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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너를 나라고 생각한 기간이 있었다
게시물ID : lovestory_9304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통통볼
추천 : 2
조회수 : 328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2/03/22 13:33:13

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Vaq7rZxJW-k

 

 

 


1.jpg

 

하재연, 후천적인 삶




다른 나라의 말들만이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사랑은 사라지는 것

너의 입술은 너의 국기

흘러나오는 모든 것들을 주워 담아

네 몸을 새로운 피로 채우는 마술은

추방된 어린아이의 손끝에서


끝나기 위해서만 못갖춘마디의

노래가 시작되지 않습니다

이민자의 외투를 빌려 입고

불완전한 목소리를 가다듬어

어, 어, 나, 여기, 있어

계속해서

찢어지는


천 조각의 실 한 오라기로

바람에 섞여들어

있을 수 없는 일이 되어가면서

쓸 수 없는 문자로 쪼개지면서

 

 

 

 

 

 

2.jpg

 

임지은, 느낌의 문제




느낌은 내 앞에 남자처럼 앉아 있다

할 말이 있다는 듯 오른손 위에 왼손을 올리고

느낌이 말하고 움직이는 걸 본다

느낌에게 잘 보이고 싶어 목이 마르다

느낌은 컵에 담긴 물보다 차갑다 느리다

가까이 나가가고 싶은 맛이다

느낌은 하얀 탁자 위에 물을 엎질렀다

물이 탁자를 적시는 동안 느낌은 더욱 진해졌다

우리는 손을 잡고 어둠이 전부인 거리를 걸어갔을 뿐인데

이 시간에 아직 문을 연 가게가 있어요, 라며 들어왔을 뿐인데

물 한 잔이 우리 앞에 놓였고 우리를 적셨고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봤을 뿐인데

아마 이 느낌은 마르지 않을 것이다

 

 

 

 

 

 

3.jpg

 

김이듬, 겨울 휴관




무대에서 내려왔어 꽃을 내미네

빨간 장미 한 송이 참 예쁜 애구나

뒤에서 웃고 있는 남자 한때 무지 좋아했던 사람

목사가 되었다하네 이주 노동자들 모이는 교회라지

하도 괴롭혀서 도망치더니 이렇게 되었구나

하하하 그가 웃네 감격적인 해후야

비록 내가 낭송한 시라는 게

성직자에게 들려주긴 참 뭐한 거였지만


우린 조금 걸었어

슬며시 그의 딸 손을 잡았네

뭐가 이리 작고 부드러울까 장갑을 빼려다 그만두네

노란 코트에 반짝거리는 머리띠

큰 눈동자는 내 눈을 닮았구나

이 애 엄마는 아마 모를 거야

근처 미술관까지 차가운 저녁 바람 속을 걸어가네

휴관이라 적혀 있네

우리는 마주 보고 웃다가 헤어지려네

전화번호라도 물어볼까

그가 나를 위해 기도할 거라 하네


서로를 등지고 뛰어갔던 그 길에서 여기까지밖에 못 왔구나

서로 뜻밖의 사람이 되었어

넌 내 곁을 떠나 붉게 물든 침대보 같은 석양으로 걸어가네

다른 여자랑 잠자겠지

나는 쉬겠네 그림을 걸지 않은 작은 미술관처럼

 

 

 

 

 

 

4.jpg

 

유계영, 생각의자




불가능해요 그건 안 돼요

간밤에 얼굴이 더 심심해졌어요

너를 나라고 생각한 기간이 있었다

몸은 도무지 아름다운 구석이라곤 없는데

나는 내 몸을 생각할 때마다 아름다움에 놀랐다

나는 고작 허리부터 발끝까지의 나무를 생각할 수 있다

냉동육처럼 활발한 비밀을 간직한 나무의 하반신을 생각할 수 있다

나무의 상반신은 구름이 되고 없다

어떤 나무의 꽃말은 까다로움이다

사람들은 하루를 스물네 마디로 잘라 둔 뒤부터

공평하게 우울을 나눠 가졌다

나는 나도 아닌데

왜 너를 나라고 생각했을까

의자를 열고 들어가 앉자

늙은 여자가 날 떠났다

나는 더 오래 늙기 위한 새 의자를 고른다

나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정의를 내리려고

 

 

 

 

 

 

5.jpg

 

박준, 인천 반달




혼자 앓는 열이

적막했다

나와 수간(手簡)을

길게 놓던 사람이 있었다

인천에서 양말 앞코의

재봉 일을 하고 있는데

손이 달처럼 자주 붓는 것이

고민이라고 했다

나는 바람에 떠는 우리 집 철문 소리와

당신의 재봉틀 소리가

아주 비슷할 거라 적어 보냈다

학교를 졸업하면

인천에 한번

놀러가보고 싶다고도 적었다

후로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종이에

흰 양말 몇 켤레를 접어 보내오고

연락이 끊어졌다

그때부터 눈에

반달이 자주 비쳤다

반은 희고

반은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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