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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역설
게시물ID : sisa_120778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Dr.Slump
추천 : 3
조회수 : 1159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22/07/20 14:3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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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돌프 히틀러는 독일 총통으로 취임하여 독일 제국을 수립한 후에서 부터 2차 세계대전 기간동안 유대인과 소련군 전쟁포로 뿐만 아니라 폴란드인, 양심수, 동성애자, 장애인, 양심적 병역거부자인 여호와 증인 신자와 기타 일반 범죄자들도 많이 수용소로 보내버렸다. 전쟁 중에는 추가적으로 연합군 전쟁 포로들도 소수 여러 이유로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1942년부터 가동되기 시작한 강제 수용소에서는 수 백만 명의 피수용자들이 학대, 질병, 굶주림과 과도한 노동으로 죽거나 노동 부적합자라는 이유로 살해당했다. 죽음의 수용소들은 유럽의 유대인들을 공업 방식에 의해 학살하는 최후의 해결을 위해 설립되었다. 이 수용소들은 점령지 폴란드와 벨라루스에 위치했는데, 동방 총독부 관할 지역이었다. 수많은 피수용자들이 대량 총살이나 기타 방법으로 사살당하긴 했지만, 수 백만명의 유대인이 가스실에서 독가스로 학살당했다. 벨제크소비보르트레블링카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를 포함한 이들 죽음의 수용소는 대개 강제수용소라 불리었으나, 홀로코스트 연구자들은 이를 <강제 수용소>와 <절멸 수용소>를 구별하기도 한다. 

  나치당은 독일에서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친위대(Schutzstaffel, SS)와 돌격대(Sturmabteilung, SA)라는 준군사 조직을 가진 유일한 정당이었다. 두 조직 모두 1920년대에 다른 정당의 당원 및 간부에 대한 공격을 줄기차게 벌였다. 1932년 선거 후, 나치 지도부에게 SS와 SA가 더 이상 선거에서 다수표를 보장할 수 없으며, 다른 수단에 의존하여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는 점이 분명해졌다. 1933년 선거 전까지 점점 증가하는 두 조직의 폭력 행동이 반대 정당을 파괴하는 동안, 나치는 독일에 강제 수용소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이 수용소의 상당수가 지방 당국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공산주의자나 나치의 독재를 거리낌 없이 비판하는 언론인과 같은 소위 "악질 분자"와 정치범에 대한 처형과 고문, 체포가 자행되었다. 권력 장악 후, 지역 SA 지휘관들은 닥치는 대로 공산주의자와 유대인을 체포했다. 이 때의 수용소는 SA와 SS 모두 따로 따로 각지에 설치했다.

  이 초기 수용소들은(대개 지하실과 창고) 결국 본격적인 시설로 강화되어 도시 외곽에서 대중과는 격리된 채 운영되었다. 1939년 즈음에 6개의 대형 강제 수용소가 설립되었다. 이 수용소는 다음과 같다. 다하우 강제 수용소(1933년), 작센하우젠 강제 수용소(1936년), 부헨발트 강제 수용소(1937년), 플로센뷔르크 강제 수용소(1938년), 마우트하우젠-구센 강제 수용소(1938년), 그리고 라벤스브뤼크 강제 수용소(1939년)이었다.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이후, 점차 강제 수용소는 나치에 반대하는 양심수들을 살해하고, 노예로 만들며, 고문을 하고 굶겨죽이는 곳이 되었다. 전쟁 중 나치가 보기에 "악질분자"를 감금해온 강제 수용소는 나치 독일이 점령한 유럽 전체로 확산되었다. 새로운 수용소가 대규모 유대인 공동체, 폴란드 인텔리겐챠, 공산주의자 집시같은 "악질분자"들이 조밀한 곳에 가까운 곳에 새로 건설되었다. 수용소 대부분은 단순히 병참 문제로 폴란드 점령지의 동방 총독부 관할 지역에 위치했다. 폴란드에는 수백만의 유대인이 있었다. 나치는 폴란드에 수용소를 설치함으로써 독일 주요 영토 외곽으로 독일의 유대인을 이송할 수 있게 되었다.

