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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그날의 이야기에 그날이 감금되는 게 좋았다
게시물ID : lovestory_9303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통통볼
추천 : 2
조회수 : 360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2/03/19 15:27:46

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Vaq7rZxJW-k

 

 

 

 

1.jpg

 

이제니, 그믐으로 가는 검은 말




꿈을 꾸고 있었다

구두를 잃어버린 사람이 울고 있었다

북해의 지명을 수첩에 적어넣었다

일광의 끝을 따라 죽은 사람처럼 걸었다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었다

그 밤 전무한 추락처럼 검은 새는 날아올랐다

언덕에 앉아 휘파람을 불고 있었다

휘파람을 불려고 애쓰는 사이

그 사이

흉터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그것은 너의 손목에 그어진 열십자의 상처였다

한 번 울고 한 번 절할 때 너의 이마는 어두워졌다

쓸모없는 아름다움만이 우리를 구한 것이다

꽃을 파는 중국인 자매를 보았다

모로코나 알제리 사람인지도 모르지

이미 죽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당신에게 말할 수 없습니다

비밀을 지킬 수 있습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네가 누군가를 비난할 때 그것이 너 자신의 심장을 겨눌 때

거리의 싸구려 과육과 관용을 함부로 사들일 때

나는 그것이 네가 병드는 방식인 줄을 몰랐다

말수가 줄어들 듯이 너는 사라졌다

네가 사라지자 나도 사라졌다

작별인사를 하지 않은 것은 발설하지 않은 문장으로

너와 내가 오래오래 묶여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잊혀진 줄도 모른 채로 잊혀지지 않기 위함이다

제 말을 끝까지 들어보세요

할 수 있는 것은 하겠습니다

창문을 좀 열어도 되겠습니까

문이 잠겨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 밤 우리는 둥글고 검은 것처럼 사라졌다

문장 사이의 간격이 느슨해지듯 우리는 사라졌다

누구도 우리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다

 

 

 

 

 

 

2.jpg

 

이병률, 이 넉넉한 쓸쓸함




우리가 살아 있는 세계는

우리가 살아가야 할 세계와 다를 테니

그때는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되어 만나자

무심함을

단순함을

오래 바라보는 사람이 되어 만나자

저녁빛이 마음의 내벽

사방에 펼쳐지는 사이

가득 도착할 것을 기다리자

과연 우리는 점 하나로 온 것이 맞는지

그러면 산 것인지 버틴 것인지

그 의문마저 쓸쓸해 문득 멈추는 일이 많았으니

서로를 부둥켜안고 지내지 않으면 안 되게 살자

닳고 헤져서 더 이상 걸을 수 없다고

발이 발을 뒤틀어버리는 순간까지

우리는 그것으로 살자

밤새도록 몸에서 운이 다 빠져나가도록

자는 일에 육체를 잠시 맡겨두더라도

우리 매일 꽃이 필 때처럼 호된 아침을 맞자

 

 

 

 

 

 

3.jpg

 

허수경, 라일락




라일락

어떡하지

이 봄을 아리게

살아버리려면?


신나게 웃는 거야, 라일락

내 생애의 봄날 다정의 얼굴로

날 속인 모든 바람을 향해

신나게 웃으면서 몰락하는 거야


스크랩북 안에 든 오래된 사진이

정말 죽어버리는 것에 대해서

웃어버리는 거야, 라일락

아주 웃어버리는 거야


공중에서는 향기의 나비들이 와서

더운 숨을 내쉬던 시간처럼 웃네

라일락, 웃다가 지네

나의 라일락

 

 

 

 

 

 

4.jpg

 

김소연, 다른 이야기




처음 만났던 날에 대해 너는 매일매일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우리가 어떤 용기를 내어 서로 손을 잡았는지

손을 꼭 잡고 혹한의 공원에 앉아 밤을 지샜는지

나는 다소곳이 그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가 우리가 우리를 우리를 되뇌고 되뇌며 그때의 표정이 되어서

나는 언제고 듣고 또 들었다

곰을 무서워하면서도 곰인형을 안고 좋아했듯이

그 얘기가 좋았다

그 얘기를 하는 그 표정이 좋았다

그 얘기가 조금씩 달라지는 게 좋았다

그날의 이야기에 그날이 감금되는 게 좋았다

그날을 여기에 데려다 놓느라 오늘이 한없이 보류되고

내일이 한없이 도래하지 않은 게 너무나도 좋았다

처음 만났던 날이 그리하여 우리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는 게 좋았다

처음 만났던 날이 처음 만났던 날로부터 그렇게나 멀리 떠나가는 게 좋았다

귀여운 병아리들이 무서운 닭이 되어

제멋대로 마당을 뛰어다니다 도살되는 것처럼

그날의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마다

우리가 없어져버리는 게 좋았다

먹다 남은 케이크처럼 바글대는 불개미처럼

그날의 이야기가 처음 만났던 날을 깨끗하게 먹어치우는 게 좋았다

처음 만났던 날이 아직도 혹한의 공원에 앉아 떨고 있을 것이 좋았다

우리가 그곳에서 손을 꼭 잡은 채로 영원히 삭아갈 것이 좋았다

 

 

 

 

 

 

5.jpg

 

안현미, 깊은 일




그 날 이후 누군가는 남은 전 생애로 그 바다를 견디고 있다

그것은 깊은 일

오늘의 마지막 커피를 마시는 밤

아무래도 이번 생은 무책임해야겠다

오래 방치해두다 어느 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어떤 마음처럼

오래 끌려다니다 어느 날 더 이상 쓸모없어진 어떤 미움처럼

아무래도 이번 생은 나부터 죽고 봐야겠다

그러고도 남는 시간은 삶을 살아야겠다

아무래도 이번 생은 혼자 밥 먹는, 혼자 우는, 혼자 죽는 사람으로 살다가 죽어야겠다

찬성할 수도 반대할 수도 있지만 침묵해서는 안 되는

그것은 깊은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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