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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산책은 악몽을 좋아한다
게시물ID : lovestory_9309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통통볼
추천 : 4
조회수 : 354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2/04/04 20:22:57

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Vaq7rZxJW-k

 

 


 

1.jpg

 

최하연, 난파선




꿈마다 포스트잇을

붙여놓았어야 했다


알래스카의 얼음집에 녹슨 타자기를 놓고 나온 날

난 알아차렸어야 했다


나는 당신을 처음 만났거나 보았으며

말하자면 끝도 없이 펼쳐진 호수는 잔잔했다로 끝났지만


정오의 햇살 아래에선 왜 습관적으로 이가 시린지

집 안 모든 서랍이 왜 한꺼번에 잠겨 있는지

알아차렸어야 했다


비늘 다듬어진 물고기를 따라 바다로 나가던 날

회전목마가 있는 그 벌판에 서서

나는 영원히 당신을 기다리겠노라고 말했어야 했다


저녁마다 붉어지는 서쪽 하늘의 어느 페이지에

당신을 위한 갈피를 꽂아 넣을 것인지


잠든 내 얼굴이 지워지기 시작한 첫날만큼은

기억해두었어야 했다


밑줄 긋기조차 무서운 날이 왔고 나는

다시 처음부터-


잠들지 말았어야 했다

 

 

 

 

 

 

2.jpg

 

허만하, 나는 내릴 수 없었다




목이 쉰 기차는 세차게 눈이 내리고 있는

자작나무 숲을 헤치고 있었다

성에 낀 창 너머 풍경은 얼어 있었다

나는 비좁은 통로를 앞쪽으로 걷고 있었다

통로는 끝이 없었다

기차는 서지 않고 달리기만 했다

나는 내릴 수 없었다

차장도 없었고 승객도 없었다

아무도 없이 비어 있는 기차

내 혼자 타고 있는 비어 있는 기차

나는 내릴 수 없었다

창 밖에서 다시 눈이 내리고 있을 뿐

나는 중도에서 내릴 수 없었다

나는 끝없이 긴 통로를

앞쪽으로 걷고 있었다

앞으로 달리는 기차 안에서 앞으로 걷는 나는

러닝머신 위를 달리는 걸음을 생각하며

푸른 산 넘는 구름을 생각하며

중도에서 내릴 수 없었다

내 의사와 무관히 벌써 이 열차를 타고 있던

나는 내릴 수 없었다

시작과 끝을 모르는 대로

내릴 수 없었다

통로는 끝이 없었다

 

 

 

 

 

 

3.jpg

 

김요일, 사랑




내 안의 당신이

당신 안의 나를 알게 되었지


소문을 버리고, 병을 잊고

피를 씻는 저녁

창을 때리는 저 음악은 당신이 작곡한 슬픈 노래구나


버릴 수 없다면 아무 것도 낳을 수 없는 법

붉은 비에 떨고 있는

당신을, 버린 나는

당신을, 가진 나는


밥 짓는 냄새에도 울컥

입덧을 한다

 

 

 

 

 

 

4.jpg

 

김민철, 산책은 악몽을 좋아한다




바퀴벌레가 무중력 속을 산책한다

천장과 바닥의 경계는 보이지 않는다

벽지의 꿈마저 유목을 치는지

한낮마저 깜깜하게 만들기도 했다


낯빛이 어두운 곰팡이가 고개를 내밀자

무중력에 그어진 궤도가 푹신푹신해졌다

멀리 밥알이 굳어 솟은 언덕에서

지평선이 일몰되던 기억이 떠오르는 시간


바퀴벌레가 길을 더듬으며 걷는다

코골이를 따라 밀려오는 침 냄새를

살 껍데기에서 고속으로 흘려보내는데


내 꿈은 고요하고 불안해진다

혈관을 떠도는 담석가루가 꽃을 피우고

손끝 발끝에 멈춘 향기는 마비되고

날숨과 들숨은 서로 단단히 깍지를 낀다


걸레에서 목을 축이는 바퀴벌레, 그리고

내 머리맡으로 옮겨오는 진득진득한 발길

그는 계속 나의 잠을 다독이며 다가오고

방심의 순간 꿈에까지 뚫고 들어온다


선잠은 바퀴벌레의 발바닥을 밀어내고

한가로이 깊은 어둠 속을 걷고 싶지만

발작과 비명은 중력을 잃어

바퀴벌레의 산책은 나의 악몽을 좋아하기 시작했다

 

 

 

 

 

 

5.jpg

 

최기순, 떨림에 대하여




새 한 마리 날아간 자리에 파르르 진동이 인다

그것은 슬픔에 대처하는 나무의 표현법

미세하게 오래 손끝을 떠는 방식으로 상황을 견딘다는 점에서

나와 나무의 유전자는 유사하다


나무는 그 진동에 기대어 얼마나 많은 새들을 날려 보내는지

가까스로 잠잠해지기를 기다려 깊은 수맥 쪽으로 발을 뻗는지

오랜 떨림 끝에 돌아와 수돗물을 틀고 손을 씻는 나는

거뭇한 나뭇가지들의 아침을 이해한다


이해한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과는 다른 것이어서

다리를 끌며 몇 발짝 옮겨가는 사람을

머뭇거리다가 앞질러 가듯


아직 떨고 있는 나무를 스쳐 지나간다


매 순간을 가누려 소진되는 목숨들

눈을 감으면 전해오는 무수한 진동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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