 드디어

짐승의 욕을 내뱉을 때에도

우리는 매일 그림자를 창조할 수 있고

조용히 그림자와 손바닥을 마주할 수 있고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순간에

비명을 지를 수 있고

 

 

 

 

 

 

2.jpg

 

성동혁, 리시안셔스




눈을 기다리고 있다

서랍을 열고

정말

눈을 기다리고 있다

내게도 미래가 주어진 것이라면

그건 온전히 눈 때문일 것이다

당신은 왜 내가 잠든 후에 잠드는가

눈은 왜 내가 잠들어야 내리는 걸까

서랍을 안고 자면

여름에 접어 두었던 옷을 펴면

증오를 버리거나

부엌에 들어가 마른 싱크대에 물을 틀면

눈은 내게도 온전히 쌓일 수 있는 기체인가

성에가 낀 유리창으로 향하는 나의 침대 맡엔

내가 아주 희박해지면

내가 아주 희미해지면

누가 앉아 있을까

마지막 애인에게 미안한 일이 많았다

나는 이 꽃을 선물하기 위해 살고 있다

내가 나중에 아주 희박해진다면

내가 나중에 아주 희미해진다면

화분에 단 한 번 꽂아 둘 수 있다면

 

 

 

 

 

 

3.jpg

 

신철규, 갇힌 사람




두터운 유리관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서로를 갇힌 사람이라고 부른다

넌 갇힌 사람이야


흰 돌과 검은 돌이 들어 있는 주머니가 있다

꺼낼 때마다 검은 돌이었다

흰 돌이 나올 때까지 멈출 수가 없다


내가 가지 않은 곳에 나는 있었고

내가 말할 수 없는 곳에 나는 있었다

나는 사람이었고 사람이 아니다


머릿속에 물이 가득 찬 것처럼 조금만 고개를 기울여도 휘청거렸다

한번 떠오른 것은 가라앉지 않았다

썩고 나서야 떠오르는 것이 있다


흐린 물속에 잠겨 있는 틀니 같은 그믐달

새 한 마리가 밤하늘을 바느질하며 나아간다

점선처럼 툭툭 끊기며


내뱉을 수 없는 말들이 입술에 가득 묻어 있었다

거울 앞에서 입술을 뜯어냈다

심장을 손아귀에 넣고 꽉 쥐고 있는 손이 있다


천장에 붙어 있는 풍선들

실을 꼬리처럼 매달고

천장을 뚫고 나가지 못해 안달이 난 것들


나는 네 앞에 서 있다

잿빛 장미를 들고

 

 

 

 

 

 

4.jpg

 

백창우, 한 두어 달 없어질게요




한 두어 달 없어질께요

뭐 한동안은 찾는 이도 있겠지만

곧 잠잠해질 거예요

답답해요,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고

별 다를 것도 없이 되풀이되는 하루하루에 숨이 막혀요

늘 아는 길로만 다니는 게 이젠 지겹고

아무 일도 하고 싶지 않아요

모르겠어요

고장난 시계처럼 내 삶이

멈춰서 있는 것 같아요

내 안에 나 아닌 뭐가 들어앉았는지, 매일 머리가 무겁고

가슴이 터질 것 같아요

이러다간 어느 날 필름이 끊어져버릴 지도 몰라요

더는 아무렇지도 않게 살 자신이 없어요

좋은 음악처럼 살고 싶은데

고여 있는 큰 웅덩이보다는 작은 도랑물같이 흐르고 싶은데

그게 쉽지가 않아요

한 두어 달 돌아다니다 올께요

세상 밖에 서서

세상을 한번 들여다보고 싶거든요

 

 

 

 

 

 

5.jpg

 

박서영, 너무 오래 되었다




눈을 감고 손으로 읽어보라는데

심연으로 그곳에 닿아보라는데

나는 자꾸 처음의 그 약속을 잊어버린다

눈을 뜨고 만다

점자책을 읽지 못한다

혼신의 힘으로 날아가

흰 흙덩이를 밀어 올린 눈보라를 만져보지 못한다

눈을 감고 손을 내밀어보았는데

습관처럼 멀뚱멀뚱 눈동자가 열리고 만다

눈을 감고 바람소리를 들어본지 너무 오래 되었다

내 가슴에서 누군가 떠나가는 것을

눈을 감고 깊이 느껴본 적이 있는가

스쳐 가는 것의 목격자가 되어 오래 아파 본 적

너무 오래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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