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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 소설)연리지 : 너와 나의 틈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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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shinejade
추천 : 3
조회수 : 326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2/05/09 22:5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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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가 나에게 먼저 키스했는지 내가 너에게 먼저 키스했는지 그 구분이 희미하던 그날.

   63빌딩 근처 한강 한가운데서 36미터짜리 싹이 피어올랐다. 싹은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사이에 하늘을 찌를 듯 자라 올랐고, 어느새 줄기는 나팔꽃이 철조망을 휘감듯 63빌딩을 사로잡았다. 점점 거대해져 가던 싹은 어느새 빌딩 머리 위로 서울역보다 더 큰 핏빛 꽃봉오리를 틔워냈다.


   우리의 키스와 그 꽃이 무슨 상관이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키스를 마치고 더 붉어진 너의 입술과 뺨을 민망하게 내가 바라볼 무렵, 우리 머리 위로 전투기가 십수대는 넘게 지나갔다는 것은 확실했다. 네가 나를 향해 수줍게 속삭였던 그 고백이 전혀 들리지 않을 정도의 소리가 지나갔으니 말이다. 귓가에 속삭여지는 사랑을 막을 것은 그 정도가 되지 않으면 이상할 터였다.


   우리는 손잡고 다시금 사랑을 속삭이지 말았어야 했다.

   그 꽃이 날아 온 전투기를 앞에 두고 반짝거리는 포자를 내뿜었을 때. 그리고 그 포자에 뒤덮인 전투기에 삽시간 녹이 슬어 이끼와 꽃들이 맺혔을 때. 우리는 도망쳐야 했었다. 전투기에 낀 이끼의 색은 푸르른 녹청색이었고, 만발한 꽃들은 무지갯빛이었다. 그 꽃들은 너의 붉어진 뺨처럼 아름다운 색이었다.


   전투기에 녹이 슬어 엔진이 멈추기 바로 직전.

   자신의 온몸에 이파리들이 싹트는 것을 본 파일럿은 이성을 잃고 토마호크 미사일 발사버튼을 눌렀다. 꼬리 연기를 끌며 날아간 미사일은 핏빛 꽃봉오리를 찢어버리고 화염과 함께 폭발했다. 꽃잎들은 너덜거리며 흩날렸고, 터진 꽃받침에선 피처럼 붉은 수액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 수액인지 피인지 모를 액체가 쏟아지며 서울 상공에 비산했을 때. 그리고 바람을 타고 점점 멀리 서울 너머로 흘러갔을 때. 그 핏빛 안개에 닿은 사람들의 몸은 자연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손가락에서 나무줄기가 뻗어 나왔고, 발바닥에선 잔뿌리가 돋아나오며, 눈에서는 꽃이 피어나고, 피부는 점점 딱딱하게 굳어가기 시작했다.


   우리가 눈을 떴을 때.

   그러니까 이제 저녁밥을 먹으러 가자고 키스를 나눴던 벤치에서 일어나려 했을 때.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너는 자작나무로 나는 왕벗나무로 자라나던 중이었다. 우리의 발에서 자란 뿌리들은 이미 굵어져 공원 잔디밭을 깊숙이 침투해 움직이기 힘들었고. 키스했던 입술은 이미 옹이구멍으로 변해 굳어가던 중이었다. 그저 우리가 붙잡은 두 손만이 우리가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핏빛 안개가 점점 진해지며 우리는 점점 다른 종의 나무가 되어갔지만, 우리의 두 손만은 연결되어 있었다. 나무의 생장은 우리의 사랑을 이겨낼 수 없었고, 결국 우리의 두 손은 하나의 가지로 연결되었다. 우리는 두 사람에서 한 그루의 나무가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핏빛 안개는 지구를 전부 뒤덮었다.

   모든 사람은 이파리가 돋아나 식물이 되었기에 세상엔 이제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다.

   안개는 세상의 모든 식물의 생각을 공유해 주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공유했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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