  대부분 수용소에서 피수용자들은 분류에 따라 한번에 구분할 수 있도록 색깔 있는 표식을 달아야 했다. 공산주의자들과 다른 정치범들은 붉은 색 삼각형을, 일반 피수용자들은 녹색 삼각형을, 동성애자들은 분홍색, 여호와의 증인은 자줏빛, 검은색은 집시와 즈비언을 뜻했으며, 유대인은 노란색 삼각형을 달아 쉽게 구분할 수 있도록 했다.

  소름끼치는 환경에서 화물 운송 열차를 사용하던 강제수송 과정에서 목적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많은 사람들이 죽었으며, 100명으로 꽉찬 화물차에서 고작 10명의 피수용자만이 살아나는 정도였다. 수감자들은 음식이나 물도 없이 며칠 또는 몇 주 동안 열차에 갇혀 있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여름에는 뜨겁게 달궈진 객차 안에서 탈수증으로 죽었고, 겨울에는 얼어 죽었다. 유대인과 다른 "악질분자"을 감금할 강제 수용소는 독일 내에도 있었는데, 그 수용소들은 특별히 체계적인 학살을 위해 설계되지는 않았지만 그곳에 갇혔던 많은 피수용자들이 가혹한 환경이나 처형때문에 죽게 되었다.

  때때로 강제수용소들은 중요한 피수용자들을 감금하곤 했는데,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 관련된 장군들이나 루터교 목사들인 마르틴 니묄러디트리히 본회퍼빌헬름 카나리스 제독과 같은 사람들이었다. 카나리스 제독은 1945년 2월 7일부터 종전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4월 9일에 처형될때까지 플로센뷔르크에 감금되었다.

  1942년 이후, 수많은 소규모 보조 수용소가 강제 노동력을 공급하기 위해 공장 근처에 설립되었다. IG 파르벤은 합성 공무 플랜트를 1942년에 아우슈비츠에 세웠고, 다른 수용소들은 항공기 공장, 탄광과 로켓 연료 공장에 배치되었다. 노동 환경은 가혹했으며, 수용자들은 가스실로 보내지거나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되면 처형당했다.

  1942년 이후, 수많은 소규모 보조 수용소가 강제 노동력을 공급하기 위해 공장 근처에 설립되었다. IG 파르벤은 합성 공무 플랜트를 1942년에 아우슈비츠에 세웠고, 다른 수용소들은 항공기 공장, 탄광과 로켓 연료 공장에 배치되었다. 노동 환경은 가혹했으며, 수용자들은 가스실로 보내지거나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되면 처형당했다.

  절멸 수용소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 헤움노 강제 수용소, 베우제트 강제 수용소, 르브린 강제 수용소, 소비볼 강제 수용소, 트레블링카 강제 수용소 등 6개의 강제 수용소를 가리키는 말이다. 절멸 수용소라는 명칭은 공식적으로 존재한 적이 없으나, 실제 역할에 있어서 다른 강제 수용소와 구분된다.  

  절멸 수용소는 대량학살을 목적으로 하고, 나치스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 안에 설립한 강제 수용소의 일종이다. 절멸 수용소는 2차 세계 대전중에 절멸 정책의 총마무리로서 지어졌다. 희생자의 사체는 통상은 소각처분 내지 집단 묘지에 묻혀 처리되었다. 이러한 수용소에 의해서 나치스가 절멸시키려고 한 것은 주로 유럽의 유태인과 (당시는 집시로 불림)이었다. 그러나 소련군의 포로나 동성애자, 때로는 폴란드인도 포함되었다.

  이렇게 많은 수용소가 존재했었고, 수 많은 유대인과 폴란드인, 소련군 포로들이 학살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기억 속에는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제일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 아마도 이런 강제 수용소의 대명사라고 해도 될 정도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절멸 수용소에 해당됨에도 불구하고 과연 어떤 점 때문에 역설이라고 불려야 할까?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나치가 세운 강제수용소 중에서 최대 규모이며, 1945년 기준 약 600만 명(유럽 전체 유대인의 80%)이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는 폴란드군의 병영이었으며 수용소의 건물들도 수용소 생성 후 새로 지어진 건물들 이외에는 전부 폴란드군 벽돌 막사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전체 28동으로 되어 있다. 이곳은 1945년 1월 27일 소비에트 연방의 붉은 군대의 진주로 인하여 해방되었다. 1947년에 세워진 희생자 박물관은 1979년에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세계유산 지정명은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 독일 나치 강제 수용소 및 집단 학살 수용소(1940~1945)"이다.

