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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나는 빛을 피해 걸어간다
게시물ID : lovestory_9349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통통볼
추천 : 3
조회수 : 503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2/08/10 14:07:09

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Vaq7rZxJW-k

 

 


 

1.jpg

 

정현종, 하늘을 깨물었더니




하늘을 깨물었더니 비가 내리더라

비를 깨물었더니 내가 젖더라

 

 

 

 

 

 

2.jpg

 

허연, 나는 빛을 피해 걸어간다




그대는 오지 않았네 삐뚤어진 세계관을 나누어 가질

그대는 오지 않았네 나는 빛을 피해서 한없이 걸어가네


나는 들끓고 있었다

모두 다 내주고 어느 것도 새 것이 아닌 눈동자만 남은 너를 기다렸다

밤이 되면서 퍼붓는 어둠 속에 너는 늘 구원처럼 다가왔다

철시를 서두르는 상점들을 지나 나는 불빛을 피해 걸어간다

행여 내 불행의 냄새가 붉은 입술의 너를 무너지게 했는지

무덤에도 오지 않을 거라고

보도블록 위에 토악질을 해대던 너를 잊을 수는 있는 것인지

나는 쉬지 않고 빛을 피해 걸어간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당신들이 저놈의 담벼락에다 대고 울다 갔는지

이 도시에서 나와 더불어 일자리와 자취방을 바꾸어가며

이웃해 사는 당신들은 왜 그렇게 다들 엉망인지

가면 마지막인지

왜 아무도 사는 걸 가르쳐주지 않는지

나는 또 빛을 피해 걸어간다

 

 

 

 

 

 

3.jpg

 

송승언, 지엽적인 삶




비닐하우스에는 빛이 가득하다 현기증이 난다


너는 거대한 사물에 물을 뿌리고 있다 그것이 뭐냐고 물었다

그것은 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꽃이 아니다

꽃은 색이 있고 향기가 있다 무더기로 살다가 무더기로 죽는 것이다


그것은 거대한 하나이고 색이 없다 살지도 죽지도 않고 무한히 자라난다


요즘은 잘 사냐고 물었다 잘 사는 게 뭔지 모르겠다고 했다

요즘은 아프지도 슬프지도 않다고 했다


꽃이 아닌 그것이 비닐하우스를 채웠다 현기증이 났다

그런데 너는 누구냐고 물었다


이곳에는 빛이 가득하다 몸을 잃을 만큼


물을 뿌렸다

물이 흩어진 곳에서 어둠이 번식한다

 

 

 

 

 

 

4.jpg

 

채길우, 매듭




질식은 황홀을 불러일으킨다

뇌로 전달되는 산소가 순간적으로 부족해지면

몽롱한 잠과 같은 현기증을 동반한 부러운 이탈에 도달할 수 있다

살아가는 데 가장 절실한 것들이 부재하는 막다른 곳에서조차

절망하지 않기 위해 쾌락은 고통에 종속되도록 설계되었다

도무지 삶의 기쁨을 포기할 수 없는 불가능한 여기로부터

스스로를 죄어가며 다시 일어서는 부푼 자루 속 공기 같은 미소를 지어보라

일시의 행복에 목매여 자신을 끊임없이 결박하는 꿈의 아름다운 인상을

일그러진 표정 안에 숨어 고독과 공포와 통증과 구별할 수 없이

탐닉과 비하와 만족의 거울에 비친 중독된 얼굴로

좀처럼 풀리지 않을 포옹과 악수 위에

숨막힐 듯 현란한 서로의 주름과 손금을 겹쳐 헝클어

각자가 사랑이라 부르는 동그랗고 단단한 묶음 하나를 완성해보라

 

 

 

 

 

 

5.jpg

 

송종규, 생일




그때 네가 본 것은 내가 아니었다

그때 나는 막 늦은 저녁을 먹으려던 참이었고

그때 나는 빵이 부풀어 오르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때 나는 거기에 있지 않았고

별빛이 빗발치는 창가에서 가을이 오고 있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네가 본 것은 내가 아니었다

나는 악다구니 쓰는 좌판이 즐비한 변두리 시장에서

속이 꽉 찬 양파를 고르고 있었고

그때 나는 첫눈 같은 우주의 엽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네가 본 것은 아마 내가 아니었을 것이다

네가 말하는 그곳은 여기가 아니었을 것이다

짐작하건데, 햇살 아래 파라솔을 들고 맨드라미처럼 서 있었던 것은

내가 아니었을 것이다


네가 본 그곳은 여기가 아닌 거기였고

나는 그때 잔물결이 파랑치는 물가에 서있었다

어린 피라미들이 수초 사이를 유영하고 있었고

머리 위에 쏟아져 내리는 빛들의 배후가 서늘한 밤이었다


그때 네가 본 것은 내가 아니었고

너는 그때 이 세계의 바깥에 있었다

그때 우리는 크고 신비한 두 세계의 이쪽과 저쪽에 분리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그때 네가 본 것은 내가 아니었을 것이다


너는 그때 이 세계의 문밖에 있었고

나는 해파리처럼 둥근 이 세계 안에 있었다

그때 네가 본 것은 우주를 통과해 가는 불빛이거나

작은 티끌이었을 것이다

그때 나는 지중해에서의 하루를 그리워하거나

뜯어진 바짓단을 연민 가득한 손바닥으로 쓸고 있었을 것이다


어떻게 우리는 두 세계를 안고 있는 한 몸이었는지

너는 수없이 나를 만난 적 있다고 증언하고 있는지


그때 나는 거기에 없었으므로

네가 본 것은 내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만나자마자 서로를 알아본 것인지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나는 네 작은 입술에서

천 년 전 나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는지


불가사의한 일로 가득 찬 이 세계에서

나는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너를 받아 안았다

커튼처럼 하나의 세계가 닫히고 또 하나의 세계가


두 손으로, 너를 받아 안는 새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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