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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나는 사랑하고 당신은 말이 없다
게시물ID : lovestory_9314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통통볼
추천 : 4
조회수 : 443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2/04/23 11:00:45

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Vaq7rZxJW-k

 

 

 

 

1.jpg

 

신달자, 선물




피아노 소리일까

바이올린 소리일까

가깝게 맑은 악기 소리 울린다

너의 선물을 생각하는 나는 감미로운 악기인가 봐


거리로 나갔다. 시장 백화점

선물을 고르기 위해 다리가 휘청거리도록

종일 기웃거렸다


왜 선물이 그렇게 정해지지 않았을까

그러나 내 마음을 나는 잘 알지

뭘 살까 생각하는 그 마음을 즐기기 위해

나는 오래 선물을 정하지 않고 행복해 한 거야

선물은 물건이 아니라 마음이란 걸 선물을 사면서

나는 알았어

이 행복한 마음

바로 네가 준 선물임을 그때 나는 알았어

 

 

 

 

 

 

2.jpg

 

심보선, 나날들




우리는 초대장 없이 같은 숲에 모여들었다

봄에는 나무들을 이리저리 옮겨 심어 시절의 문란을 풍미 했고

여름에는 말과 과실을 바꿔 침묵이 동그랗게 잘 여물도록 했다

가을에는 최선을 다해 혼기로부터 달아났으며

겨울에는 인간의 발자국 아닌 것들이 난수표처럼 찍힌 눈발을 헤맸다

밤마다 각자의 사타구니에서 갓 구운 달빛을 꺼내 자랑하던 우리

다시는 볼 수 없을 처녀 총각으로 헤어진 우리

세월은 흐르고, 엽서 속 글자 수는 줄어들고

불운과 행운의 차이는 사라져갔다

이제 우리는 지친 노새처럼 노변에 앉아 쉬고 있다

청춘을 제외한 나머지 생에 대해 우리는 너무 불충실하였다

우리는 지금 여기가 아닌 곳에서만 안심한다

이 세상에 없는 숲의 나날들을 그리워하며

 

 

 

 

 

 

3.jpg

 

유희경, 내일, 내일




둘이서 마주 앉아

잘못 배달된 도시락처럼 말없이

서로의 눈썹을 향하여 손가락을, 이마를

흐트러져 뚜렷해지지 않는 그림자를

나란히 놓아둔 채 흐르는


우리는 빗방울만큼 떨어져 있다

오른뺨에 왼손을 대고 싶어져 마음은 무럭무럭 자라난다

둘이 앉아 있는 사정이 창문에 어려 있다

떠올라 가라앉지 않는, 생전(生前)의 감정

이런 일은 헐거운 장갑 같아서

나는 사랑하고 당신은 말이 없다


더 갈 수 없는 오늘을 편하게 생각해본 적 없다

손 끝으로 당신을 둘러싼 것들만 더듬는다

말을 하기 직전의 입술은 다룰 줄 모르는 악기 같은 것

마주 앉은 당신에게 풀려나간

돌아오지 않는 고요를 쥐여 주고 싶어서


불가능한 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당신이 뒤를 돌아볼 때까지

그 뒤를 뒤에서 볼 때까지

 

 

 

 

 

 

4.jpg

 

김행숙, 너의 폭동




꽝꽝꽝 발을 구르니까 발이 커진다

가슴을 치니까 가슴이 아프다

발이 크고 가슴이 아픈 사람을 따라갈 것 같애

한 번만 더 발을 구르면


네 분노를 따라가는가

너의 사랑을 따라가는가

동지, 라고 부를 것 같애

한 번만 더 내 가슴을 장작처럼 패면

네가 될 것 같애


두 쪽으로 쪼개져서 하나의 불꽃을 이루는 것은

언제나 사랑의 꿈인가

우리는 계속 계속 꿈을 꿀 수 있는가


한 번 부정하고 한 번만 더 부정하면

나는 혼자 생각하지 않을 것 같애

나는 저 수천 개의 발과 함께 쿵쿵

 

 

 

 

 

 

5.jpg

 

윤의섭, 부러짐에 대하여




죽은 나무는 저항 없이 부러진다

물기가 사라질수록 견고해지고 가벼워지고

아마 죽음이란 초경량을 향한 꼿꼿한 질주일 것이다

무생물의 절단 이후는 대게 극단적이다

잘려나간 컵 손잡이는 웬만하면 혼자 버려지지 않는다

강철보다 무른 쇠가 오래 버티었다면 순전히 운 때문이며

용접 그 최후의 방편은 가장 강제적인 재생 쉽게 주어지지 않는 안락사

수평선 너머 부러진 바다와 구름 사이 조각난 낮달

나는 네게서 얼마나 멀리 부러져 나온 기억일까

갈대는 부러지지 않는다지만 대신 바람이 갈라지고 마는 걸

편린의 날들은 사막으로 치닫는 중이다

이쯤 되면 버려졌다거나 불구가 되었다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언젠가는 스스로 부러질 때가 있었던 것이고

서로의 단면은 상처이기 전에 폐쇄된 통로일 뿐이라고

둘로 나뉘었으므로 생과 사의 길을 각자 나누어가졌다고

조금 더 고독해지고 조금 더 지독해진 거라고

부러지고 부러져

더는 부러질 일 없을 때까지 부러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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