  이곳의 수감자들은 매우 좁은 크기의 방에서 생활했다. 이 방은 너무나 좁아서 일어서 있을 수가 없었다. 최초의 수용자들이 아우슈비츠에 온 것은 1940년 6월로 폴란드 양심수 728명이 첫 수용자들이었다. 이후 아우슈비츠로 보내진 폴란드인 수용자들은 약 15만 명이며, 이중 7만 5천 명이 죽은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1941년 9월 소련군 포로와 유대인 수용자들이 처음으로 독가스실에서 학살당한 것이 아우슈비츠에서의 첫 학살이었다. 독가스실에서는 한 번에 약 2,000여 명의 수용자가 학살당했다. 대부분의 피해자들이 노동력이 없는 노인과 여성, 그리고 어린이들이었는데, 수용소 도착 즉시 선별되어 보내졌다. 독가스실은 대게 샤워실의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나치는 학살 피해자들에게 샤워를 하라고 하여 옷을 벗게 한 뒤, 가스실에 보내어 학살하였다. 사용된 독가스는 효과가 빨리 나타나는 치클론 B였는데, 제조사인 회흐스트 AG는 전후에 나치의 유대인 학살 가담 전과 때문에 도덕성에 상처를 받았다. 학살 피해자들의 시체는 시체 소각로에서 대량으로 불태워졌는데 하루에 약 1,500구에서 2,000구까지의 시체가 소각되었고, 이들의 옷과 신발은 분류되었다. 또한 수용자들의 머리카락을 잘라 카펫과 가발을 만들었다. 이러한 나치의 만행은 현재 독일 역사교과서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기존에 아우슈비츠에서 학살당한 사람은 약 400만 명이며 이 중에서 약 250만 명이 유대인이라고 알려져왔다. 처음에 이 수용소를 해방한 옛 소련군의 발표였다. 그러나 이 숫자에 대한 반론도 있다. "과장되고 꾸며낸 얘기가 많다"는 제목으로 씌여진 뉴스위크지 1995년 1월 18일 자의 기사에 의하면, 아우슈비츠에서 죽은 사람은 유대인을 포함하여 110만 ~ 150만 명으로 추산했으며, 가장 많은 희생자가 유대인인 것은 분명하지만, 정확하게 몇 명이나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했다. 유태인 외에 나머지 희생자들은 폴란드 양심수, 나치에 저항한 동유럽 슬라브족, 동유럽인들과 옛 소련군 포로(주로 정치장교), 집시민족 등이었다. 이어 2005년 아우슈비츠 해방 60주년 행사를 알리는 기사에서는 유태인 희생자 수를 100만 명으로 쓰고 있다. 아우슈비츠에서 희생당한 러시아인, 동유럽인들은 300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논란의 여지는 있으나 이곳에서 엄청난 수의 유대인이 학살당한 것은 맞다. 반면 엄청난 수용소의 규모로 인해 죽지 않고 살아남은 유대인 또한 이곳이 가장 많다. 강제 수용소에 수용된 유대인 중 학살당한 사람의 비율이 어떻게 되는지 각 수용소별로 따로 계산하여 집계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아픈 과거의 기억에 대해 너무나 자세한 수치적 사실을 나열하기 싫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강제 수용소에서 학살을 당한 유대인의 비율이 가장 높은 곳을 꼽으라면 어쩌면 아유수비츠 수용소는 첫 번째로 뽑히지는 않을 듯 하다. 다른 "절멸 수용소"에서는 더욱 가혹한 학살이 이루어졌기에 어쩌면 다른 수용소가 학살된 유대인의 비율로는 최상을 다투지 않을까 한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가장 큰 수용소로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학살되었기에 우리에게 가장 유명한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곳이 얼마나 잔혹했는지는 살아남은 수많은 유대인들이 그것을 증언하였다. 어쩌면 죽지않고 살아남은 유대인이 가장 많았기에 그곳이 가장 유명해지지 않았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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