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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입술이 없는 묵언을 새겨듣는다
게시물ID : lovestory_9315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통통볼
추천 : 2
조회수 : 364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2/04/26 20:16:27

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Vaq7rZxJW-k

 

 

 

 

1.jpg

 

이장욱, 좀비 산책




비가 내리자

나는 드디어 단순해졌다

당신을 잊고

잠깐 무표정하다가

아침을 먹고

잤다


낮에는 무한한 길을 걸어갔다

친구들은 호전적이거나 비관적이고

내 몸은 굳어갔다


한 사람을 살해하고

두 사람을 사랑하고

잠깐 울다가

음악을 들었다


나의 사랑은 변하지 않았다

나의 죽음은 변하지 않았다

나는 금욕적이며

장래 희망이 있다


1968년이 오자

프라하의 봄이 끝났다

레드 제플린이 결성되었다

김수영이 죽었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나는 여전히 태어나지 않았다

비가 내리자

나는 단순하게

잠깐 울다가

전진하였다

 

 

 

 

 

 

2.jpg

 

김예강, 초면




초면에 물컵을 떨어뜨렸다

들고 있던 물컵의 작약이 흉터를 예감하며

저편 작약의 없는 손을 잡으려 한다

빗물이 창문에 남겨진 어제의 눈동자를 조용히 지우며 간다

이럴 땐 어제의 내부는 겹꽃 같아서

영혼이 어디론가 자꾸 숨는다

싸늘한 골목의 등은 밤사이 피를 데우려다

아침을 맞이하곤 한다

골목 안 담장에 길 없음이라 쓴다

갈팡질팡하던 아침이 등이 휜 고양이가

곧 얇고 유연한 새 골목을 끌고 오는 것을 우두커니 바라본다

어디선가 들은 희미한 노래가 등 뒤에서 들린다

조금 자란 손톱을 들여다보다

손금이 어디까지 흘렸는지 생각한다

손바닥은 번개의 발자국이 새겨져 있다

내 안의 열에 내가 데인 자국이다

우리는 초면인데 애인이라 한다

우리는 초면인데 적이라 한다

나는 꿈속인데 느닷없이 사랑하는 말을 한다

고양이 울음이 밤을 서성이다

창문을 두드리고 간다

초승달 속에 오래전 내가 서성이던 골목

 

 

 

 

 

 

3.jpg

 

유희경, 금요일




검은 옷의 사람들 밀려 나온다

볼펜을 쥔 손으로 나는 무력하다

순간들 박히는 이 거룩함

점점 어두워지는 손끝으로 더듬는 글자들, 날아오르네

어둠은 깊어가고 우리가 밤이라고 읽는 것들이 빛나갈 때, 어디로 갔는지

그러므로 이제 누구도 믿지 않는다


거기 가장 불행한 표정이여

여기는 네가 실패한 것들로 가득하구나

나는 구겨진 종이처럼 점점 더 비좁아지고

책상 위로 몰려나온 그들이 사라진 지는 이미 오래

그러니 불운은 얼마나 가볍고 단단한지

지금은 내가 나를 우는 시간

손이 손을 만지고 눈이 눈을 만지고

가슴과 등이 스스로 안아버리려는 그때

 

 

 

 

 

 

4.jpg

 

권민경, 기나긴 이별




3월에 눈이 내립니다

계절이 뒤로 돌아간 것 같아도

낮의 길이는 조금씩 길어지고 있어요


기분 나쁜 일


내 의지와 상관없이 건설되는 다리

멀리 이어지는 길

나는 어디론가 몰아지고 있어요

불쑥 불쑥 솟아나는 교각들

화분에 심은 귀리

솜털같이 가지런한 곰팡이

장차 원령이 되겠다는 의지와

현관 앞에서 보내는 시간

긴 다리를 건너는 동안 눈보라가 시작되고

길이 지워져도

자꾸 어디론가 어디론가

때론 뒤를 돌아보지만

결국


먼 곳부터 꺼지는 가로등

깜빡거리는 발가락

발목은 희미해지고

내가 지나쳐온 길이

어디까지 멀어지는지 알 수 없어요

3월은 미친 듯 뒤처지고

나는 안락한 곳에 들지 못했습니다


낮의 길이가 제일 긴 날부터

내 의지와 상관없이 사라지는 다리

내 남은 시간 짧아지네요


아주 기쁜 일

 

 

 

 

 

 

5.jpg

 

이이체, 종말론




입술이 없는 묵언을 새겨듣는다

혼(魂)이 휘청거리자 삶은 조금 기운다

사람의 아들이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볼수록 미래가 조금씩 흔들린다

과거는 거짓말의 전복이고 반복이다

모두 사라지는 풍경화

말이 생경한 종이들은 모두 의미에 대하여 제사를 지낼 것이다

손바닥에 총구를 겨눈 절망이 장전된다

진심을 전하고서야 비울 수 있는 무심이 채워진다

생전으로 후퇴하지 못한 갖가지 주술들이 세계에서 종적을 감춘다

열기는 온도에 의한 것이 아니다

온도의 분위기에 의한 것이다

부모로부터 훔쳐온 삶을 간증한다

금욕을 타작하는 사람들을 불경하게 여기는

방아쇠 당기지 않은 흉기만이, 무한(無限)을 걸어서 미궁을 건설할 것이다

모든 것에는 저의가 있다. 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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