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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태양은 늙은 복서처럼 달렸다
게시물ID : lovestory_9309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통통볼
추천 : 3
조회수 : 403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2/04/03 21:32:04

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Vaq7rZxJW-k

 

 

 

 

1.jpg

 

이진명, 그 집에 누가 사나




그 집에 누가 사나

내가 사나

내 외로운 마음이 수족을 움직여

식기를 씻고 사나

그토록 기척 없다니

이슬비 벌써 반나절인데

지우산을 쓰고

오늘도 올라가 본 언덕 아래

지붕도 방문도 마당도 대문도

숨죽인 옛 영화의 먼 화면만 같네

방문 열릴 것만 같아

마당의 흰 빨래를 홀홀 걷어 들일 것만 같아

그 집에 누가 사나

거울 속에도 이슬비가 내리고

눕고 일어나고 걸어 다니는 한 형상

긴 치마를 끌고

차를 끓이는 노부인이랄지

미망인이랄지

그 집엔 꼭 그런 형상이 살리

지우산에 이슬비 받은 지 오래

하루가 가네

기다려도 하루만 가네

조용할 그 부인의 거동 볼 수 없네

기다리는 마음이 지우산을 접고

이슬비 속을 내려

대문의 고리를 따지

어느새 안에서 방문을 열고 나와 가엾은

마당의 흰 빨래들을 걷어들이지

다시 옛 영화의 먼 화면처럼 숨죽이는 그 집에

누가 사나

내가 사나 내 외로운 마음이

손등에 똑 떨어지는 물방울에 놀라

한차례 지우산을 흔들며 사나

 

 

 

 

 

 

2.jpg

 

김미영, 낙타가 있는 육교




그 육교 위에는 손수건만한 사막 하나 있다

하모니카 부는 늙은 낙타와

눈먼 여자 혼자 온종일 노래 부르는 사막이 있다

다 낡은 스피커 한 대와

동전 담긴 찌그러진 양은 냄비 하나와

냄새나는 마이크를 들고

노래를 부르는 검은 선글라스 낀 여자와

등 굽은 낙타 한 마리 있다

이미자의 <열풍>이 휘몰아치는 그 사막을

온종일 걸어가는 카라반 행렬들은

이따금 우그러진 냄비에 어린 빗물을

오아시스처럼 들여다보고 지나간다

높은 빌딩들 선인장처럼 우거진 육교 위

공중 높이 매달린 전광판 사막 속으로

벤츠 한 대 사라지는 오후 즈음이면

온종일 사막을 걸어온 지친 두 사람들

황사바람 날리는 육교에서 사라지고


길 건너편 타클라마칸 노래방 속으로 비틀거리는 두 사내가

등 굽은 낙타처럼 어두운 지하 계단 속으로 사라진다

 

 

 

 

 

 

3.jpg

 

최하연, 안식일의 정오




홍단풍의 세계와 붉은 목련의 영토 아래

까마귀의 심장 하나가 떨어졌다


꽃잎 하나 질 때마다

심장은 한 번씩 뛰었다


우리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늘 아래 벤치에서 내가 마주친 당신의 눈 속엔

자장가 같은 것이 들어 있었다


일어났더니, 무덤 속이었다


관을 열면, 내 심장에서 당신의 눈동자까지

삼천 개의 달이 계단마다 놓여 있었다


숲이 자라는 소리와 당신이 또각또각 걷는 소리를 들으며

떨어지는 꽃잎을 기다렸다


불 켜진 창마다 두드려보고 녹슨 난간을 쪼아도 보았지만

그 깊은 땅속엔 아무것도 없었다


알람을 맞추고 문을 닫았다


태양은 늙은 복서처럼 달렸다

 

 

 

 

 

 

4.jpg

 

심은식, 백석을 읽는 밤




들어봐

밤이, 봄 밤이

오래된 애인들과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꽃들이, 등 아래 핀 벚꽃들이

서늘한 봄비에 지면서도 얼마나 빛나는지

백석을 읽는 밤

내일을 돌보지 않아도

푸근하고 아린

이런 봄날, 봄밤

발치에 조으는 짐승의 착한 눈꺼풀과

이불 아래 방바닥의 온기와

주전자서 끓는 구수한 보리차 냄새

가지들 마른 울음 그치고

저리던 뿌리들도 축축히 잠드는

이런 봄, 밤

 

 

 

 

 

 

5.jpg

 

박성현, 개미가 끓었다




물기가 없어도 아카시아는 쑥쑥 자랐다

마른 햇빛이 곁에 앉아 천천히 잎사귀를 쓰다듬었다

잎사귀 표정을 살피다가

내 얼굴이 저 빗금 어딘가에 기울어져 있으리라 생각했다


동네 어디선가 굿판이 벌어지는 날에는 어김없이 온몸에 살이 찾아왔다

어깨에서 내려오라 했지만, 내 말은 귀신에게는 전혀 닿지 않았다

씹다 만 아카시아가 백태로 변하는 꿈이었다


나는 문지방에 앉아 얼굴에 마마자국이 얽힌 사람들을 살폈다

나도 그 구멍 속에 있을 것만 같았다

무당이 가고 동네 개 몇 마리도 사라졌다


아카시아는 잘 자랐지만

사람들은 아프지 않은 날보다 아픈 날이 더 많았다

그 누군가의 사나운 병은 다른 누군가의 집을 기웃거렸다

수십 년 묵은 서까래에 버짐을 먹은 듯 개미가 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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